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521)

보통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의 앞엔 ‘주마등’이란 것이 스친다 하지 않던가. 여환은 핏물로 진득해진 눈꺼풀을 깜빡이며 멍하니 생각했다.

거대한 밀대로 전신을 짓누른 듯 산산이 조각난 뼈마디의 고통도, 혐오스럽게 꺾인 팔다리의 방향도, 숨결 대신 끄르륵 소리를 내며 역류하는 피거품도.

하늘을 가린 거대한 창의 존재감을 이기지는 못했다.

「잠시 후 당신의 영혼이 ‘스타팅 멤버 선택 구역’으로 이동합니다.」

「남은 시간: 54초」

죽기 직전에 본다는 것이 이따위 허무한 환상이라니. 내가 정말 게임 중독이긴 했구나.

때 늦은 자기혐오와 후회가 밀려오며, 여환의 의식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

「히어로 오브 나이츠(Hero Of Knights)」.

올해 상반기에 출시된 이 모바일 게임은 무려 ‘여성향 카드 수집 전략 게임’이라는 다채로운 정체성을 품고 있었다. 게임은 출시된 지 하루 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단숨에 매출 10위권에 오르는 등 대단한 파장을 일으켰는데, 여환이 게임을 시작한 계기도 그 후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여성향이라 로맨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전투가 진국이네.

• 카드 일러스트가 너무 예뻐요!

• 여친 하는 거 훔쳐보다가 재밌어 보여서 시작했는데 꿀잼이네요.

히어로 오브 나이츠, 줄여서 ‘히오나’는 지금껏 있던 여성향 게임과는 궤를 달리했다.

‘나만의 꽃미남 기사단을 꾸려 세계를 구한다.’

―라는 커다란 주제에 맞는 화려한 일러스트와 개별 호감 스토리가 구비된 것은 물론. 전투에 집중된 메인 스토리와 치밀한 전략 시스템, 깊게 파고들수록 복잡해지는 육성법 등. 전략 육성 게임에 환장하는 타 유저들까지 끌어들임으로써 성공적으로 몸집을 불려 갔다.

‘뭐야. 존나 재밌잖아.’

반쯤은 호기심으로 게임을 시작했던 여환이 ‘히오나’에 빠져들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과금도 아끼지 않으며 게임에 몰두했다. 날이 갈수록 가벼워지는 통장 잔고가 거슬리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삶의 즐거움을 위한 투자에 돈을 아끼고 싶진 않았다.

덕분에 그는 대부분의 기사를 수집할 수 있었고, 집착에 가까운 분석의 결과로 그가 카페 게시판에 작성한 밸런스 도표가 공지 글에 등록되기까지 했다. 그뿐인가? 여환은 돈, 시간, 노력을 아낌없이 바친 결과로 서버 랭킹 1위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 내기까지 했다.

즐거웠다. 정말이지, 폐인처럼 빠져 살았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여환은 막연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이 범람한 듯 온통 새하얗게 물든 공간. 바닥도, 천장도 존재하지 않으며 끝을 가늠할 수조차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무(無)의 공간. 여환은 그 공간의 어딘가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교통사고로 곤죽이 되었던 몸은 완벽하게 복구되었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이곳이 사후 세계는 아닐까. 만약 시야 오른쪽에 둥둥 떠다니는 시스템 창만 아니었다면, 여환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것이었다.

「스타팅 멤버를 선택하십시오.」

여환의 주변으로는 그를 원형으로 둘러싼 ‘카드’들이 늘어서 있었다.

침착하게 카드 한 장 한 장을 둘러보던 여환의 표정이 점점 미묘해졌다. 기어코 헛웃음을 내뱉은 그가 삐딱하게 고개를 세웠다.

“참 나. 장난해?”

카드에 그려진 그림은 전부 ‘히어로 오브 나이츠’에 등장하는 기사였다. 거의 빠짐없이 게임 속 기사들을 수집하고, 질리도록 써먹어 본 여환이었다. 그런 그가 일러스트 하나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게임 중독자의 죽음이란 이런 것일까?

당혹감과 황당함 사이에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망상이든 뭐든 일단 뭐라도 해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왕 고를 거면 역시 태생 S급 카드가 낫겠……. 뭐야?”

최근까지도 즐겨 썼던 S급 카드를 향해 다가가던 여환의 앞으로 투명한 장막 같은 것이 생성됐다. 신경질적으로 장막을 걷어차자,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스타팅 멤버 선택 기준은 최대 B급입니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 주든가!”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빈정이 상한 듯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린 그가 휙 뒤를 돌았다. 고를 수 있는 카드가 최대 B급이라면 당연히 B급을 골라야 했다.

“태생 B급이라…….”

여환은 어느샌가 진지하게 카드를 고르고 있었다. 그의 작은 머리통이 B급 기사 중 가장 최적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카드를 선별하기 위해 바삐 굴러갔다. 그 집요한 시선에는 게임 중독자의 광기 같은 것마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환의 시선이 한 장의 카드 위로 머물렀다.

“초반에 자주 썼던 놈이지.”

반 헤르도스.

탱킹과 딜링의 밸런스가 뛰어난 딜탱 포지션의 광전사. 등급에 한계가 있긴 하지만, 여환이 S급 기사들로 덱을 꾸리기 전까진 줄기차게 썼던 카드이기도 했다.

그가 ‘반 헤르도스’ 카드를 손에 쥐자, 다시 한번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스타팅 멤버 선택 완료.」

「지금부터 신여환 님의 ‘영혼 이동’ 시스템이 가동됩니다.」

「‘영혼 이동’ 완료 후, 시스템 안내가 시작됩니다. 부디 즐거운 여행 되시기를.」

영혼 이동?

생경한 단어 조합에 어리둥절함을 느낄 새도 없이. 새하얗던 공간이 순식간에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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