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521)

<루멘 도미닉>

현재 등급: A급

최대 각성 등급: S급

포지션: 딜러

착용 장비: 수려한 장검(A), 고급 갑옷(A)

호감도 및 충성도: 5/100

‘충성도가 5밖에 안 될 줄은 몰랐는데. 저 정도면 그냥 없는 거 아니야? 뭐, 그래도 일단은 내 기사니까. 조금씩 올려 가면 되겠지.’

그렇게 하면 될 것이다. 조바심 낼 것 없이, 지금은 코앞의 마녀를 공략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귀 활짝 열고 집중해, 루만. 운이 좋다면 아주 끔찍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튜토리얼에 가까웠던 언데드 마물 군단 토벌과는 달리, 이번에 상대할 마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튜토리얼도 호락호락하진 않았지만.

카델은 진지해진 낯빛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흐으으…….”

메리는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었다. 아무리 숨을 참아도 들썩이는 입술을 따라 절로 우는소리가 났다.

우드득. 까득.

그녀는 무릎 위에 고개를 처박은 채 어떻게든 뒤편을 보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눈앞에서 뜯겨 나갔던 새빨간 팔다리의 잔상. 그보다 더욱 끔찍한 것은, 쉴 틈 없이 들려오는 괴물의 식사 소리였다.

‘형제님들이 전부 먹히면, 그다음은…….’

다음 차례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검은 불꽃에 휩싸여 정신을 잃었던 찰나. 그 찰나가 지나고 전혀 다른 곳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놀라울 정도로 기력이 빠져 있었다. 지금은 두려움에 잠식되어 더더욱 일어날 힘이 나지 않았다.

메리는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그대로 줄줄 흘려보내며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렇게 하면 제 존재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끔찍해. 정말 마녀였어. 다들 저 마녀한테 잡아먹혔던 거라고!’

이럴 줄 알았다면 아버지의 유품이고 뭐고 잃어버린 채 놔뒀을 것이다. 절대 이 밤중에 찾으러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그런 메리를 비웃듯, 뒤편의 ‘마녀’가 입을 열었다.

“착하네. 계속 비명을 질러 댔으면 멱부터 따 두려고 했는데.”

‘마녀’는 기다랗게 늘어뜨린 검은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창백한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 달빛 아래 비친 가녀린 외모는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웠으나, 입가에 번진 핏물이나 턱을 타고 달랑달랑 늘어진 시뻘건 덩어리의 움직임은 그 미모를 단숨에 가려 버릴 만큼 흉측하기만 했다.

그녀는 새하얀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 내곤 들고 있던 팔뚝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살 부분만 듬성듬성 파먹힌 자국이 남은 팔뚝이었다. 살덩이가 떨어지며 나는 질퍽한 소리에 메리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마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메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 선명한 기척에 코앞으로 직면한 죽음을 느꼈기 때문일까. 어디서 용기가 차올랐는지, 메리가 한껏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왜 데폴로의 신도들을 잡아먹는 거죠? 마물도 아닌 마족이면서, 왜 굳이 식인을 하는 거냐고요!”

우렁차게 외치면서도 여전히 고개는 들지 않는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마녀가 작게 웃으며 메리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차가운 감촉에 메리는 거의 엎어지듯 바닥에 달라붙어 흐느꼈다.

“대업이 시작되었단다, 아가.”

“흐윽…… 싫어…….”

“난 그 시작을 알리고자 하는 것뿐이야.”

마녀는 오열하며 끅끅거리는 메리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다정한 손길과는 달리 그녀를 내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엔 짙은 혐오와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아 온 진득한 분노만이 남아 있었다. 둥근 어깨를 타고 미끄러지는 가는 손가락을 따라 선명한 핏자국이 그려졌다.

“가장 괘씸한 놈들에게,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메리의 귓가에 속삭인 그녀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핏물에 절여진 불그스름한 송곳니가 드러나고, 기어코 다가온 죽음의 순간에 메리가 꽉 틀어막힌 비명을 내뱉은 순간.

“……?”

마녀의 벌어진 턱이 주춤하며 동작을 멈췄다. 그녀는 재빠르게 메리의 뒷덜미를 낚아채 후방으로 도약했다.

쐐애액!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시뻘건 검기가 그들이 있던 자리를 스쳤다.

“주문한 적 없는 식사가 도착했네.”

카델의 시선이 의식을 잃어 축 늘어진 여신도와 그녀를 짐짝처럼 들고 있는 마녀에게 닿았다. 마녀의 아래로는 조금씩 갉아 먹힌 인간의 사지와 육편, 지저분하게 뜯긴 머리통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흘러나온 내장의 잔해를 보자 일순 구역감이 치밀었다. 헛구역질을 억누르기 위해 잠시 숨을 참자, 마녀의 요염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배는 부르지만, 뭐……. 디저트 먹을 공간은 언제든 남아 있으니까. 환영해 줄게.”

“네 녀석이 소환 함정을 발동시킨 마녀로군.”

반이 으르렁거리며 대검을 고쳐 쥐었다. 그러자 붉어진 눈동자처럼 새빨간 오라가 넘실거리며 새로운 검기를 쏘아 낼 준비를 마쳤다.

마녀는 반과 대검을 번갈아 보았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눈동자는 그의 역량을 가늠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소환 마법을 눈치챘어? 마법에 대해 꽤 아는 애송인가.’

아니, 저 녀석은 딱 봐도 육체파다. 차라리 옆에 있는 비실비실한 인간이 마법사일 확률이 높으리라.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반과 카델뿐이었다. 그 때문에 마녀는 자연스럽게 카델 쪽이 마법을 다루는 인간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옳은 판단이었다.

“그 여자를 넘겨라.”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남의 먹잇감에 소유권 주장이라니. 내가 순순히 넘겨줄 것 같니?”

“말이 통할 거라곤 기대도 안 했지.”

반이 다시금 검기를 날렸다. 붉은 검기는 아래에 늘어진 신도를 피해 마녀의 머리가 위치한 상단을 노렸다. 바람 같은 속도였으나 마녀는 피하지 않았고, 대신 정면을 향해 손을 한 번 휘둘렀다.

손끝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피어난 짙은 그림자. 모양 없이 흐물거리는 그림자가 그대로 검기를 집어삼켰다. 어둠에 먹힌 검기는 마녀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증발했다. 반의 미간이 꿈틀했다.

“네 공격은 통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가소롭기는.”

마녀는 대놓고 비아냥거리며 반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명백한 도발이었으나, 반은 도발에 넘어가는 대신 카델에게 눈짓했다. 그제야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구역질을 삼켜 낸 카델이 조용히 말했다.

“전력을 다할 필요는 없어. 알지? 시선을 잡아끄는 게 최우선이다. 둘이서 최대한 주의를 분산시켜 보자고.”

카델이 힘을 주어 손끝을 구부렸다. 그러자 손바닥 위로 주먹만 한 불덩이가 피어올랐다. 달빛이 전부인 숲속에서 불의 존재감은 확연했다. 곧바로 카델의 불꽃을 발견한 마녀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역시 이쪽이 마법사였다. 소환 마법을 간파한 인간이라면 실력이 제법일 테지. 일이 재밌어졌다. 숲을 태울 정도의 화력일까? 아니, 같은 인간의 땅을 파괴하면서까지 초반부터 힘을 주고 싶진 않겠지. 범위는 작은 대신 한 방 한 방이 강력한 화염 마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 짐작한 마녀가 어둠의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녀 또한 모처럼 만에 얻은 쾌적한 장소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방어부터. 어차피 저놈들의 목표는 확실하니, 여자를 앞세워 피해를 최소화시킬 셈이었다.

카델의 마법을 대비한 그림자 장막이 정면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날아드는 붉은 화염구.

‘전부 예상대로야. 어디,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을―’

그러나 그 순간. 카델의 마법 성취도를 가늠하기 위해 정면의 장막을 내세우던 마녀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이 좁아터진 장막이야말로 가소롭군.”

그녀를 공격하는 것은 화염구뿐만이 아니었다. 불덩이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몸을 던진 반. 그가 기척도 없이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육중한 대검을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쩌저적!

장막에 튕겨 나간 화염구의 위력은 간지럽다 못해 하찮을 정도로 별 볼 일 없었다. 이 공격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 낸 장막이 아까울 지경. 하지만 묵직한 반의 일격을 막아 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날 선 대검이 장막을 절반이나 파고든 채 위협적으로 웅웅거렸다.

‘일부러 약한 화염구를 날린 건가……. 주제에 잔꾀를 부렸구나!’

마녀는 황급히 장막을 버리고 보법을 밟아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반을 향해 검은 구체를 쏘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반은 아주 간단하게 구체를 베어 넘겼다.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반은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곧장 검기를 날렸다. 위력이 형편없는 카델의 화염구 또한 사방에서 날아들며 마녀의 행동을 견제했다. 아무리 약한 화염구라지만 불꽃은 불꽃. 맞는다면 성가신 화상을 떠안게 된다.

마녀는 유연하게 몸을 비틀어 화염구를 피하고, 즉각적으로 장막을 펼쳐 검기를 차단했다. 단 한 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현란한 움직임. 여유롭게까지 느껴지는 동작의 연계였으나. 표정은 이 상황이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감히 인간 따위가 기세를 부려? 이 몸이 완전하기만 했더라도……!’

아무리 주의 분산용 공격이라지만 화염구의 위력은 터무니없이 약했다. 처음엔 감히 이 몸을 놀리는 건가, 싶어 화도 났으나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실력 있는 마법사였다면 가벼운 화염구조차 무시 못 할 정도로 묵직했을 테지. 이게 최선인 거다.

소환 마법의 정체를 꿰뚫었다는 것은 흥미로웠으나, 실력은 지루하다. 그러니 저 마법사는 무시한다. 눈앞의 성가신 검사만 처리한다면. 오늘 밤의 전투는 여느 때처럼 흔적 하나 남지 않으리라.

마녀의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두운 빛을 띠며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내내 들고 있던 메리를 방패처럼 머리 위로 치켜들고는, 나머지 한 손은 반이 있는 방향을 향해 쫙 펼쳤다. 새하얀 손바닥 위로 얼핏 구멍처럼 보일 만큼 새까만 칠흑의 마력이 둥글게 뭉쳤다.

반은 자신을 노리는 구멍을 주시하며 곧장 달려 나갔다. 언제든 휘두를 준비를 마친 대검이 위협적으로 진동하고. 응축된 검기와 함께, 뒤편에서 카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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