322화
귀신들의 성녀가 우울한 검은빛을 내는 사람이라면, 광안의 성녀는 새하얀 사람이었다.
단정하고 부드러운 향이 풍겼다. 차분한 목소리에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눈을 감고 한참을 침묵했던 귀신들의 성녀가 입을 열었다.
“뭐가 잘못했다는 거야? 어차피 넌 히어로고… 나는,”
“마리암.”
온순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광안의 성녀가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말을 끊었다. 귀신들의 성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처음으로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는 당신은 왜 제가 했던 말에 상처받았던 건가요?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건가요?”
“그건, 네가…….”
“맞아요. 제가 잘못했던 거예요.”
광안의 성녀의 눈동자는 마치 별을 박아 넣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만큼은… 우리, 그렇게 나누지 않도록 해요.”
귀신들의 성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털을 세우고 잔뜩 경계했던 이전보다는 조금 태세가 누그러졌다. 그녀에게서 조금씩 새어 나오는 따뜻한 숨결은 정말 그녀가 귀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따뜻하다. 빌런들은 피마저도 차가운 괴물인 줄 알았는데,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거나 얽매이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었다.
.
.
.
드디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광안의 성녀는 낡은 주택 이곳저곳을 탐색하던 중 부서지고 일그러진 계단 난간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낡은 천을 가져와 난간에 덧대며 고치기 시작했다.
“뭐해?”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어두침침하고 낡은 복층 다락방에 숨어 있던 귀신들의 성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빼고 구경하더니 옆으로 다가왔다.
“여기가 부서져 있어서요. 고쳐 보려고요.”
“바보 아냐? 여긴 저승하고 이승을 이어 주는 공간에 불과해. 고친다고 고쳐질 것이 아니라고.”
귀신들의 성녀가 다시 시비를 걸듯 공격적으로 소리쳤지만, 이미 그녀의 말투에 익숙해진 광안의 성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정심을 찾고 싶을 때마다 습관처럼 눈을 감고 귀신들의 성녀를 쳐다보곤 했는데, 이젠 눈을 감지 않아도 똑같은 표정이 나왔다.
“여긴 당신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고치고 싶은 거예요. …사실 그냥 심심해서 하는 거니까 너무 나무라지 말아요, 마리암.”
“…….”
귀신들의 성녀는 이름을 불리는 것에 매우 약했다. 이래서 이름을 알려 주기 싫어했던 걸까 싶었지만, 그녀가 정말 싫었다면 이전처럼 온갖 난리를 치고 입에 거품까지 물면서 쫓아왔을 것이다.
그런 성질머리를 잘 알기에 광안의 성녀는 그녀가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진짜! 멍청한 거 아냐? 아무 쓸모없다니까! 어차피 여긴 허상이라고!”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손에서 피가 난다고! 여기는 허상이지만 네가 입은 상처는 허상이 아니야!”
익숙하지 않은 노동을 한 탓에 서툴게 손을 움직이다가 나뭇가지에 찔리고 말았다. 광안의 성녀의 손가락에서 붉은 핏방울이 한 방울씩 새어 나와 흘러내렸다.
“알겠어요. 잠시만요.”
손가락 상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광안의 성녀는 결국 마지막까지 천을 덧댄 난간을 꼼꼼하게 살펴보기까지 했다.
“어차피 여기서 고쳐 봤자 소용없어. 내가 겪었던 현실은 망가진 그대로니까. 여기서 네가 아무리 뭘 해 봤자 헛된 노력일 뿐이야.”
“괜찮아요. 그래도 나중에 이곳에 왔을 때 제가 고쳐 줬던 걸 기억해 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만족하니까.”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문 귀신들의 성녀와는 다르게 광안의 성녀는 처음 해 보는 색다른 경험에 뿌듯해하는 중이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히어로 협회에서 처리하지 못한 엄청나게 많은 업무량과 의뢰에 심심한 겨를이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고 과거를 돌아보기도 하며 무료함을 달래는 경험을 해 보았다.
“…이 난간은 과거에 남동생이 넘어졌던 곳이야. 이쪽으로 머리가 부딪쳤는데 난간이 많이 낡아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때 부서졌어. 이렇게 고칠 방법을 알았다면 어렸을 때, 여기를 지날 때마다 조심하지 않아도 됐었을 텐데.”
뾰족하고 날카로운 나무 난간은 어린아이인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무서웠을 것이다.
광안의 성녀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어서 힘들었다. 사람들은 귀신들의 성녀가 악독한 빌런이라고, 귀신같이 불쾌하고 무섭게 생겼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 그녀는 무섭게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한 피부는 그녀가 처연해 보이게 했다. 덥수룩하게 생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새빨간 입술은 괜히 눈길이 갈 만큼 도톰하고 예뻤다.
갑자기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자신이 파렴치한 같을까.
광안의 성녀는 필사적으로 귀신들의 성녀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창틀 아래가 무너져 내린 게 눈에 띄었다. 그쪽으로 다가가 창틀을 만지작거렸다.
“여긴…….”
“뭐.”
“왜 이렇게 된 건가요? 꼭…….”
“꼭 누가 발로 밟은 것 같다고?”
귀신들의 성녀가 이죽거렸다. 방금까지 조금은 생기 있는 얼굴이었던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이런 몸이라도 욕보이고 싶은 놈들은 얼마든지 있거든. 그때 침입했던 놈이 밟아 부서진 흔적이야.”
“…….”
“귀신들이 내쫓아 줘서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지만, 두 번 다시 겪기 싫은 불쾌한 경험이야. 그 자식 덕분에 귀신 들린 집이라고 사람들이 기피했지만…….”
콰직.
광안의 성녀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에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아.”
제 악력에 부서진 창틀을 보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녀는 이번엔 주방에서 도마를 가지고 와 틀에 맞춰 고치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해결법을 생각하는지 귀신들의 성녀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했다간 오히려 더 부서지잖아! 너 바보야? 손재주도 나쁜 게 왜 나서서 남의 집을 부수고 난리야. 이리 줘! 차라리 내가 할 테니까!”
손을 뻗어 소리치던 그녀는 광안의 성녀와 눈이 마주치자 펄쩍 뛰었다.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널 위해서가 아니거든! 여기가 무너지면 밖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악귀들이 몰아닥친다고!”
그렇게 말한 뒤 손으로 판자를 덧대며 부서지는 창문을 고치기 시작했다. 광안의 성녀는 구시렁거리면서도 결국은 자신을 도와주려는 마리암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리저리 판자를 고정하다가 저도 모르는 새에 광안의 성녀의 품 안으로 쏙 들어오기까지 했다. 광안의 성녀가 그렇게 체구가 큰 편은 아니지만, 귀신들의 성녀는 그녀보다 작은 편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갑자기 들려오는 환청에 창문 쪽으로 향해 있던 귀신들의 성녀가 바깥으로 시선이 향했다. 또다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광안의 성녀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리암에게는 무엇인가 보이는지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독할 만큼 침묵하는 마리암의 눈동자엔 그녀의 어린 동생이 거꾸로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대로 떨어져 죽었다고 했었나. 그리고 자연스럽게 바깥에서 어떤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젠장, 죽었어?’
‘그러니까 내가…….’
광안의 성녀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귀신들의 성녀의 귀를 막았다. 그리고 그녀를 등 뒤로 숨긴 뒤 창밖이 보이지 않도록 가렸다.
‘당신은 내게 대체 뭘 바라고… 이곳에 있는 걸까?’
이제 보니 이곳은 귀신들의 성녀가 광안의 성녀를 가두기 위함이라고는 했지만, 그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는 곳이기도 한 듯했다.
“귀신들이 성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 제 얘기를 해드릴게요. 어디까지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저는 김 씨 가문에 속한 노예입니다. 몇백 년 동안 육체를 옮겨가며 살아왔어요. 기억나진 않지만, 전대 광안의 성녀들 모두 순응했다고 해요.”
“…….”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순응하며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마리암… 그거 아나요? 광안의 성녀의 영혼에 상처를 입기 시작하면 영혼을 옮긴다고 했다지만, 그건 보기 좋게 포장한 말이에요.”
뒤를 돌아 마리암을 꼭 껴안으며 광안의 성녀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살고 싶어질 때, 이 삶을 끈질기게 이어 가고 싶다는 욕망이 나타날 때 영혼을 바꿔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전의 기억은 없어지고 새로운 광안의 성녀가 태어나죠. 살고 싶다는 의지를 틔우기도 전에 싹을 잘라 버리니 미련 없이 명령에 따를 수 있었던 거예요.”
삶에 대한 욕망. 그리고 그 의지가 조금씩 싹터올 때 짓밟아 버린다. 그런 식으로 속박해오는 것에 광안의 성녀들은 고분고분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마리암, 당신이 날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말았죠. 살고 싶다는 의지를 되새기게 했어요. 그래요, 마리암. 내 패배입니다. 난 살고 싶어요. 당신이 나를 욕심나게 했어요.”
이곳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낭떠러지도 몰았던 그들과는 달리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삶에 대한 집착이 피어나도록 했다.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마리암을 보고 자신은 무슨 삶을 살았던 것일까 돌아보게 했다. 하지만, 그건 독이었다.
“난… 살아도 되는 걸까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그것을 힘으로 삼아요. 나같이 저주받은 사람이 계속 살아도 되는 걸까요. 내가 이러면 라라의 갈 곳 없는 육체는 어떻게 해야 하죠. 마리암… 전, 저는 살아도 될까요?”
이윽고 마리암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동생의 죽음을 마주하고 창백해진 얼굴이 아니라 눈을 가늘게 뜨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어차피 다른 놈들은 네 사정 따위 신경도 안 쓰는데. 너 혼자 천사 병 걸려서 고민하고 있어. 네 뜻대로 살아 보던가…….”
그러더니 드디어 광안의 성녀와의 담판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으스대는 얼굴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광안의 성녀는 깨달았다.
‘난 사랑에 빠졌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