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521)

그는 출구를 찾아 바삐 이동하는 론과 바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우선은 역시 반의 성장이야. 저 낡은 대검도 새걸로 바꿔 줘야 할 테고, 방어구도 좋은 걸 맞춰 줘야지. 밥도 든든히 먹여야겠고. ……흠. 아무래도 의뢰를 더 받아야겠는데.’

반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를 뒷받침해 줄 많은 자원이 필요했다. 자신의 성장은 그다음으로 미뤄도 괜찮다.

‘다음 메인 퀘스트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생겼던 것 같은데……. 그 전까지 자잘한 서브 퀘스트를 받아서 반의 능력치를 최대로 올려 줘야겠다. 그 후에는…… 응?’

꼼꼼하게 미래 계획을 구상해 나가던 카델이 멈칫하며 미간을 좁혔

다. 그는 여전히 론과 바빌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으나, 그가 집중한 곳은 그들이 아닌 그 아래의 땅이었다.

땅이 이상했다.

안개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상태임에도 그들이 밟은 땅의 주변이 끓는 물처럼 부글거리고 있는 모습이 선명했다. 돌과 모래가 진동을 이기지 못해 정신 사납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잠깐! 거기 멈추세요!”

무언가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챈 카델이 급히 론과 바빌을 불러 세웠다. 그러나 외침에 반응한 그들이 뒤를 돌기도 전.

“무, 무슨…….”

“우아악!”

땅 아래를 맴돌던 진동 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치솟았다.

납작하고 얇은 그림자가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구부러지며 론과 바빌의 다리를 휘감아 포박했다. 놀란 카델이 곧장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 했으나.

“단장!”

반의 경악한 목소리와 함께, 정체불명의 힘이 그의 움직임마저 봉쇄했다.

지저분한 잿빛 붕대. 카델이 파악한 그림자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무슨 힘이 이렇게……!”

붕대는 그의 발목을 휘감고 우악스러운 기세로 바닥을 향해 끌어당겼다. 분명 딱딱했던 흙바닥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진흙처럼 물렁해져 금방이라도 몸이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반은 카델이 휘청이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대검이 붕대를 베어 내자 겨우 버티고 있던 몸의 중심이 기울고. 곧장 달려온 반이 재빠르게 카델의 허리를 감싸 부축했다.

“단장! 괜찮으세요? 다친 데는―”

“나, 난 괜찮으니까 저쪽부터 봐줘.”

후들거리는 손으로 반을 밀어 내자 창백해진 얼굴이 머뭇거리며 멀어졌다.

“하지만 언제 다시 그게 튀어나올지…….”

“빨리.”

단호한 대답에 울상이 된 반이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돌렸다.

론과 바빌은 붕대에 잡히자마자 발악하며 팔다리를 휘둘러 댔기에 이미 상당 부분이 잠긴 상태였다. 그들의 다리를 감싼 붕대는 땅에 박혀 보이지도 않았다. 반을 발견한 그들이 구세주를 만난 듯 다급히 두 팔을 뻗었으나. 반은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들의 앞에 대검의 칼날을 들이밀었다.

“잡고 올라와.”

손잡이도 아니고 날을 잡으라고?

황당함에 눈이 절로 부릅떠졌으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론과 바빌은 각각 대검의 한쪽 날을 꾹 쥐었다. 반은 대검에 무게감이 더해진 것을 확인하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끌어 올렸다.

“흐읍!”

흉갑에 가려진 팔뚝이 부풀며 알감자처럼 땅속에 처박혀 있던 그들의 몸이 조금씩 뽑혀 나왔다. 안간힘을 다해 검날을 붙든 둘의 손바닥 위로 피가 새어 나왔다. 검붉은 피는 날을 타고 흐르는 대신, 닿는 즉시 흔적도 없이 흡수되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은 반뿐이었다.

‘이 마물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단장은 무리해서라도 제압하려 할 거야. 혼자 해결하게 둘 순 없다. 어떤 식으로든 검에 피를 먹여야 해. 이놈들의 팔다리 한쪽을 잘라서라도…….’

단장에게 힘을 보탤 수만 있다면 생판 남의 사지 정도야 무시하고 잘라 낼 수 있다.

그런 그의 잔인한 계획을 알 리 없는 론과 바빌. 둘은 몸이 온전히 빠져나옴과 동시에 바닥에 납죽 엎드려 전방으로 기어갔다. 볼품없으리라는 자각도, 벌어지는 손바닥의 상처도. 다급한 생존 본능을 이기지는 못했다. 반은 아직도 그들의 발목에 남아 있는 붕대를 단숨에 끊어 내며 말했다.

“더 이상의 도움은 없다. 살고 싶다면 본인 목숨은 알아서 챙겨.”

만약 그들이 조금만 더 떨어진 곳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순순히 보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팔다리는 몰라도 모르는 척 상처를 입혀 볼 순 있었겠지.

하지만 뒤편에는 아직 카델이 있다. 그가 보는 앞에서 론과 바빌을 해친다면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보는 수밖에.

반은 필사적으로 멀어져 가는 둘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자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카델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단장, 마물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나요?”

“음, 아무래도 ‘미라 퀸(Mirra Queen)’인 것 같아. 지금껏 스모그 평원을 찾았던 용병들이 줄줄이 죽어 갔던 것도 이놈 때문이겠지.”

“미라 퀸이라……. 용병들이 좋은 먹잇감이 돼 줬겠는데요.”

“그러니 저렇게 쑥쑥 자란 거겠지.”

카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평원의 중심부. 그곳에는 하나의 거대한 꽃봉오리처럼 솟아오른 붕대 덩어리가 있었다.

저것이 바로 미라 퀸의 본체였다. 저것을 중심으로 뿌리처럼 퍼진 붕대들이 땅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며 먹잇감을 포착. 그대로 끌어들여 양분으로 소화시키는 것이다.

‘젠장, 이런 놈이 숨어 있는 줄 알았으면 마력을 좀 더 아껴 두는 건데. 어쩐지 퀘스트 완료 창이 안 보인다 했어. 드류 스트라에게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최종 보스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나.’

마물의 기술이나 특성 같은 것은 생생히 기억나지만, 이런 놈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까지는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튜토리얼에서 짧게 나오고 말았던 놈이라면 더더욱.

버릇처럼 입술을 깨문 카델이 철천지원수라도 되듯 미라 퀸을 노려보았다.

‘저놈을 해치워야 퀘스트가 완료된다. 저놈만 해치우면……!’

죽음에서 간신히 벗어나자마자 또 다른 죽음을 직면한 이 거지 같은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미라 퀸의 약점은 저 거대한 봉오리다. 하지만 근접할수록 봉오리를 지키는 힘도 강해지지. 최선의 공략법은 원거리 공격을 통한 저격이야.”

“또 마법을 쓰려는 겁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면 말해 봐.”

미라 퀸 제거에 근접 딜러만큼 최악의 효율을 자랑하는 포지션은 없다. 봉오리로 향하는 동안 맞닥뜨릴 수많은 장애물은 물론이고, 무기를 빼앗길 확률도 높았다.

오버 스펙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으나 현재의 반은 각성도 하지 못했고, 장비도 전부 낡은 데다,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도 없는 상황. 지금 반을 봉오리로 보내는 것은 죽으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그의 합리적 분석을 알 리 없는 반이 굳은 표정으로 카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안 돼.”

“검기를 사용한다면 먼 거리에서도 공격이 가능해요. 게다가 단장은 이미 많은 마력을 사용하셨잖아요.”

“지금 내 실력을 의심하는 거냐?”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면 잔말 말고 엄호나 해.”

한 번의 기회를 안 주는 카델이 야속한 듯, 반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카델 또한 단호했다. 그로서는 한 명밖에 없는 소중한 기사를 가벼운 장기 말처럼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먼저 포기한 쪽은 반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투 전에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죠.”

“말해 봐.”

“만약 단장의 첫 공격으로 미라 퀸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땐 정말 제가 나서겠습니다.”

“뭐?”

“설마 그것도 안 된다는―”

“그땐 당연히 네가 나서야지. 마력도 없는 내가 또 나서리?”

어이없다는 듯 카델이 콧방귀를 뀌자 반은 잠시 말을 잃은 채 벙쪘다. 이토록 순순한 허락은 전혀 예상 못 한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충직한 개처럼 믿음직스럽게 눈을 빛낸 그가 마법을 준비하는 카델의 곁을 지키고 섰다.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어. 짜낼 수 있는 공격은 한 방 정도……. 이 한 방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

원거리 단일 공격이라면 [화염구]가 가장 적합했다. 모든 마력을 쏟아부은 [화염구]를 명중시켜야 한다.

카델이 깊게 숨을 골랐다. 고지가 코앞이라는 생각에 짙게 깔렸던 피로감마저 가시는 듯했다.

그가 정신을 집중하자 전방으로 주먹만 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불꽃은 빠르게 몸집을 불렸고, 순식간에 처음의 스무 배는 되는 크기로 부풀었다.

후우웅―

[화염구]를 중심으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넘실거렸다. 이마에서부터 턱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땀.

카델은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회는 단 한 번.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미라 퀸의 봉오리를 향하고.

짧게 숨을 들이켠 그가 망설임 없이 [화염구]를 발사했다.

‘제발……!’

공격은 적중했다. 거대한 불덩이는 맹렬한 기세로 봉오리를 향해 날아들었고, 이내 큰 폭음과 진동을 동반한 폭발이 일어났다.

쿠구구구―

불꽃에 휩싸인 봉오리가 벌어졌다 오므라지기를 반복하며 몸부림쳤다. 그와 함께 땅속에 묻힌 뿌리들 또한 일제히 용솟음쳤다.

“단장, 피해야 합니다!”

온 땅이 끓는 물처럼 부글거리며 진동했다. 반은 기력이 다 빠진 카델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외곽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걸음을 따라 미라 퀸의 뿌리가 날카로운 창처럼 뾰족하게 솟아올랐다.

카델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뜀박질을 하며 반의 팔에 매달렸다. 반은 한 손으로는 카델을 부축하고, 한 손으로는 검기를 흩뿌리며 뻗쳐 오는 공격들을 차단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공격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죽이지 못한 건가?’

서둘러 봉오리 쪽을 확인했으나 짙은 연기와 안개가 주변을 가려 정확한 판단이 불가했다. 카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즉사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뿌리가 움직일 리 없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공격은 적중했으나, 미라 퀸은 아직 건재한 것이다!

“안전한 곳을 찾기엔 사방이 쑥대밭이군요.”

“이 상태로는 더 싸우지도 못해. 젠장, 내 공격이 저놈을 자극하기만 한 거야!”

절로 이가 갈렸다. 처음부터 미라 퀸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더 효율적으로 마력을 배분했을 텐데. 헤드 피쳐가 전부인 줄 알고 마력을 남용한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반은 카델의 분노에 동조하는 대신, 침착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외곽을 돌아서 출구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어요. 봉우리가 있는 쪽을 가로지르겠습니다.”

“미쳤어? 저 자식은 지금 흥분한 상태라고. 멀더라도 최대한 비껴가는 게…….”

“이 속도로 공격을 계속 피하는 덴 한계가 있어요. 그리고 약속하셨잖아요, 단장. 이번 공격이 실패하면, 그땐 제가 나서기로.”

덤덤한 옆모습을 보자 일순 소름이 끼쳤다.

‘설마 이거, 사망 플래그야?’

퀘스트에 실패하면 반을 잃게 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인가? 단장인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뿐인 기사를 제대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에. 반이 나를 대신해 직접 사지로 뛰어든다고?

경악한 카델이 그를 만류하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반은 그런 카델을 단숨에 안아 들고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미라 퀸의 봉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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