풉.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루멘이 뒤늦게 입을 가렸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카델의 상태를 살피자, 그런 말을 듣고도 꽤 덤덤한 기색이었다.
‘그래, 저렇게 나와야 마법사지. 초면부터 막말하는 걸 보니 실력은 꽤 괜찮은 편인가 보군. 대장은 저 마법사를 찾아다녔던 건가?’
만약 이곳에 반이 있었더라면 마법사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섰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딱히 카델을 위해 나서 줄 의리도 없었고, 길을 뚫어 준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본다. 솔직히, 카델이 어떻게 받아칠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신의 임시 대장은 언제나 예상을 벗어났으니까. 그 의외성이 기대된다고나 할까.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큰 변화 없던 카델의 만면으로 햇살처럼 밝고 따스한 미소가 떠오른 것은.
“이건 굉장한 우연이군요! 제 하루의 하이라이트도 마밀 님을 발견한 바로 지금인데요!”
언뜻 보면 마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곱상한 백치의 모습이었으나. 루멘은 카델이 전부 알면서도 모르는 척 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델은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하나의 단서를 주면 두 가지 해결책을 내놓는 인간인데, 상대의 노골적인 적의를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니 저건 연극일 수밖에.
마밀의 미간에 난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델은 헤헤 웃으며 마밀의 옆에 붙어 서기 바빴지만.
“제가 어떻게 한 번에 마밀 님을 알아봤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자네 같은 젊은이가 한둘인 줄 아는가.”
“아, 역시 그런가요……. 8성의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 마밀 님은 반경 10km 밖에 떨어져 있어도 흘러나오는 최강자의 아우라가 있으니까요. 눈이 콧구멍에 달린 게 아니라면 알아볼 수밖에 없겠죠. 이야, 정말 피곤하시겠어요.”
“덕분이지.”
마밀은 당장이라도 카델을 저 멀리로 던져 버리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 연주회가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호위 기사도 없는 상태에서 이 견고한 인파를 뚫고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건 카델을 던지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델은 그러한 상황적 이점을 적극 활용하였다. 그는 더 가까워질 수도 없을 만큼 마밀의 옆에 찰싹 들러붙어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마밀 님은 화염 마법의 대가시잖아요. 마침 제가 화염계 마법사거든요. 그런데 요즘 기본적인 기술의 위력이 모자란 것 같아 고민이 많습니다. 화염구 같은 마법이요. 혹시 대선배이자 마이뉴 왕국의 으뜸가는 대마법사로서 제게 약간의 조언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싫네.”
“아아, 그렇죠. 역시 최강이 되기 위한 비결은 아무에게나 알려 줄 수 없는 거죠.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응원의 한마디는 어떤가요? 후배를 향한 따뜻한 한마디! 힘이 날 것 같은데요!”
“……하루 종일 운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싶었지. 이렇게까지 바닥을 칠 줄이야.”
옆에 있는 루멘이 듣기에도, 카델은 과하다 싶을 만큼 말이 많았다. 평소보다 훨씬 들떠 있는 데다 목청도 우렁찼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종잡을 수 없는 카델의 입방정과 마밀의 굳어 가는 표정을 지켜보며, 루멘은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
마밀이 타인과의 접촉을 극히 꺼린다고 해서 처음부터 조심스럽게 접근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과감하게 접근하는 편이 그에게서 많은 것을 빼내 오기 편리했다. 첫 만남부터 진절머리 나는 귀찮음을 선물해 준다면. 극단적 내향 인간인 마밀은 아주 작은 자극만으로도 원하는 정보를 툭툭 뱉어 줄 테니까. 그의 생존 본능을 이용하는 셈이었다.
물론, 너무 몰아붙이기만 해서도 안 됐다. 그러다 영영 도망가 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이유로, 카델은 슬슬 회유 작전에 돌입하기로 했다.
“마밀 님, 마밀 님. 마밀 님은 마족도 여러 번 상대해 보셨죠? 왕국의 부름을 받아 공식 토벌전에 참가한 적도 있으시잖아요.”
“지옥이 따로 없군…….”
“아, 지옥에 비견될 만큼 힘든 토벌이었군요. 저라면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암요. 어쨌든, 전투를 여러 번 치르셨을 테니, 죽은 마족에게서 나온 전리품도 얻어 보셨겠죠?”
“트럼펫보다 시끄러운 목소리라니!”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이거.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지 아시나요?”
“고막이 뜯겨…….”
카델이 무슨 말을 하건 끔찍한 불협화음 정도로 여기며 무시하던 마밀. 그의 동작이 멈췄다.
그의 눈앞에는 카델이 들이민 작은 유리병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병 안을 가득 채운 무광의 보라색 가루. 그것을 발견한 마밀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이건……!”
“우연히 얻게 된 건데, 도통 쓰임새를 모르겠어서요. 마밀 님이라면 아시겠죠?”
마족의 뼛가루! 이 귀한 재료가 어떻게 이런 걸어 다니는 재앙의 손에 들어갔단 말인가?
생기 없던 마밀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유리병을 낚아채려 했으나, 카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허공을 움켜쥔 마밀의 시선이 그제야 카델에게로 가닿았다. 카델은 불안정하게 떨리는 마밀의 눈빛을 마주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제야 다시 절 봐 주시는군요, 마밀 님.”
“……별것 아닌 가루다. 별 볼 일 없어.”
“흐음, 그런가요.”
“잘하면 일반 물약을 만들 때 들어가는 촉매제로 정도로 사용할 순 있겠지. 그것도 나 정도 되는 마법사가 만들었을 때의 얘기지만.”
“오오.”
마밀은 아주 대놓고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의 탐욕을 눈치채지 못한 척, 카델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럼 제가 가져도 좋을 게 없겠군요.”
“그래. 차라리 나에게 넘기는 게―”
“드릴까요?”
“큼큼, 아무리 허접한 재료라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줘 보거라.”
손금이 깊게 팬 노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카델의 표정이 미묘했다. 잠시 마밀의 빈손을 주시하던 그는, 그 위로 유리병 대신 혹시 몰라 챙겨 왔던 마법서 한 권을 꺼내 툭 얹었다. 예상에 없던 무게감에 마밀의 팔이 훅 내려갔다. 당황한 그가 얼떨결에 마법서를 움켜쥐자, 카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대신 이 마법서 좀 해독해 주세요.”
“이게 무슨…….
“그리고 마력 운용법이랑, 관리법, 마법 시전의 원리도 전부 알려 주세요.”
“무, 뭐라고?”
“다 알려 주시라고요. 마밀 님이 가진 지식, 전부 다.”
참으로 당당한 요구였다. 그 적극적인 태도에 밀려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것도 잠시. 마밀의 주름진 얼굴에 서서히 노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놈이 나를 농락했구나!
이 건방진 마법사는 처음부터 ‘마족의 뼛가루’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뼛가루를 찾아다니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곤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물건이 대마법사인 자신과 거래를 할 만큼의 가치를 지녔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순진한 척 미끼를 던지다니. 감히 이 마밀 키파에게! 참으로 요망하고 사악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익은 마밀이 씩씩거리며 카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카델은 눈 하나 꿈쩍 않은 채 보란 듯 눈웃음을 칠 뿐이었다.
“전 당장 내일부터라도 괜찮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