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돌파구가 보이자 놀라울 정도로 의욕이 샘솟았다. 이제는 헤드 피쳐의 몰골도 꽤 눈에 익었다.
시간이 갈수록 화살 비는 약해졌으나, 남아 있는 마물의 수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카델은 슬슬 몸을 일으켰다. 놈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해치우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카델은 자신이 세운 간단한 작전을 전달하기 위해 론과 바빌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입을 여는 것보다 피범벅이 된 바빌의 어깨를 발견하는 것이 더 빨랐다.
기술을 준비하는 동안 외부의 모든 감각을 차단했기에 비명조차 듣지 못했던 카델이었다. 그는 소름 끼치는 상처를 응시하며 미간을 구겼다.
“언제 생긴 상첩니까? 빨리 지혈하지 않으면 더 싸우기도 전에 쓰러질 텐데요. 상처를 묶을 만한 천이나 붕대는 없어요?”
“뭐? 이게 언제 생긴 상처냐니!”
장막 하나 없이 카델의 길고 긴 마법 전개를 버티느라 생긴 상처였다. 애초에 장막만 남겨 뒀어도 이렇게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카델의 마법 덕분에 전세가 역전됐다는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극악한 고통은 기어코 원망할 구석을 찾아냈다. 바빌이 막 사납게 대꾸하려던 차, 본능적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카델의 뒤에는 흉흉하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반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마치 ‘감히 단장에게 목소리를 높인다면 나머지 어깨도 작살을 내 주겠다’는 듯 살기를 뿜어 대고 있었다. 원망도 집어삼킬 생존 본능은 바빌에게 유하게 굴 것을 강요했다.
“……없소. 지금 흉갑을 벗는 건 자살행위고, 마물 소굴 한가운데서 짐 가방을 뜯을 수도 없으니.”
“이런. 상황이 급하긴 하지만 일단 지혈부터 하죠. 이런 몸으로는 남은 마물을 정리하는 것도 어려울 테니. 기다려 봐요.”
잠시 양해를 구한 카델이 허리를 숙여 입고 있던 로브 밑단을 움켜쥐었다. 그는 육탄전을 벌일 일이 거의 없는 마법사이기에 갑옷 대신 긴 로브를 입고 있었다. 밑단을 조금 뜯는다 해서 목숨에 지장은 없으리라.
하지만 카델이 밑단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기도 전. 반이 그의 팔을 가볍게 밀어 내며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단장. 저한테 있거든요.”
“……그건 네 대검에 감는 천 아니냐?”
“단장이 입는 옷보다 귀하진 않죠.”
카델을 향해 싱긋 웃어 준 반은 기다란 청색 천을 챙겨 바빌에게로 다가갔다. 카델을 마주할 때와는 딴판으로 얼굴에서 한기가 돌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바빌을 거칠게 붙잡아 세우고는, 그의 움푹 팬 어깨에 천을 칭칭 휘감았다. 어찌나 악세고 요령 없이 감는지 바빌은 금방이라도 비명을 내지를 듯 입을 크게 벌렸으나, 이어지는 반의 말에 입 안으로 주먹을 밀어 넣는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더 단장의 주의를 끌어 보시죠. 있는 듯 없는 듯 구는 게…… 아예 없어지는 것보단 낫다는 걸 알려 드릴 테니.”
마력이 다하여도 이미 번진 불씨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카델 일행은 반을 선두로 혼란에 빠진 헤드 피쳐들을 차근차근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긴 전투 속에서도 위력이 줄지 않은 반의 검기가 매서운 기세로 전방을 내리찍고, 카델의 [화염구]가 멀리서 다가오는 헤드 피쳐의 머리통을 저격했으며, 론과 바빌은 한두 마리씩 새어 나오는 마물을 즉각 베어 넘겼다.
반의 검기는 마물을 죽이는 것뿐 아니라 짙은 안개까지 흩뜨렸다. 덕분에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시야가 개운해졌다.
‘이 기세라면 날이 넘어가기 전까지 전부 소탕할 수 있겠어.’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한 카델이 그리 생각했다. 예상보다 순조롭게 풀리는 전투에 짙은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그래. 내가 너무 겁먹었던 거야. 게임에서도 첫 번째 퀘스트로 깨지 못할 시련을 주지는 않는다고. 보통 튜토리얼은 발로 해도 클리어하잖아? 이거라고 다를 건 없는 거지.’
‘반 헤르도스를 잃는다’는 시스템의 경고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긴장했던 것이다. 물론 처음 보는 마물의 용모에 기가 질리긴 했지만…… 뭐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는 법이 아니던가. 지금도 여전히 헤드 피쳐의 머리통은 소름 끼쳤으나,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올 정도의 공포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카델은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헤드 피쳐를 향해 불덩이를 날리며 남은 마력을 가늠했다. [화염 장막]을 만들고, [화마의 화살]을 준비하고, 틈틈이 [화염구]를 사용했다. 현재 그의 몸속에 남은 마력은 처음의 1/10도 되지 않았다.
‘마물은 얼추 정리한 것 같으니 이젠 정말 힘을 아껴야겠어. 마력이 빠져나가면서 기력까지 약해지는 기분이니.’
마물을 정리하며 천천히 스모그 평원을 가로지른 그들은 어느새 반대쪽 울타리까지 도착해 있었다. 가장 먼저 울타리로 달려간 론이 다급하게 그 위를 더듬거렸다. 한참을 들러붙어 온몸을 비비적거리던 그가 이내 낭패라는 듯 외쳤다.
“제기랄, 이쪽은 출구가 없잖아? 드디어 탈출하나 했더니! 구멍…구멍을 팔까?”
“아직 남은 마물이 있을 겁니다. 확실히 처리하기 전까진 나가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요.”
카델의 말에 론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 목숨 부지에 기뻐하고 싶었으나, 그 또한 용병이었다. 코앞에 금화가 놓여 있는데 허술한 마무리로 고생 값을 못 받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욕심은 부상을 입은 바빌 또한 마찬가지인지, 그가 쭈뼛거리는 론에게로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봐, 어차피 마물도 대부분 처리했으니 우린 얌전히 저 둘의 꽁무니나 쫓아다니자고. 솔직히 지금껏 저들이 다 하지 않았는가. 나중에 공을 나누기 싫다며 우리를 팽개칠지도 모르니, 저리 말할 때 조금만 더 버텨 보세.”
잠시 머뭇거리던 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은 처음 들어왔던 입구로 되돌아가며 남은 마물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카델은 지척에 널린 마물의 시체를 밟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나아갔다. 까맣게 타들어 간 머리통이 금방이라도 활기를 찾고 달려들 것만 같아 주기적으로 몸을 움찔하게 됐다.
그리고 그런 카델의 옆에서, 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단장.”
“엉……? 뭐가?”
“제 무능 때문에 단장이 필요 이상으로 힘을 쓰셨잖아요. 다른 마물이었다면 전부 저 혼자서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피만 있었더라면’ 하고 중얼거리는 꼴이 당장 산 사람이라도 족쳐 검에 피를 묻혀 올 기세다. 카델은 자신의 기사가 그런 끔찍한 사고를 저지르기 전에 다급히 말을 끊었다.
“약한 소리 하지 마. 넌 불리한 싸움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기죽을 시간에 확실하게 돈 챙길 궁리나 해.”
“단장…….”
대충 알아듣고 음험한 표정은 그만둬 줬으면 좋겠는데. 카델은 은근한 불안감을 느끼며 슬쩍 반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는 반의 모습이 보였다.
‘……왜 저래?’
의아한 기분을 품기가 무섭게, 그의 눈앞으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기사 ‘반 헤르도스’의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73/100」
“응?”
“네?”
“아…아무것도 아냐.”
갑자기 호감도가 올랐다고? 내가 뭘 했는데?
카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감을 올릴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는데 갑자기 반 혼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대체 뭐야? 왜 마음대로 3이나 올라? 이러다 갑자기 호감도를 꽉 채우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물론 낮은 것보다야 높은 편이 충성도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겠지만…… 이것은 여성향 게임이었다.
호감도를 꽉 채우면 특별한 이벤트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했으나, 직접 찾아본 적은 없다. 그야, 그는 스토리보다는 전투에 흥미를 느끼는 평범한 남성 유저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또다시 한창 싸울 때도 나지 않던 식은땀이 흘렀다. 이 불안한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말을 아끼자.’
한편, 둘을 뒤따르던 론과 바빌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런데 바빌. 생각했던 것보다 마물 소탕이 빨리 끝난 것 같지 않나? 물론 저 둘이 어마어마한 실력자이긴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끝날 것을 그 많은 용병이 죽어 나갈 동안 해결하지 못했다니. 믿기지가 않네.”
“흥, 아무리 날고 기는 용병이래도 잘난 마법사 하나를 이기기는 힘들지. 자네도 봤지 않은가? 그 엄청난 광역 마법을 말일세. 용병들은 기껏해야 검을 휘두르는 게 전부이니 효율이 떨어지지. 괜히 마법사가 귀한 게 아니라고.”
“아무리 그래도…….”
“게다가 저치는 전술도 만만치 않아.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우리가 패닉에 빠졌을 때 마법사는 순식간에 판단을 내렸어.”
“……그런가.”
“적린 용병단이라고 했나.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 날리는 건 시간문제겠어.”
반의 성격이 흉악한 것과는 별개로, 바빌은 그들에게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이 합류하지 않았다면 자신과 론의 미래가 어땠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렇게 각자 다양한 생각과 목적을 품으며 남은 마물을 정리하기를 한참.
카델은 지친 기색을 숨기기 위해 무표정한 얼굴을 꾸며 내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스모그 평원에 주둔해 있던 마물은 전부 처리한 것 같습니다.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서라면 다음 날까지 이곳에 머무르는 게 맞겠지만, 의뢰 확인을 위한 방문까지 저희가 할 필요는 없죠. 이만 돌아갑시다.”
“드디어!”
론과 바빌의 안색이 놀라울 정도로 환하게 피어났다. 그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옥 같던 소탕 작전이 끝났음을 마음껏 기뻐했다. 카델 또한 큰 고비를 넘긴 것에 기뻐했으나. 환호하기에는 몸의 체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으므로, 잔잔한 미소만 지었다.
‘빙의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하루 온종일 중노동이야. 빨리 기사를 모아서 꿀을 빨든가 해야지.’
적어도 두셋 정도가 모인다면 자신이 할 일은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대충 지휘만 해 주면 알아서 뚝딱뚝딱 싸워 오겠지.
피로에 찌든 눈가를 설설 문지르자, 그의 상태를 알아챈 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단장, 괜찮으세요? 많이 피곤해 보여요.”
“별로.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당장 복귀해서 공자에게 의뢰비부터 받죠. 좋은 숙소를 잡아야 푹 쉴 수 있을 테니까요.”
“아직 새벽이야. 돌아가도 해가 뜰까 말까일 텐데, 문전박대밖에 더 당하겠어?”
“하지만…….”
카델은 집요하게 구는 반을 향해 설렁설렁 손을 내저었다.
“하루 피곤하다고 죽진 않아.”
“……알겠어요. 하지만 너무 힘들면 말씀하세요, 단장. 제가 업어 드릴 테니까요!”
죽었다 깨어나도 업힐 일은 없을 것이다. 작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 카델이 그리 장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