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23화 (323/324)

323화

“난… 살아도 되는 걸까요?”

그 말을 들은 귀신들의 성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뭐 그런 걸 묻는담? 여태까지 이런 곳에 가둬 놓은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야?’

하마터면 화를 낼 뻔했지만, 가까스로 꾹 참았다. 이제 이곳을 유지하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악귀들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까이 올 때마다 쫓아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놈’들이 찾아올 때가 되었다는 점이다. 저승에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들이 집을 짓고 사는데 구경만 하고 있을 양반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이승으로 돌아갔다간 또 엄한 놈에게 영혼을 주겠다는 헛소리를 할까 봐 초조했었다. 그런데 그전에 광안의 성녀가 마음을 고쳐먹어서 다행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죽으려고!? 내가 충분히 괴롭힌 다음 지옥을 맛보여 줄 때까지 죽을 수 없어.’

귀신들의 성녀의 기세가 자신만만해졌다. 타이밍 좋게도 ‘그놈’들의 기척이 바깥에서 느껴졌기에 더더욱 초조함이 빠르게 가셨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시선을 맞추고 있던 때, 적막을 깨트리려는 듯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죠?”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청객에 광안의 성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계했다.

이곳이 이승이었다면 모를까. 저승세계, 그것도 귀신들의 성녀가 지키는 공간에 문을 두드리는 존재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광안의 성녀의 날카로운 반응에 귀신들의 성녀가 어둡게 웃었다.

“호호호… 네가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야. 적어도 저승에서 저놈들에겐.”

귀신들의 성녀가 꾸물꾸물 움직여 광안의 성녀의 품 안에서 벗어나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한참이 지난 후 또다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저것이 마지막 경고일 것이다.

귀신들의 성녀는 느긋하게 가지 방울을 흔들어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검은색 도포에 갓을 쓴 남성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에 검게 물든 입술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자는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키 때문에 올려다보는 것마저도 힘들었다.

“어찌 인간들이 저승의 문턱에 발을 담그고 있는가.”

근엄한 표정을 지은 거대한 사내가 아주 강압적이고 우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광안의 성녀는 생긴 것은 완전히 달라도 그들이 어쩐지 귀신들의 성녀와 분위기가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러다 이내 그들이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승사자들임이 틀림없었다.

광안의 성녀가 갑자기 나타난 남자들의 정체에 대해 유추하는 사이 귀신들의 성녀는 삐딱하고 반항적인 표정으로 키 큰 저승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을 즈음, 뒤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저……? 소저가 어째서 여기에 계십니까?”

“…선배님. 여기 이 산 자와 아는 사이십니까?”

두 성녀를 내려다보며 위암감을 내뿜던 저승사자는 뒤에 있던 다른 저승사자가 나서자 당황해하며 두 팔을 교차해 몸을 작아지게 했다. 이윽고 등이 굽을 정도로 천장까지 닿았던 몸이 점점 작아져 일반 성인 남자의 체구를 가진 저승사자가 되었다.

그러자 그와 비슷한 차림의 검은 도포를 입은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잔뜩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후배를 지나쳐 귀신들의 성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하얗게 질린 낯빛을 가졌지만, 숨길 수 없는 날카로움과 준수한 외모를 가진 사내, 저승차사 광혼사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눈살을 잔뜩 찌푸리는 귀신들의 성녀와 달리 광혼사는 한참이나 말문이 막힌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별개로 후배 저승사자도 매우 놀란 상태였다. 항상 냉정함을 잃지 않는 선배로서 저승사자 중의 엘리트인 광혼사가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님. 아는 사이입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광혼사가 표정을 수습하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너는 잠시 나가 있어라. 이 소저와는 내가 대화를 나눌 터이니.”

“예.”

방금까지 보여 주었던 고압적인 태도는 냉큼 벗어던진 후배 저승사자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뒷걸음질 쳐 밖으로 나갔다.

후배가 완전히 나가는 것까지 확인한 광혼사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아직도 적대적인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귀신들의 성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누이…….’

그립고 그리운 사람.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그의 소중한 가족.

그렇게 헤어지고 저승에서 지내는 몇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었다. 저승사자가 되었어도 하나뿐이었던 가족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만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어떤가. 이 낡은 주택은 광혼사가 살아생전 누이와 함께 지냈던 곳이다. 집안 곳곳에서 미련이 한가득 느껴졌다.

‘바보같이 이곳을 미련으로 두었던가.’

이 와중에 악귀들이 악독하게도 옥상에 올라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보였다. 저것은 자신이 죽었을 때의 광경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누이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인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지금까지도 마음에 두고 괴로워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리고 아팠다.

처음 만났을 때도 내가 당신의 동생이라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죽은 자와 산 자는 결코 함께할 수 없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그의 미련이기도 한 누이에게 밝힌다면 그는 저승차사의 자리에서 쫓겨나 죄인이 되어 저승에 떨어질 것이다.

“소저. 이곳은 경계라고 하나 엄연히 저승입니다. 이곳에서 계속 지내게 된다면 아무리 소저라 할지라도 몸에 큰 무리가 가고 저승의 기운에 괴로워질 것이 분명하거늘, 어찌 이런 무모한 짓을 하셨습니까.”

“닥쳐.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뭔 상관이야?!”

“어서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소저는 저승의 율법을 어긴 겁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든 대왕께 부탁해 보겠으니…….”

이제 보니 귀신들의 성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저승사자에게도 패악을 부리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광안의 성녀는 그보다도 저승사자가 한 말 중에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었기에 불쑥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부담이 가다니요. 전 듣지 못했어요.”

“…이승에 살아가야 할 이가 저승에 터를 지었으니 이 어찌 부담이 아니겠습니까? 밤낮으로 몰려드는 악귀들과 선뜩한 과거로부터 정신을 지켜야 합니다. 오래 있을수록 미련이 더욱더 선명해져 소저의 정신을 갉아먹어 나중엔 광증이 올 수도 있단 말입니다.”

“뭐라고요?”

“소저의 이름은 아직 명부에 없는데 저승에 있으니 육체에 무리가 가는 건 당연지사……. 얼른 이승으로 가셔야 합니다.”

“귀신들의 성녀… 왜 말을 하지 않았나요.”

귀신들의 성녀는 눈앞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을 향하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닥쳐!”

“닥칠 일이 아닙니다, 소저!”

“귀신들의 성녀!”

“닥치라니까!”

“마리암!”

광안의 성녀가 이름을 부르며 강하게 소리치자 귀신들의 성녀가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이번엔 광혼사가 고개를 들어 올려 의문 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름을?”

광혼사의 의문을 해소해 주지 않은 채 귀신들의 성녀는 광안의 성녀에게만 시선을 고정하며 외쳤다.

“안 그래도 갈 생각이었으니까 닥쳐! 내가 여기에 뭐 때문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말할수록 짜증이 더욱 치솟는지 그녀가 광혼사를 휙 돌아봤다.

“너 같은 놈들이 나타날까 봐 곧 철수할 생각이었다고!”

이곳을 나가겠다는 말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광혼사는 저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여인네들 아닌가……?’

사고방식이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광혼사는 누이의 일에 대해서는 머릿속이 잔뜩 굳어 있는 남동생이었다. 광혼사가 어떤 기분을 맛보든지 두 성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광안의 성녀는 이곳에서 곧 나갈 것이라는 소리에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얼굴이 어둠으로 물든 그녀를 보던 귀신들의 성녀는 속에서 열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나가 봤자 영혼이 없는 딸 때문에 그녀가 또다시 새로운 삽질을 시작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말도 섞기 싫은 저승사자에게 이번 한 번만 부탁해 보기로 했다.

“저승사자. 이 여자의 이름이 명부에 적혀 있어?”

귀신들의 성녀의 물음에 광혼사는 되묻지 않고 조용히 허리춤에 달린 도를 뽑았다.

본디 인간에게 보여 주어서는 절대 안 되는 명부였다. 그럼에도 광혼사는 인간의 앞에서 칼날이 드러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폈다.

칼날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인간들의 이름. 이것이 바로 광혼사가 들고 다니는 저승 명부였다. 도에 적힌 이름들을 쭉 훑던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소저의 영혼은 명부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래? 인간이 2백 년 이상 살면 강제로 명부에 적히는 걸로 아는데?”

그 말에 광혼사는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광안의 성녀를 구석구석 살폈다.

저승사자의 눈은 영혼을 꿰뚫어 보는 눈. 설령 그것이 제아무리 날고기는 S급 히어로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광혼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직 팔팔한 젊은 나이의 소저가 아닙니까. 죽음이 드리워지기엔 이릅니다.”

“그러면 이 여자의 딸은?”

그러자 저승사자의 얼굴이 급격하게 침울해졌다.

“…과부였습니까. 흠…….”

도에 적힌 이름과 광안의 성녀를 번갈아 살피던 그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딸이라… 함께 사는 어린 여식 말씀이군요. 그 소저 역시 아직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입니다. 천생을 누리셔야지요.”

귀신들의 성녀는 광혼사의 대답에 잠시 생각하더니 가지 방울을 딸랑딸랑 흔들며 광안의 성녀에게 이죽거렸다.

“영혼을 옮긴다느니, 새로 태어난다느니 하는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저승사자의 말을 들으니 또렷하게 알겠어. 너, 속고 있었구나?”

우울한 안색의 얼굴을 들어 올린 귀신들의 성녀는 이 멍청한 여자를 몇십 년이나 속인 누군가를 떠올리며 섬뜩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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