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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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은 미리 준비해 둔 말 한 필을 데리고―돈은 론이 나중을 기약하며 빌려주었다― 저택의 뒤편에 난 오솔길에 대기하는 중이었다.

“슬슬 나오실 때가 됐는데…….”

카델은 길어 봤자 15분 정도면 모든 대화가 마무리될 것이라 했다. 체감상 20분은 흘렀으니,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슬슬 모습이 보여야 했다.

불안한 표정으로 저택의 후문을 힐끔거리던 그의 시야 속으로 익숙한 인형 하나가 들어찼다. 그것이 카델임을 눈치챈 반이 곧장 함박웃음을 지었으나. 그 미소는 카델을 뒤쫓는 한 무리의 병사들을 발견하곤 빠르게 거둬졌다.

“반! 도망쳐야 해!”

멀리서 들려오는 카델의 외침에 그가 능숙한 몸놀림으로 말 위에 올라탔다. 반은 조금씩 말을 움직이다가, 카델이 가까워지자 내뻗은 그의 팔을 쥐고 그대로 끌어 올려 뒷자리에 태웠다.

“잡아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반이 고삐를 쥐고 힘껏 내리치자 말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카델은 반사적으로 반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뒤쪽을 살폈다. 저택에서부터 그를 따라왔던 병사들이 추격을 멈추고 무리 지어 있었다. 그들의 대장인 듯 보이는 남자가 무언가 지시하자, 발 빠른 몇몇이 서둘러 되돌아갔다.

“말을 데려와서 추적하려는 모양이야.”

“상관없습니다. 놈들이 추적을 시작했을 땐 이미 마을을 벗어났을 테니.”

반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길을 따라 달렸고, 얼마 안 가 바빌 마을을 벗어날 수 있었다. 미리 도주를 준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은 마을을 벗어나고서도 한참을 더 달린 뒤에야 속력을 늦췄다. 그동안 반의 등에 매달린 대검 위로 머리를 처박고 있던 카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내 짓눌린 머리가 얼얼했다.

“단장, 검 때문에 불편하면 말씀하세요. 안장 뒤에 고정하면 되니까. 아니면 자리를 바꿔도 되고요.”

“아냐,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카델이 서둘러 답했다. 그는 말을 타는 법을 몰랐다. 괜히 자리를 바꿨다가 굴러떨어지기라도 하면 뼈 몇 개 부러지는 건 일도 아닐 테지. 기껏 도망쳐 왔는데 제 발로 자작의 저택에 돌아갈 순 없었다. 돌아갔다간 치유는커녕 괘씸죄로 고문을 당할지도.

“의뢰비를 먼저 받았다면 단장도 편하게 말을 몰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러게.”

“쉬지 않고 달리면 저녁쯤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 주세요.”

아무래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승마를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숨 쉬듯 마차를 탈 돈을 버는 것보단 그쪽이 더 빠를 테니.

말을 위해 짧은 휴식을 취한 것을 제외하면, 그들은 정말 쉬지 않고 달렸다. 덕분에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엔 새로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반은 완전히 녹초가 된 카델을 대신해 여관을 찾아 값을 계산했고, 직원에게 그를 위한 목욕물을 준비해 줄 것을 부탁했다. 반의 센스 있는 배려로 카델은 곧장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죽을 것 같아…….”

보통 처음 승마를 하면 엉덩이와 허벅지에 피멍이 든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아플 줄은 몰랐다. 말을 탄 게 아니라 말발굽에 온몸이 다져진 기분이었다. 카델은 쓰라린 엉덩이를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왜 하필 중세 배경이야? 현대면 얼마나 좋아. 아니, 적어도 마법 관문 같은 게 있으면 그냥 쓱쓱 갈 거 아니냐고.”

고된 육체의 피로는 게임 속 시대 배경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는 성이 풀릴 때까지 안일한 게임 설정에 관한 욕을 해 댄 뒤, 제풀에 지쳐 목욕통 안에 늘어졌다.

“……피곤하다.”

게임에 빙의된 뒤로 쉬지 않고 사건이 터진 탓에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문제는 지금도 너무 피곤한 탓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따뜻한 물에 잠긴 카델의 눈꺼풀이 가물가물 감겼다.

이런 피로감이라면 당장 잠이 들어야 마땅했다. 꿈도 꾸지 않고 까맣게 잠들었다가 꾸물꾸물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하지만 카델은, 흐려지는 의식과 함께 자신이 어떠한 공간 속에 들어오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간은 처음 스타팅 멤버를 고를 때와 비슷한 무의 공간이었는데, 다른 점은 공간의 색이 백(白)이 아닌 흑(黑)이라는 데에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잠도 마음대로 못 자게 하다니. 투덜거리며 텅 빈 주위를 둘러보자, 얼마 안 가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무의식 상태에 돌입하였습니다.」

「시청 가능한 스토리가 존재합니다.」

‣ 반 헤르도스의 기억 - 스타팅 멤버 한정 스토리

‣ 반 헤르도스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

“스토리……? 설마 개별 스토리를 말하는 건가.”

「히어로 오브 나이츠」는 기사의 호감도를 올려 공략하는 것이 가능하다.

공략 수치에 따라 개별 스토리가 오픈되기도 하는데, 특정 캐릭터에 애정이 깊은 유저들은 스토리를 뚫어 일종의 ‘덕질’을 하고는 했다.

“스타팅 멤버 한정 스토리라면 아무래도 영입 과정인 거겠지.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니까.”

카델은 잠시 고민했다. 개별 스토리를 봐야 한다는 의무감은 없었으나, 일단 반은 그의 실제 부하였다. 스토리를 보게 된다면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고, 그를 대하는 데에 알맞은 태도를 취하기도 편할 것이다.

게다가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대체 자신이 어떤 식으로 반을 영입했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내던질 정도로 충성심이 깊은 건지.

하지만 그가 스토리를 선택하기도 전, 또 다른 시스템 창이 앞을 가로막았다.

「획득한 스토리는 무의식 상태에 돌입할 때마다 열람이 가능합니다.」

「스토리 시청 시, 피로 회복도가 50% 감소합니다.」

“피로 회복도 50% 감소?”

안 될 일이었다.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하루를 자고도 50%만 회복이 된다니.

무의식 상태에 돌입할 때마다 열람이 가능한 것이라면, 매일 잠을 잘 때마다 열람 기회가 생긴다는 뜻. 카델은 이런 시스템의 존재를 알았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미안하다, 반. 하지만 난 천천히 알아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기회는 많다. 적당한 때를 찾아 스토리를 열람해 보도록 하자.

그리 생각하며 100%의 피로 회복도를 선택한 카델. 하지만 그는 헤르멜 도시를 향하는 나머지 이틀 내내, 단 한 번도 스토리를 열람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단 한 번도 체력에 여유가 남지 않았으니까.

헤르멜 도시.

수도 드라키움과 인접한 곳에 위치한 이 도시는 ‘향락의 도시’라 불릴 만큼 누리고 즐길 만한 것들이 도처에 널린 관광 도시였다. 그런 특성을 가진 도시에 입성한 만큼, 피로를 풀 만한 관광을 즐기며 여유롭게 신전의 정보를 모으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단장, 정말 괜찮겠어요?”

카델은 헤르멜 도시에 도착한 뒤로 이틀을 꼬박 앓았다. 단순 근육통이었으나, 사실대로 말하기가 껄끄러워 반에게는 ‘과도한 마력 남용의 부작용’ 정도로 둘러댔다. 그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반을 향해 멋쩍게 웃어 보였다.

“다 나았대도. 충분히 쉬었으니까 괜찮아.”

“또 쓰러지시면 어떡해요. 업어 드릴까요?”

“됐다니까.”

고통뿐이었던 여행길을 버티지 못한 카델이 결국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후들거리며 주저앉았던 과거를 떠올리는지, 반의 얼굴에선 쉽사리 우려가 가시지 않았다. 카델은 그런 반을 안심시키기 위해 높이 솟은 그의 어깨 위로 힘겹게 팔을 두르며 쾌활하게 말했다.

“걱정은 됐고, 빨리 도시 구경이나 하자. 쉬는 내내 바깥이 시끄러워서 궁금했다고.”

“많이 시끄러우셨어요? ……정리가 필요하겠군요.”

카델은 반의 음침한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채 여관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바빌 마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생기 넘치는 거리가 드러났다. 거리 외곽에 늘어선 노점에선 다양한 먹거리와 향신료, 각종 장신구를 판매했고, 그 뒤로는 깔끔하고 청결한 건물들이 정갈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그 사이를 오가는 관광객과 주민들의 즐거운 대화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카델은 거리에서 악취 대신 향기가 난다는 사실에 감복하며 시장을 구경했다. 게임 속 아이템으로 본 기억이 있는 신기한 과일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비로운 색의 보석들을 발견하자 절로 눈이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종류별로 하나씩 사 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우선순위라는 게 있으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는 첫 번째 퀘스트를 진행하며 기사 육성에 대한 중요성을 절감했다. 쓸모도 없는 잡동사니를 마음대로 사 댔다간 이번에야말로 소중한 기사를 잃게 될지도 몰랐다. 미련이 뚝뚝 흐르는 시선을 간신히 떼어 내며, 카델은 무덤덤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반을 잡아끌었다.

“저기부터 가 보자.”

카델이 향한 곳은 바로 대장간이었다. 숨쉬기가 힘들 만큼 뜨거운 열기와 철과 철의 둔탁한 마찰음으로 가득 찬 대장간.

카델과 반이 들어서자, 마침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있던 대장장이가 몸을 일으켰다.

“무기를 좀 보고 싶은데요.”

“어떤 무기를 찾으십니까? 검, 도끼, 창, 전부 있으니 말만 하십쇼.”

“대검을 찾고 있습니다.”

“대검이라! 이쪽 손님이 사용할 무기인가 보죠?”

카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반은 예상치 못한 일인 듯 당황하며 물러섰다.

“저, 전 괜찮아요, 단장. 지금 쓰는 것도 멀쩡한데…….”

물론 멀쩡할 것이다. 내구도가 멀쩡하니까.

하지만 지금 반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D급이었다. 스타팅 멤버에게 기본으로 지급되는 최하위 무기. 반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좋은 무기가 필요했다.

카델은 반의 만류를 무시하며 무기를 꼼꼼히 훑어보았고, 그중 가장 비싸고 멋들어진 대검 하나를 골랐다. 손잡이 끄트머리에 잘생긴 늑대의 머리가 조각된 은빛 대검이었다. 대검을 건네자 반이 머뭇거리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단장…….”

“누가 보면 검에 독이라도 바른 줄 알겠네. 왜 그렇게 죽상이야?”

“저는 단장한테 해 드린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받기만 하다니, 면목이 없어요.”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축 처진 모습에 카델이 저도 모르게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해 드린 게 없다니.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가?

그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의 몸에 치명상까지 입혀 가면서 희생했고, 골골대는 자신을 태우고 사흘 내내 말을 타고 달렸으며, 도시에 도착한 뒤로는 밥까지 떠먹여 주며 극진히 보살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며 그를 위로했다간 또 터무니없이 호감도가 오를 것 같아, 카델은 못 들은 척 방어구를 고르러 갔다. 대장장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반을 세워 수치를 재고는, 마침 딱 맞는 갑옷이 남았다며 진열대로 달려갔다.

“제 것보단 차라리 단장을 위한 마법서나 아티팩트를 사는 게―”

“그런 걸 샀다간 당장 거지가 될걸. 잔말 말고 받아. 네가 강해지면 우리 용병단의 힘도 커지는 거니까.”

“……고마워요, 단장.”

둘은 반의 새로운 갑옷까지 구입한 후에야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가벼운 걸음을 옮기며 반에게 사 준 장비의 등급을 확인하자, 다행스럽게도 무기가 A, 장비가 B급이라고 나왔다. 결제 전에는 뜨지 않던 정보였다.

‘장비는 장착한 뒤에야 등급을 확인할 수 있네. 사기당하지 않으려면 보는 안목도 길러야겠어.’

값을 치르고 나오자마자 다시 환불해 달라고 찾아갈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하루가 지날수록 늘어만 가는 숙제에 막막해하며, 카델이 납작한 배를 문질렀다.

“슬슬 밥이나 먹으러 갈까? 헤르멜 도시는 뭐가 유명해?”

“음, 디저트가 유명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어요. 유명한 관광 도시니 번화가 쪽에 가면 괜찮은 음식점이 많지 않을까요?”

“좋아, 그럼 번화가로 나가 보자고.”

내내 앓느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더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카델이 치솟는 식욕을 느끼며 번화가로 나아가려던 바로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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