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카델은 마법서의 해독도, 진품 가품의 판별도 불가했지만, 이 또한 [마녀의 뼛가루]를 건네줄 ‘특정 인물’을 만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었다. 만약 이 마법서가 진품이라면, 그야말로 땡잡은 것이고.
‘퀘스트는 욕 나오게 험하지만, 그것만 빼면 의외로 흐름은 순조롭단 말이지.’
보상이 두둑하다고 해야 하나. 깨는 맛이 있었다.
카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짐 가방의 입구를 동여맸다. 오늘은 해가 지기 전에 마차를 타고 이동할 계획이었다. 목적지는 마이뉴 왕국의 수도, 드라키움. 특별한 메인 퀘스트가 있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고, [마녀의 뼛가루]를 교환해 줄 인물과의 첫 만남이 그쯤에서 이루어졌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빼먹은 것이 없나 몇 번이고 확인한 카델이 방문을 열자, 먼저 준비를 마친 반이 문 옆 벽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왔으면 들어와 있지. 다리 아프게 서 있었어?”
“괜찮아요. 단장의 방에 함부로 들어갈 수야 있나요.”
“……예의 차리긴.”
굳이 못 할 것까지야 있나. 묘한 찜찜함을 느끼며 시선을 돌린 그가 여관의 계단을 내려가자, 반이 곧장 뒤따랐다.
“단장, 가방 저 주세요.”
“됐어. 어차피 마차에 실을 건데.”
“제가 실을게요!”
무시하고 내려가는 카델의 손아귀에서 자연스럽게 가방을 빼낸 반. 카델이 황당하다는 듯 돌아보자, 그가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카델은 그 화사한 얼굴을 훑어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너……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음, 그런가요?”
“평소보다 잘 웃는데.”
원래도 잘 웃는 반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행복해 보였다. 꽉 막힌 속이 뻥 뚫린 것처럼 경쾌한 미소가 만면에 퍼져 있었다. 드라키움으로 떠나는 게 기대되나?
행복 상승의 이유를 짐작하며 여관을 나서는데, 뒤편에서 간지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요……. 싫은 사람 하나 없는 행복한 여행길이 기대돼서 그런가.”
아.
그제야 카델은 반이 과하게 행복해 보였던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루멘 도미닉.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카델을 찾아오지 않았다. 정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 처음엔 열이 받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것은 루멘이 적린 용병단의 ‘임시 단원’ 자리를 거절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처음부터 루멘을 탐탁지 않아 했던 반으로서는 둘도 없이 기쁜 결과였던 것이다.
용병단의 전력 충당이 물 건너간 게 그렇게나 좋을까. 카델은 괘씸함과 안쓰러움이 적절히 섞인 감정을 느끼며 설설 고개를 저었다.
“언젠간 정말 새 전력을 들여와야 할 텐데, 그때마다 이렇게 대놓고 싫어하면 곤란하다. 알지?”
“그럼요!”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카델은 헤벌쭉한 반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돌려 밖에 대기하고 있을 마차를 찾았다.
의뢰비 덕분에 재정이 넉넉한 데다 드라키움과의 거리도 가까워 큰맘 먹고 마차를 빌렸다. 슬슬 체력을 비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도 있었다. 하루쯤은 피로 회복도가 50%가 되어도 버틸 만한 체력을 비축해 둬야, 반의 개인 스토리를 열람해 볼 기회가 있을 테니까.
카델은 이번 퀘스트를 통해 반 헤르도스라는 인물에 대한 정확한 파악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를 제대로 파악수록, 더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깐깐하게 안 따지고 마차를 부른 건데……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어제저녁에 선수금까지 쥐여 주며 여관 앞에 와 달라고 부탁했건만. 눈에 익혀 둔 마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있는 마차라곤 저 비싸 보이는 마차뿐인데. ……귀족이 타는 마찬가? 그래서 내가 부른 밋밋한 평민 마차는 대기 순번이라도 걸린 거야? 귀족 마차 앞으로는 나가면 안 된다는 신분제 법칙에 의거해서?’
그런 법칙이 존재할 리 만무하건만. 카델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마차에 슬슬 불안감을 느꼈다.
“단장, 제가 나가서 찾아볼까요?”
그의 초조함을 감지한 듯 반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카델은 됐다며 손을 내저었다. 선수금을 먹고 튄 게 아니라면 어련히 올 것이었다. 이곳은 중세 배경이니까.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 오지 않는다고 일일이 열 올릴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어수선한 속을 가다듬으며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쪽과는 제법 거리가 있던 귀족 마차가 여관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놓고 입구 쪽으로 다가오는 마차를 경계한 반이 카델을 자신의 뒤로 잡아끌었다.
“아주 들이받을 기세로군.”
반이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마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마부는 그들에게 별다른 사과나 눈짓을 주는 대신, 여관 앞에 그대로 마차를 멈춰 세웠다.
‘뭐야, 이쪽도 여관에서 나올 손님을 기다리는 건가?’
커다란 마차가 시야를 가리고. 어쩔 수 없이 돌아 나가려던 카델을 막은 것은, 코앞에서 열린 마차의 문과 그 안에서 튀어나온 한 남자의 존재였다.
“안 타고 뭐 해?”
“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반은 거의 반사적으로 오만상을 구겼으며, 카델은 예상에 없던 뜻밖의 만남에 경악했다.
마차 안에 있던 이는 다름 아닌 루멘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멀끔한 얼굴을 한 채 마차에서 내리더니, 그대로 카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루멘……? 네가 여긴 왜…….”
“임시 대장의 안목이 영 별로인 것 같아서. 사비로 마차 업그레이드 좀 해 봤지.”
카델이 선뜻 손을 잡지 않자, 루멘은 더 길게 팔을 뻗어 비어 있는 카델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그의 손에 끌려 마차까지 타게 된 카델. 그가 푹신한 방석이 깔린 좌석에 안착하자, 루멘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반에게 턱짓했다.
“안 타면 두고 간다.”
“네놈이…… 네놈이 대체 왜…….”
“왜 둘 다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단장이 주신 이틀의 기한은 지났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낯짝을 들이밀어?”
“조금 늦었다고 빡빡하게 굴기는. 사과의 의미로 좋은 마차도 얻어 왔잖아. 대장이 쓴 선수금도 받아왔으니까 그만 땍땍거려.”
더 이상의 잔소리는 듣기 싫다는 듯, 루멘이 반의 면전에 대고 마차의 문을 닫으려 했다. 그에 반은 문짝을 뜯어 버릴 기세로 거칠게 열어젖히며 안으로 올라탔다. 아직도 별말이 없는 카델의 옆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 그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생각의 수준부터가 되바라진 녀석입니다, 단장. 정말 이대로 넘어갈 건가요?”
“음…….”
카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루멘은 자신이 준 기한조차 지키지 않았고, 그런 주제에 사과나 양해 한 번 구하지 않았으며, 뻔뻔하게 새로운 마차를 구해 와 자연스러운 합류를 꾀했다. 이럴 때는 단장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호되게 튕겨 줄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방석, 편하네. 내부도 널찍하고.’
자신이 구했던 저렴한 마차와 확연히 비교되는 편안함을 만끽하자, 거짓말처럼 훈육의 의욕이 사그라들었다.
결국 카델은 좌석 위에 편안하게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노력이 가상하니 한 번은 봐주지.”
“단장……!”
“대신 다음 목적지의 여관비도 식비도. 전부 네가 부담해라, 루멘.”
이래서 시대가 언제가 됐든 자본의 힘은 무서운 거다. 카델은 반의 억울한 목소리를 무시한 채 편안한 여행길을 즐길 준비를 마쳤다.
⚔️
수도 드라키움. 마이뉴 왕국의 수도인 이곳은 드높은 명성 그대로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한 움큼의 어둠도 용서치 않겠다는 듯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조명들과 높게 치솟은 세련된 건축물, 여기저기서 풍겨 오는 달콤한 향내와 값비싼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귀족들의 행렬까지. 그 휘황찬란한 거리 속에서, 카델은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드라키움에 방문했을 때 봐 뒀던 여관이 있어. 일단 짐부터 풀지.”
반면 루멘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이토록 노골적인 부의 과시가 익숙하다는 것처럼.
당연했다. 그는 날 때부터 귀족이었으며,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이나 그야말로 돈지랄에 가까운 파티를 보고 즐기는 데엔 신물이 난 사람이었다. 드라키움의 눈부심은 루멘의 말초신경을 털끝만큼도 자극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반을 자극시키는 데엔 이보다 탁월한 장소가 없었다.
반은 깃 달린 부채를 흐느적거리며 호호거리는 귀족들이나 그들을 뒤따르는 시종들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참아 내야 했다. 카델은 파랗다 못해 하얗기까지 한 반의 안색을 발견하곤 슬쩍 그의 옆에 붙었다.
“마차 안에서 한숨도 안 자더니. 많이 피곤한 거야?”
“……아뇨. 괜찮아요.”
“여관에 들어가면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바로 자도록 해. 의뢰 구하는 건 내일부터 할 거니까, 제대로 휴식해 두라고.”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반의 어깨를 토닥이며 루멘의 뒤를 따랐다.
얄밉긴 하지만 루멘을 합류시킨 것은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다. 그는 마이뉴 왕국 출신 귀족답게 드라키움의 지리에 능통했고, 가진 정보도 풍부했으며, 무엇보다 개인 자금이 있었다. 아직 용병단에 입단하지 않은 이 시점. 그가 가진 자금을 최대한 알차게 뽑아 먹자는 것이 카델의 계획이었다. 입단한다면 자신이 그를 키워 줘야 할 테니까.
그런 카델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멘은 척 봐도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방도 1인당 하나씩 내주는 대인배적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 카델은 그런 루멘에게 성의 없는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제 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흐음, 어디 보자. 일단 뼛가루부터 챙기고…….”
반에게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움직일 테니 편히 쉬어 두라고 했지만, 카델은 오늘 밤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뼛가루를 건네줄 교환원을 찾고 싶었다. 기사들을 영입하고 그들을 성장시키는 데에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겠지만, 본인의 성장은 뿌린 노력만큼 거두기 쉬운 법이니까.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라도 한시바삐 강해질 방법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돈과 아이템, 혹시 모를 마법서까지 챙긴 그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반이나 루멘과 마주친다면 둘러대기 번거로워졌을 테지만, 다행히도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카델은 서둘러 여관을 빠져나왔다.
‘드라키움에선 무슨 의뢰를 받을 수 있더라? 스토리는 기억에 남는 게 없는데.’
카델은 복작거리는 인파 속을 누비며 머리를 굴렸다.
드라키움은 마이뉴 왕국의 수도인 만큼 게임 내에서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예상외로 큼직한 메인 스토리와는 연이 적었다. 대신 각종 상인이나 이벤트 NPC가 자리 잡고 있어 게임 내의 중요도는 높았다. 카델이 찾는 ‘교환원’도 그중 한 명이었고.
‘아, 게임이었으면 그냥 느낌표 따라 누르기만 하면 되잖아. 이렇게 넓은 데서 발품 팔아 가지고 어느 세월에 찾냐고.’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우뚝 멈춰 서더니, 곧 막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힘들 때의 버릇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 별도 보이지 않는 갑갑한 밤하늘이, 꼭 욕심만 많고 답은 없는 제 내면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그렇게 풀리지 않은 기분을 떠안고 다시 방황에 가까운 수색에 돌입하려던 그 순간.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시야를 가득 채우던 하늘 대신, 호기심 섞인 루멘의 얼굴이 불쑥 들어찼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친 카델이 깜짝 놀라며 젖혔던 고개를 홱 치켜들고, 루멘은 작게 웃으며 물러섰다.
“깜짝이야! 네가 왜 여깄어?”
“산책.”
“산책?”
“……은 아니고. 대장이 안 보이길래 찾으러 나왔지. 그나저나, 이 앞으로는 빠지지 않는 게 좋을걸. 근처에 공작가가 있어서 괜히 어슬렁거렸다간 의심만 사거든.”
넉살 좋게 웃은 그가 자연스럽게 카델의 옆에 섰다. 카델은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께를 꾹 누르며 루멘을 째려보았다.
“쫓아오지 말고 돌아가. 이상한 데 가는 거 아니니까.”
“뭐, 그렇겠지. 충견까지 놔두고 왔는데.”
하지만 돌아갈 생각은 없다는 듯, 루멘이 빨라지는 카델의 걸음걸이에 맞춰 보폭을 넓혔다.
‘미친놈! 다리가 왜 저렇게 길어? 나만 모양 빠지게 경보 중이잖아!’
카델의 세 걸음이 루멘의 한 걸음인 꼴이었다. 열심히 걸을수록 박탈감만 커졌다. 결국 산책 나온 소형견의 기분을 떨칠 수 없어진 카델은 루멘을 따돌리는 일을 관두기로 했다.
‘그래. 어차피 이쪽 지리는 루멘이 더 잘 아니까.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계속 붙어 오겠다면 마음껏 이용해 주리라. 카델은 조금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삐딱한 시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