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진짜 히오나랑 똑같잖아. 어떻게 초반 장비까지 똑같을 수가 있지?’
새삼스럽게 놀란 카델이 입가를 문질렀다. 이쯤 되면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가 없다. 그는 확실히 게임 속 주인공에 빙의됐다.
‘트럭에 치여서 의식 불명이 됐더니 게임 캐릭터에 빙의했다……. 너무 전형적인 거 아니냐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흔한 전개라 오히려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멍하니 시스템 창을 훑고 있자 그 너머에 있던 반이 고개를 기울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침부터 기묘한 행동만 해 대던 단장이 이제는 희귀한 광물을 관찰하듯 집요한 시선을 보내오는 상황이다. 만약 하루아침에 정신이 나간 것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 곤란한 눈빛을 발견한 카델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사람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것은 실례였다. 그 사람이 넋을 잃을 정도의 미남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큼큼, 카델이 목을 가다듬었다. 반은 그런 자신의 단장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나저나 단장. 저희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떠나? 갑자기 왜?”
“숙박비를 낼 돈이 다 떨어졌잖아요. 하루만 더 묵게 해 달라고 부탁은 해 봤는데, 여관 주인이 돈 없으면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서…….”
반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꽃미남의 목소리로 듣는 구질구질한 재정 상태는 꽤 현실감이 떨어졌다.
‘아니, 시작부터 돈이 없어서 내쫓긴다고? 딱 봐도 허름해 보이는 방인데 이걸 빌릴 돈도 없어?’
황당함에 작게 입을 벌린 카델이 순간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까 초반 스토리가 이런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기도.’
그렇다면 자신은 「히어로 오브 나이츠」의 게임 스토리를 그대로 진행하게 되는 것일까. 스토리를 꼼꼼하게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뜻밖의 이득이었다.
“돈이야 벌면 되지. 일단 나가자.”
덤덤하게 대꾸한 카델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전에,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 했다.
빌스 마을.
스토리상 등장하는 첫 번째 마을이자 플레이어가 튜토리얼을 진행하게 되는 장소. 카델은 휴대폰 액정 너머로 보았던 풍경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마을을 둘러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두운 목조 주택과 층 낮은 건물, 거친 흙바닥과 길가마다 들어선 가판대, 좁은 길을 비집고 이동하는 마차까지. 그가 기억하는 한국의 현대 문물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중세의 모습이었다. 물론 히오나의 세계관은 여기저기서 끌어온 짬뽕 문화이니 찾아보면 어색한 점이 있긴 하겠지만.
뭐, 암만 그래도 판타지를 좋아하는 인물이라면 한 번쯤 이런 시대에 살아 보는 꿈을 꿔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막상 중세 배경의 게임 속으로 떨어져 보니, 환상은 살얼음보다도 쉽게 깨져 버렸다.
‘냄새 지독해! 도대체 이게 무슨 냄새야? 말똥인가?’
짐승에게서 풍기는 날것의 비린내 같기도 했고, 가판대 아래 썩은 과일에서 풍기는 곰팡내 같기도 했다. 카델은 당장이라도 코를 틀어막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단장, 저흰 이제 어디로 가나요?”
그 옆을 따르던 반이 순진하게 물었다. 반은 카델의 짐 가방까지 짊어진 상태였는데, 전부 본인이 고집한 일이었다. 짧은 실랑이 끝에 카델이 짐 가방을 넘겨주자 반은 선물이라도 받은 양 기뻐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주점.”
“이런 대낮부터요?”
“문은 열잖아?”
“그건 그렇죠.”
카델은 주점을 찾고 있었다. 「히어로 오브 나이츠」의 초반 스토리와 육성 퀘스트는 전부 주점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은 빌스 마을 속 정보의 장이자 일감 찾는 용병들의 주둔지였던 것이다. 그러니 스토리가 카델이 아는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 맞다면, 주점부터 찾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단장. 주점은 이쪽 방향이 아니지 않아요?”
“……그래?”
다행히도 충실하고 꼼꼼한 부하가 있었기에, 카델은 어렵지 않게 빌스 마을의 대표 주점, ‘한낮의 고래’를 찾아갈 수 있었다. 아직 이른 점심임에도 주점의 내부에는 듬성듬성 손님이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술 대신 스튜만 먹거나, 스튜에 술을 곁들여 마시며 식사에 한창이었다. 카델과 반도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뭐 먹을래?”
카델은 자연스럽게 반에게 물었다. 그는 이 주점에서 술 말고 무엇을 파는지 알지 못했기에 이런 식으로 메뉴를 유추해 보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반은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단장만 드세요.”
“용병이 속을 안 채우면 무슨 힘으로 싸워? 빨리 아무거나 말해 봐.”
“정말 괜찮아요, 단장.”
‘내가 괜찮지 않아!’
카델은 차오르는 외침을 씹어 삼키며 입가를 늘였다. 대충 테이블을 훑어보니 다들 스튜를 먹고는 있는데, 그 스튜의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점원은 저 멀찍이서 언제 주문하나 이쪽을 힐끗거리기만 하고.
결국 한숨을 내쉰 카델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난 술이나 한잔 마실래.”
“……빈속에요? 뭐라도 주문하시죠, 단장.”
“너도 안 먹는데 내가 뭘 먹겠어. 우리 용병단은 일심동체야. 한 명이 배고픈데 한 명은 배부를 수 없다고.”
그런 논리라면 술을 주문하는 대신 나가서 공복 유산소 운동이나 해야겠지만, 카델은 뻔뻔하게 굴었다. 그러자 반의 낯빛이 창백해지며 장난감 뺏긴 강아지처럼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보다 과민한 반응에 의아해하자, 한참을 망설이던 반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제 몫까지 주문하면 자금이 부족해질 거예요, 단장. 언제 다시 의뢰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단장의 돈주머니를 쥐어짜면서까지 허기를 채우고 싶지는 않아요.”
세상에. 상상도 못 한 처연한 대답에 카델의 말문이 막혔다. 물론 게임 초반에 자금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부하에게 밥 한 끼 제대로 못 사 먹이는 무능한 상관임을 절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전 안 먹어도 며칠은 거뜬하니까요. 신경 쓰지 말고 주문하세요.”
다정한 미소를 마주한 카델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결국 반과 카델은 스튜 하나를 주문해 사이좋게 나눠 먹기로 결정했다. 주인장의 떨떠름한 표정에 눈치가 보이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양고기 스튜’랍시고 주문한 음식이 놀라울 정도로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고기가 존재하기는 해? 감자도 한 알밖에 없고……. 맛도 완전 맹탕이잖아!’
이런 음식 하나 주문할 돈이 없어서 굶기를 선택한 반이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는 스튜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눈이 마주칠 때마다 카델에게 어서 먹으라고 웃어 주기나 했다.
그 호구 같은 모습에 별안간 승부욕이 치솟았다.
그는 게임을 플레이하며 언제나 자신의 기사들을 최고로 키워 냈다. 시즌이 지날 때마다 최강 장비를 끼워 줬고, 스킬 하나에도 공을 들여 투자했으며, 모든 능력치를 최대로 올려 주었다.
그런데 이런 구질구질함이라니.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랭킹 1위 유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역시 자금부터 모아야겠어. 이런 생활을 지속했다간 기사단이고 뭐고 나부터 병에 걸리겠다고.’
감자 한 알이 들어간 맹물 스튜를 퍼먹으며, 카델이 전투적으로 눈을 굴렸다.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퀘스트를 제공하는 NPC를 만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눈에 띄는 인물이 없었다. 다들 다 죽어 가는 몰골로 맛도 안 나는 스튜와 술을 퍼마시며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거나,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아직은 때가 아닌 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게임 속 캐릭터에 빙의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의 결이 달랐다. 이곳에는 이곳만의 삶과 흐름이 있을 테니, 어쩌면 너무 성급하게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실망감을 느낀 카델이 반쯤 비운 흐리멍텅한 스튜 그릇을 우울하게 내려다보던 바로 그때. 옆 테이블에 앉아 시시덕거리던 두 명의 사내가 돌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스트라 자작이 또 용병을 구하고 있다지? 저번에 구한 놈들도 변변찮았던 모양이야.”
“변변찮기는! 내가 알기론 까마귀 용병단에서도 사람을 보냈다던데. 이건 용병들 문제가 아니야, 그 땅이 저주받은 거지.”
“까마귀 용병단은 말단들만 보냈다던데?”
“그쪽 말단이 웬만한 놈들보다 나은 걸 몰라서 그리 말해?”
용병을 구한다고?
대부분의 스토리를 대충 넘겨 왔던 그이지만, ‘스트라 자작’이라는 인물의 이름은 귀에 익었다. 카델의 기억력이 눈앞의 스튜보다 비루한 것이 아니라면. 스트라 자작은 첫 번째 퀘스트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임이 분명했다. 대화를 엿듣는 카델의 귀가 쫑긋거렸다.
“어찌 됐든, 자네는 도전해 볼 생각 없는가? 의뢰비가 금화 5개나 된다고.”
“생각이 없나? 의뢰비가 왜 그렇게 비싸겠어? 목숨값이니까 그런 거지. 스트라 자작은 그 빌어먹을 욕심부터 버려야 해. 그런 쥐똥만 한 농지 하나까지 싹싹 긁어먹겠다고 사람을 사지로 보내는 게 말이나 돼? 날고 기는 용병들이 줄줄이 죽어 나간 걸 봤으면 그쯤 그만둬야지.”
“알겠네, 알겠어. 그냥 한번 물어본 건데 열 올리기는…….”
쩝, 입맛을 다신 사내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카델이 이어지는 둘의 대화를 통해 퀘스트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던 그때.
“스트라 가문의 영지를 밟고서 잘도 지껄이는군. 목숨이 여러 개인가 보지?”
별안간 주점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호위 기사 다섯을 대동한 젊은 청년이 막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꼿꼿하게 치켜든 턱과 오만한 표정, 푸른색의 화려한 비단옷과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보아 짐작건대, 어딘가의 귀족 자제인 듯싶었다.
“요새 본인들의 무능함을 근본 없는 괴담으로 꾸며 내 합리화하는 용병들이 있다더니. 진짜인 줄은 몰랐군. 용병 놈들은 최소한의 긍지라는 것도 없는 모양이야.”
한껏 빈정거린 남자가 카델의 옆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내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눈짓하자, 뒤편을 지키던 기사들이 일시에 검을 빼 들었다.
‘미친! 갑자기 칼은 왜 뽑아?’
뽑혀 나온 검날에서 소름 끼치는 금속 소리가 났다. 카델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저도 모르게 상체를 물렸다.
“스트라 가문의 땅을 밟고 있으면 언제든 스트라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지. 내 아버지를 모욕한 대가는 그리 만만하지 않아.”
“죄, 죄송합니다.”
“눈빛이 별로군. 팔 하나는 떨어져야 눈물의 속죄를 할 텐가?”
남자는 스트라 자작의 아들인 듯했다. 말투나 태도를 보아 성격은 개차반인 것 같았고. 기사들의 검 끝이 테이블에 앉은 두 사내를 향했다. 남자의 지시만 떨어진다면 언제든 휘두를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카델은 불난 집 구경하듯 흥미와 우려가 적절히 섞인 시선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한편 함께 이 난리를 지켜보고 있던 반이 조심스럽게 카델의 팔을 건드렸다. 곧장 반응한 카델이 눈만 굴려 그를 바라보자, 반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막을까요, 단장?”
“응……?”
“보아하니 드류 스트라인 것 같은데. 자작가의 둘째 공자는 짐승보다 쉽게 사람을 죽인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소중한 스튜에 피가 튀면 곤란하잖아요?”
카델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싸움을 막고 싶은 이유가, 어렵게 산 음식에 피가 튀어서 못 먹게 될까 봐. 그런 거냐?’
이걸 슬퍼해야 하는 건지 꾸짖어야 하는 건지. 복잡해진 심경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은 카델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나설 필욘 없어.”
카델의 말에 반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스튜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저흰 그저 떠도는 이야기만 듣고……. 저희 같은 놈들이 뭘 알겠습니까. 무지한 놈들이 입 가는 대로 지껄인 것이니, 공자께선 부디 자비를…….”
“하! 자비라. 그냥 못 들은 척 넘어가 달라는 소리냐? 미개한 녀석들이 바라는 것도 많지.”
남자는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듯 사내들을 훑어 내리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뭐…… 좋다. 정 그렇다면 기회를 주지. 똑같은 의뢰를 맡길 테니 너희가 말한 그 ‘저주받은 땅’으로 가라. 가서 그곳의 마물을 정리한다면 오늘의 모욕은 없던 일로 해 주마.”
“예? 그, 그런……!”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싫다면 이곳에서 바로 죗값을 치르면 되겠군.”
사내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무얼 선택해도 죽음은 확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카델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은밀하게 잰걸음으로 이동한 그가 드류와 사내들 사이로 슬쩍 몸을 끼워 넣었다.
“넌 뭐지?”
난데없는 등장에 남자가 미간을 모았다. 기사들 또한 위협적인 시선을 보내왔으나, 그 경계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전 카델 라이토스라고 합니다.”
“……라이토스? 묘하게 익숙한데.”
“다름이 아니라, 혹시 저희 용병단도 그 의뢰에 참여할 수 있을까 해서요.”
카델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 스트라 자작이 첫 퀘스트의 주요 인물이라면, 이 의뢰야말로 그가 얻어 내야 할 첫 번째 퀘스트임이 틀림없었다. 저주받은 땅이라니. 키워드만 들어도 메인 스토리의 냄새가 풀풀 풍기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