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324화 (324/324)

324화

귀신들의 성녀가 가지 방울을 흔들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영혼과 귀신, 한(恨)과 원(怨)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광안의 성녀가 대대로 영혼을 옮긴단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의심을 품어 왔었다. 그리고 지금, 눈엣가시같이 꼴 보기 싫은 저승사자 덕분에 그 의심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애초에 저승 시왕도 하지 못할 일을 평범한 인간들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빙의되는 것도, 다른 육체에 영혼이 귀속되는 것도 귀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미친 눈깔 너는 아무것도 덮이지 않은 깨끗한 영혼이란 말이야.”

지금까지 머릿속에 가시가 박힌 듯한 느낌만 나고 뚜렷이 빠져나온 게 없어서 답답해서 죽을 뻔했는데,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더니 이럴 때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귀신들의 성녀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무슨 전대 광안의 성녀의 영혼을 옮기느니, 세대를 이어 온 노비라느니. 그거 전부 거짓말이야. 넌 전대 광안의 성녀도 아니야. 네가 가진 힘의 구슬에 그 여자들의 생명이 흡수되어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다시 말해 줘?”

귀신들의 성녀가 광안의 성녀의 가슴께를 검지로 꾸욱 눌렀다.

“개죽음이었다고.”

그러니까 사실은 대를 이어져 내려온 광안의 성녀들은 영혼이 옮겨 가는 것이 아닌, 그녀들이 가지고 다니는 구슬에 생명이 흡수된 것뿐이었다.

구슬의 주인인 초대 광안의 성녀의 생명을 흡수하고, 그녀의 유전자가 섞인 세포로 만든 클론들이 구슬을 사용해 온 것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힘이 불완전하기에 타인의 생명을 탐해야 했다. 짐작건대 초대 광안의 성녀는 다른 자들의 생명을 빼앗지 않고도 능력을 무한정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구슬에 흡수되어 생을 마감한 이들을 두고 영생을 살아가고 있다며 노예로서 복종하도록 지금까지 광안의 성녀들을 속여온 것이다.

“저는, 그러면 라라는…….”

“그럴 용도로 길러졌으니까 아무것도 기억 못 하겠지. 그렇게 세뇌당했으니까 원래 그런 것인 줄 알았겠지! 네 이름이 13호였다며! 그런데 그걸 어떻게 네 이름이라는 걸 인지할 수 있었는데?! 단순히 널 그렇게 불렀다고 해서 납득한 거야?”

귀신들의 성녀가 따지듯이 쏘아붙였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 영혼, 삶,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광안의 성녀에게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

광안의 성녀는 줄곧 자신의 정체성으로 괴로워했었다. 자신은 살아선 안 되는 존재라고 굳게 믿으며 삶에 대한 확신을 전혀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기꺼이 구슬에 생명을 흡수당해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런 태도에 답답하고 잔뜩 열 받은 귀신들의 성녀가 팔을 뻗어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붙잡았다.

“내가 충고해 줄까? 어차피 네 영혼은 네 딸에게 이어지지 않아. 넌 그냥 전대 능력자들처럼 생명이 빨려서 죽을 예정이었어. 그리고 네 딸 또한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 구슬을 깨……! 그러면 진짜 네 힘이 각성할지 누가 알아?!”

귀신들의 성녀는 광안의 성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우주를 품은 듯한, 빛이 나는 눈동자를.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종족은 죽을 때 아름답게 빛나는 신비한 구슬을 남긴 채 죽는다고 한다.

뼛조각 하나 남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빛나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석처럼 남긴다고.

“네 선조는 불요족이었던 거야.”

불요족. 광안(狂眼)의 성녀.

과거 인간들은 광안(光眼)을 가진 불요족을 붙잡아 노예로 삼곤 했었다.

아마 별을 읽을 수 있는 신비로운 눈을 가진 한 노비가 능력을 각성했을 것이다. 그 능력과 광안의 보석을 탐낸 인간들이 해서는 안 될 반인륜적인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아니면 이제라도 끝낼 수 있는 비극이자 진실이었다.

*  *  *

시민들을 반강제로 가둬 놓은 대피소가 하나둘씩 개방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장이 사라진 것에 더해 유럽 연합 히어로 협회장인 가시 여왕마저도 행방이 묘연해져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지하에 숨어 있던 ‘푸른 괴인’들의 소탕도 점차 진행되어 가는 와중에 서울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다섯 개의 도시가 동시에 봉쇄를 풀었다.

당장 이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빌런들을 정리하고 처리하는 데 고전하지 않아도 되니 의지만 있다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신재언의 회사는 이 와중에도 재택근무를 강행하고 있던 몇 안 되는 회사 중 하나였다. 때문에 신재언의 통장에 찍힌 이번 달 급여 173,000원은 잘못 찍힌 것이 아니었다.

핸드폰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하던 재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그런데 이 순간에 2,813,002원이 카드값으로 통장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아… 미친.”

재언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대피소로 피난하고 도시가 봉쇄되고 나라가 망가지거나 파괴되었는데 회사는 급여를 줄이고 카드회사에서는 악착같이 카드값을 빼갔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회사는 그동안의 결근을 ‘무단결근’이 아니라 ‘무급휴가’로 전환해 주었다는 점이었다.

‘독하네! 독해!’

세계가 멸망해도 이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재언은 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졌다.

“…귀신들의 성녀에게 연락은 없어?”

“없습니다.”

“벌써 한 달째 아니야? 얼마나 오래 있을 생각인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귀신들의 성녀는 똑 부러지는 아이니까 별걱정은 없을 거예요.”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재언의 옆에 앉아 있던 코루루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재언은 애교를 부리며 엉겨 붙어 오는 코루루의 머리를 쓰다듬고 정수리에 얼굴을 기댄 채 핸드폰으로 기삿거리를 찾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중, 때마침 그들의 앞에 낡고 거대한 나무 대문이 생겼다.

‘체어맨?’

재언이 눈동자를 굴리자 시선이 마주친 체어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능력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거기다가 이곳은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이었다. 누구든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재언은 직감적으로 가면을 찾아 얼굴에 썼다.

끼이익, 하고 소리를 내며 열린 문은 놀랍게도 ‘저승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검은 도포를 입은 익숙한 얼굴의 저승사자였다.

“어라? 광혼사 대인 아닙니까?”

창백한 안색으로 나타난 광혼사는 재언이 앉아 있는 거실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저승사자에게도 제법 깍듯하게 인사를 받다니……. 이거 감회가 새로운걸.’

한편으론 저승사자가 영혼을 데리러 오기 위해 인사해 주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공포 영화에서 귀신들을 끌고 가던 저승사자가 떠오르기 때문일까.

재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그런 그의 노력을 알아주었는지 저승사자가 옆으로 비켜나자 그의 뒤로 두 명의 여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위풍당당하게 저승의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역시 귀신들의 성녀였다.

덥수룩한 머리와 붉은 입술, 시퍼렇게 질린 낯빛, 기분 나쁘고 음울한 분위기를 가진 귀신들의 성녀는 나직하게 웃으며 재언에게 인사를 건넸다.

“호호호… 아버지, 저 귀신들의 성녀가 돌아왔습니다……. 위대하신 아버지께 먼저 인사를 올렸어야 했는데.”

“어머, 얘. 너 다친 덴 없니? 어째 더 귀신같은 몰골로 돌아왔어.”

재언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던 코루루가 귀신들의 성녀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한걸음에 달려가 끌어안았다.

재언은 귀신들의 성녀가 다친 곳이 없다는 것에 일단 한시름 놓았다. 저승사자가 함께 나타났기에 진짜 귀신이 된 건가 심장이 철렁했기 때문이다.

코루루의 말대로 지금 그녀는 오늘따라 더욱 귀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도 원한으로 가득한 악귀처럼 보였는데, 잘못 본 모양이었다.

“아… 광안의 성녀.”

재언은 귀신들의 성녀의 뒤쪽에 서 있는 광안의 성녀를 보고 이런 때에 잘도 발동하는 자신의 직감에 감사했다.

그녀의 묘한 표정만큼 재언도 심경이 복잡했다. 이곳에 히어로가 들어오다니… 레헬 다음으로 처음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담판을 짓는다고 간 거였으면서 어째 두 사람 분위기가 좀 묘했다. 재언의 머릿속에 달린 레이더에 뭔가 닿을 듯하면서 닿지 않았다.

엔레이드맨은 이런 곳에 이방인을 끌고 온, 그것도 S급 히어로를 데려온 귀신들의 성녀의 섣부른 행동에 한껏 잔소리를 퍼붓고 싶었지만, 꾹 참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대번에 알아차린 재언이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뒤로 물렸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다행입니다, 광안의 성녀.”

광안의 성녀의 낯빛이 전보다 훨씬 좋아진 것을 보니 그녀도 죽어서 귀신이 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다크 카오스.”

광안의 성녀가 신음처럼 눈앞의 빌런을 불렀다. 예전이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설령 이 목숨이 다한다고 해도 세상의 혼돈을 가져오는 그를 잡으려고 했을 텐데.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정의란 무엇이고 어느 쪽이 진정한 정의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우리도 당신을 찾았어요. 귀신들의 성녀가 신세를 졌습니다. 그녀가 다치진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아, 혹시 딸을 데리러 오신 겁니까? 공원에 혼자 두기 위험해서 데려오긴 했거든요.”

…근데, 좀 문제가 생겼다.

신재언의 머뭇거림을 읽은 광안의 성녀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라라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죠?!”

“어… 걱정하지 마세요, 광안의 성녀.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한 달 동안 우리는 그 애의 보모 노릇을 자처했다고요. 음… 근데 정말 영혼이 없는 인형이었던 게 맞습니까? 뭔가… 으음… 일단 직접 보는 게 빠를 것 같군요.”

다크 카오스가 정말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팔을 휘저어 손짓했다.

잠시 후, 라라가 체어맨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나왔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게 다행히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아니, 너무 멀쩡해 보여서 오히려 문제였다. 그래… 정말 건강해 보였다.

“우리들의 위대하신 다크 카오스님!”

라라는 체어맨의 손을 뿌리치고 총총걸음으로 달려오더니 신재언의 앞에 납죽 엎드렸다.

그에 재언은 미쳐 버릴 것 같다는 표정을 가면 속에 숨기며 신음을 꾹 참았다. 식은땀이 뻘뻘 흘러서 등을 적셨다.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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