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521)

줄줄이 떠오른 시스템 창을 전부 읽을 여유 따윈 없었다.

“클리어했다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 가지였다. 카델은 다급하게 봉우리가 있던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반! 반!”

안개와 오라가 뒤섞여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몇 번이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으나 속력을 늦출 여유 또한 없었다.

이윽고, 그는 처참한 잔해의 중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한 카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한달음에 달려간 카델이 반의 어깨를 억세게 붙들었다. 그는 피로 샤워라도 한 듯 온몸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입고 있던 흉갑은 어디다 갖다 버린 것인지 보이지도 않았고, 훤히 드러난 팔다리는 생채기가 가득해 제대로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반은 자신을 잡고 흔드는 카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감돌던 붉은 기운이 서서히 흐려지며 본래의 황금색이 조금씩 드러났다.

“네 몸에 상처를 내서 피를 얻은 거냐? 미친 거야? 응? 죽으려고 환장했어!”

“단장…….”

“부르지 마, 이 미친놈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카델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댔다. 하지만 반은 굴하지 않았으며, 되레 피 칠갑이 된 살벌한 얼굴로 미소까지 지었다. 뭘 잘했다고 웃느냐며 타박을 주려는데.

문득, 반의 눈빛이 탁해지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반……?”

어깨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반의 입술이 닿은 목덜미로 희미한 숨결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아슬아슬한 호흡. 그제야 카델은 반의 상태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좋지 못함을 깨달았다.

‘혈류검은 원래 대량의 마물을 토벌하면서 자연스럽게 발동되는 기술이야. 그걸 무식하게 자기 피로 채웠으니……. 최악이다. 자칫하면 이대로 황천길까지 가 버리겠어!’

마음이 급해진 카델이 거대한 바위처럼 무겁게 늘어진 반을 둘러업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론과 바빌을 향해 외쳤다.

“포션 같은 거 없습니까? 치유 포션이요! 포션이라고 하는 게 맞나? 어쨌든, 당장 피를 멈출 만한 지혈제가 있습니까?”

“어어…… 물약 하나가 있기는 한데…….”

론이 더듬거리며 답하자 무서운 기세로 다가간 카델이 그의 짐 가방을 힘껏 끌어당겼다.

“내놓으세요!”

“어어? 자, 잠깐…….”

“그리고 당신! 당신은 마을에서 당장 말을 얻어 오세요. 최대한 빨리!”

지목당한 바빌은 ‘왜 내가 당신 명령을 들어야 하냐’라며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몇 번이고 목숨을 빚진 입장이었다. 이런 부탁까지 거절할 만큼 염치없지는 않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바빌이 서둘러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동안 카델은 론에게서 받은 물약을 반의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그를 눕히기 위해 펼친 로브가 얼마 가지 않아 핏물에 흠뻑 젖었다.

“마을에 치유사가 있습니까?”

그런 반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카델이 물었다. 론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머뭇머뭇 고개를 저었다.

“빌스 마을처럼 작은 마을엔 대부분 치유사가 없소. 가끔 우연찮게 방문하는 치유사를 찾아가는 게 전부지. 한 명 있는 약사도 최근엔 몸이 안 좋아져서 영업하지 않고…….”

“한 명도 없다는 겁니까?”

“……아예 없지는 않지.”

카델이 제대로 대답하라는 듯 눈을 치떴다. 그러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던 론이 한숨 섞인 목소리를 냈다.

“스트라 자작가에 속한 치유사가 있기는 하네. 물론 그 사람에게 치료를 받으려면 자작의 허락이 필요하고.”

하지만 일개 용병을 치료하는 데 귀한 인력을 내어 주진 않을 것이다. 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카델은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어색하게 눈을 내리깔자, 노르스름한 찻물에 비친 너저분한 얼굴이 보였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물결. 최대한 음미하듯 느리게 한 모금을 머금은 그가, 역시나 천천히 찻잔을 내려 두었다.

“……영광입니다. 치유사를 내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데, 귀한 차까지 대접해 주시다니. 스트라 자작님께서는 참으로 자비로운 분이시군요.”

그의 맞은편에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은 스트라 자작이 있었다. 한 가닥도 남김없이 넘겨 올린 희끗한 머리칼과 여우처럼 얇게 올라간 눈매, 일말의 자비도 찾아볼 수 없는 삐뚜름한 입매.

샅샅이 뒤져 보아도 인자한 분위기는 없다. 하지만 카델은 그를 ‘자비로운 스트라 자작’이라며 추켜세웠다. 그야, 아직도 이 저택 어딘가에서 반은 자작의 인간에게 치료를 받고 있을 테니까. 심기를 거슬러 봐야 좋을 건 없었다.

‘그나저나…… 내 협박이 통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쉽게 치유사를 만나게 됐어.’

카델이 조심스럽게 입맛을 다셨다.

그는 바빌이 데려온 말을 타고―승마를 익히지 못해 반을 론에게 맡기고, 자신 또한 바빌에게 얻어 탔다― 단숨에 자작가를 찾았다. 대신 나온 경비병에게 대항하며 ‘스모그 평원을 되찾고 싶다면 당장 뛰쳐나와라!’라는 내용의 협박을 고래고래 내질렀고. 얼마 안 가 자작의 아들인 드류가 내려오기에 그에게 급한 사정을 설명했다.

당연히 실랑이가 오갈 것이라 예상했건만, 드류는 의외로 순순히 반을 치유사에게 보내 주었다. 게다가 자신을 응접실로 안내해 주기까지 했다.

만약 이곳에서 대면할 사람이 스트라 자작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힘들더라도 밖에 나가 있었겠지만.

‘귀족은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야?’

그는 신분제 없는 세계에서 살다 왔다. 물론 그곳에서도 안 보이는 격차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태생적인 위아래가 분명하진 않았다. 그 때문에 카델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스트라 자작 또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있는 응접실은 한동안 지독한 침묵에 휩싸여야만 했다.

다행히도, 자작은 카델이 침묵에 질식하기 직전에 친히 입을 열어 주었다.

“카델 라이토스. 자네의 이름이 맞는가?”

“네. 맞습니다.”

카델의 대답에 자작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보기 싫은 표정이었다.

‘왜 저딴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내 이름이 뭐 어때서.’

카델은 그의 반질반질한 얼굴을 힐끔거리며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자작은, 곧 그가 완전히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툭 던지듯 상기시켜 주었다.

“오스마 제국의 몰락 귀족을 마이뉴 왕국에서 보게 되다니. 신기한 일이지 않나. 라이토스라는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고 다니는 것조차…… 꽤나 흥미롭지.”

오스마 제국의 몰락 귀족!

그것은 그가 조금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던 카델 라이토스의 출신이었다. 카델은 전혀 예상 못 한 이야기에 멍하니 자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작은 그런 카델의 표정을 오해한 듯 그를 대놓고 비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모를 줄 알았는가? 한때는 전도유망한 마법 명가가 아니었나. 황족 암살 시도라는 대역죄를 저질러 멸문당했다고 들었는데, 그 핏줄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아니, 반쪽짜리 핏줄이라고 해야 하나.”

“…….”

스트라 자작의 비꼼은 카델에게 일말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남의 얘기를 듣는 기분이었고, 실제로도 남의 얘기였다.

‘맞네. 카델 라이토스는 몰락가의 서자였지. 몰락가면 몰락가고 서자면 서잔 거지. 하필 몰락가의 서자라서 뭣도 아닌 떨거지만 됐어.’

게임 속 카델 라이토스는 서자임에도 가문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가문을 원래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이 그의 두 번째 목표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현재 카델에게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스토리의 끝을 보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자네 꼴을 보라지. 용병……. 기사도 아닌 용병!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남의 땅까지 도망쳐와 한다는 것이 고작 용병 짓이라…….”

자작이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동공이 작아 음험한 분위기를 띠는 시선이 대놓고 그를 깔보고 있었다. 하지만 카델은 기분 상한 기색 하나 없이 얌전히 대꾸했다.

“먹고사는 데에 자존심은 필요치 않습니다. 저는 제 살길을 찾은 것뿐이지요.”

“라이토스가의 마법은 유명했지. 서자인 자네의 실력도 소문만큼 뛰어난지 궁금하군.”

“스모그 평원을 확인해 보시죠.”

카델이 태연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그러자 자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를 의심하는 듯도 했고, 재미있어하는 듯도 했다.

“정말 고작 네 명의 인원으로 평원을 정리했단 말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둘입니다. 나머지 둘은 그다지 쓸모도 없었으니.”

“……확실한가?”

“마물 토벌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확실합니다. 제 유능한 부하가 저 지경이 되었으니, 확실하지 않으면 체면이 살지 않죠.”

자작은 네깟 것이 체면이 어디 있냐는 듯 빈정거리는 태도였으나, 굳이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거만하게 턱 끝을 치켜들었다.

“지금은 이미 날이 밝았으니. 오늘 밤 내 병사들을 보내 확인해 보겠다.”

“의뢰비는 다음 날에나 받을 수 있겠군요.”

“그뿐만 아니지.”

“……?”

“만약 스모그 평원의 탈환을 성공했다면, 카델 라이토스. 자네는 내 사람이 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테니.”

카델은 잠시 말문이 막혀 눈을 깜빡였다.

내 사람이 될 기회라니. 그가 제안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지만, 문제는 이 게임의 성향이었다. 혹시라도 이 늙은이가 핑크빛 플래그를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 공포에 질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다행스럽게도, 자작은 그런 류의 파렴치한이 아니었다.

“마법사는 귀하지. 제대로 된 마법사는 더 귀하고, 혈통 있는 마법사는 더더욱 귀하다. 자네가 오스마 제국 몰락가의 서자라 할지라도, 그 가치는 쉬이 떨어지지 않아. 비록 자네는 스스로의 가치를 갉아먹고 있지만 말일세.”

“그 말씀은…….”

“격 떨어지는 용병 일을 그만둘 수 있게 도와주겠네. 숙식은 해결될 테고, 봉급도 받을 테니 지금까지의 걱정은 없던 일이 될 거야.”

스트라 자작의 관점에서, 이것은 거절할 이유가 하등 없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오히려 카델 쪽에서 먼저 납작 엎드려 충성을 보여야 했다. 도망자 신분의 마법사를 친히 세탁시켜 곁에 두겠다는데.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카델은 수락하게 되어 있다.

그리 판단하는 자작을 보며, 카델은 가만히 생각했다.

‘반의 치료는 끝났나?’

자작가 소속의 마법사라니. 개뿔이었다.

들어가 봤자 서출의 마법사라고 괴롭힘이나 당할 게 뻔했고, 성격 더러운 드류와 시도 때도 없이 마주쳐야 하는 데다, 결정적으로 카델의 미래에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탈출. 트럭에 치여 어떤 상태로 있는지도 모를 자신의 육체로 한시바삐 돌아가는 것이었다. 첨단 문물 하나 없는 세상 속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작의 도움으로 반이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섣불리 거절해 심기를 건드렸다간, 치료를 받다 말고 내쫓길 수도 있었다. 카델은 최대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기회를 잡고 싶습니다만…….”

“설마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저에겐 부하가 있습니다. 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충성심이 좋은 녀석이죠.”

“다 죽어 가던 그놈을 말하는 건가.”

카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님의 제안을 수락하기 전, 그 친구를 설득하고 싶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용병단을 나간다면 녀석이 느낄 배신감이 클 테니까요.”

“꽤 쓸 만해 보이는 몸이었는데. 그놈도 귀족 출신인가?”

“아뇨. 평민입니다.”

“흠, 아쉽게 됐군.”

몰락 귀족은 들여보내 주면서 뛰어난 평민 검사는 안 된다는 건가. 이해 못 할 가치관에 불쾌해지려는 것을 인내하며 허락을 구하듯 눈치를 살피자, 이내 자작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상관없다. 어차피 오늘 밤에나 자네의 실력이 진짜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테니.”

“감사합니다, 스트라 자작님.”

최대한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카델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서야 겨우겨우 응접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일단 지금은 반부터 만나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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