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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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과의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그는 마밀이 정한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반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긴 했으나 그를 대동하지는 않았다.

반이 방해가 되기 때문은 아니었다. 문제는 마밀의 성격.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히스테릭해질 게 분명한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편안한 만남을 위해서라도 사람은 적은 편이 낫다.

“어디 보자, 카페 ‘당근과 쉬폰’이…….”

‘당근과 쉬폰’이라는 깜찍한 이름의 카페는 마밀이 직접 선정한 약속 장소였다. 이동 마법으로 도망치듯 떠나 버렸기에 약속 시간까진 적어 두지 않았지만…… 뭐,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오겠지. 카델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물어 카페를 찾아 들어가자, 손님이 몇 없는 적막한 내부가 드러났다. 혹시 마밀이 먼저 와 있진 않을까, 조심스럽게 테이블을 둘러보는 카델. 곧 그 시야의 끄트머리로 익숙한 얼굴 하나가 걸려들었다.

안타깝게도,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냐?”

그는 한껏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남자가 앉은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신문을 널찍하게 펼쳐 든 채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 살짝 내려간 신문 너머로 드러난 새파란 눈동자가 시큰둥하게 카델을 올려다보았다.

“요새 날 볼 때마다 그 소린 거 알아?”

“네가 자꾸 이상한 곳에서 등장하니까 그렇지! 여긴 왜 왔어? 빨리 돌아가. 마밀이 잘 오다가도 네 얼굴 보고 도망가겠다!”

“내 얼굴을 보고 도망가? 그럴 리가. 보통은 넋이 나가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던데.”

넋이 나가고 자시고, 루멘은 마밀에게 굴욕감을 안겨 준 장본인이었다. 사실 근본적인 범인은 카델 자신이었지만, 마밀을 도주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루멘의 비웃음에 있지 않았는가.

마밀은 분명 어제의 치욕을 잊지 않았을 것이고, 큰맘 먹고 찾아온 약속 장소에 떡하니 자리 잡은 루멘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분기탱천하여 영영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 불안해진 카델이 카페의 출입문과 루멘을 번갈아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힘들게 얻은 기회를 날려 버릴 셈이야? 아무리 임시 단원이라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우리 서로 간 보는 중이란 거 잊었어? 너 지금 상당히 쓴맛이거든?”

“대장도 딱히 달달하진 않아.”

“진짜 이럴 거냐!”

대체 이게 무슨 고집인가. 마밀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태라 그런지 절로 발을 동동 구르게 됐다.

‘이러다 마밀이 오면 진짜 끝장이야. 안 되겠다, 무력으로라도 끌어내는 수밖에…….’

끌어낼 수 있으리란 장담은 못 해도 일단 멱살잡이 정도는 시도해 보리라. 그리 생각하며 루멘이 들고 있던 신문을 찢어 버릴 기세로 낚아챈 카델이었으나.

“그거, 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신문을 빼앗긴 루멘의 은근한 시선이 자신의 뒤편에 난 출입문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카델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밀 키파가 약속 장소에 등장했다는 것을. 카델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루멘의 얼굴에 신문을 처박아 버렸고, 루멘은 잔뜩 구겨진 신문을 군말 없이 받아 들었다.

“제대로 가리고 있어라.”

살벌하게 일갈한 그가 휙 고개를 돌리고. 언제 이를 갈았냐는 듯 산뜻하게 핀 얼굴이 곧장 마밀 키파를 찾아 움직였다.

마밀은 카페 내에서 가장 외진 곳을 찾아 앉아 있었다. 뒤늦게 카델과 눈을 마주친 그가 보란 듯 인상을 구겼다. 원하는 바가 있어 온 것치곤 비협조적인 태도였으나, 카델은 그러려니 했다. 게임 내에서도 ‘마족의 뼛가루’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플레이어와 만나 주던 캐릭터였으니.

카델은 미리 마실 것과 디저트를 주문한 뒤, 마밀의 맞은편 자리에 착석했다.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린 채 싱긋 웃자 마밀이 혀를 차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제 마법서는 챙겨 오셨나요, 마밀 님? 진품인가요, 가품인가요? 혹시 가품이라고 어디 버려두신 건 아니죠? 그래도 나름 선물 받은 거라 아무렇게나 버려두면 예의가―”

“시끄럽다.”

마밀은 카델이 저번처럼 속사포로 떠들어 댈 것이 두려웠는지 빠르게 마법서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버린 게 아니라면 이 마법서는 진품이겠군. 뜻밖의 횡재에 카델이 입맛을 다셨다.

“꽤 쓸 만한 마법서였다만, 네놈에게 쓸모는 없을 거다. 암시장에 내놓든지 마음대로 해.”

“예? 왜요? 왜 쓸모가 없어요?”

“이건 바람 마법의 서니까. 그 시끄러운 입으로 직접 널 화염계 마법사라고 소개하지 않았느냐.”

마밀의 말에 카델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바람 마법의 서라니.

‘루멘한테 액땜한 걸 여기서 채우나 보네!’

이 세계에는 존재하는 마법 속성의 종류만큼 다양한 속성의 마법서가 존재한다. 본인이 얻은 마법서가 아무리 고급이라도, 자신이 다루는 마법 속성에 맞지 않는다면 무용지물. 비싼 값에 팔거나 거래하는 수밖에 없다. 세계관 설정상 대부분의 마법사가 한 가지 속성만을 배우고 끝나는 것을 감안한다면, 마법서는 진품 가품을 제외하고도 꽝이 많은 셈이었다.

물론, 카델은 상관없었다. 그는 포인트를 투자하는 대로 다양한 속성을 뚫을 수 있었고, 그가 사용하는 마법에 한계란 없었다.

‘물론 초반부터 이것저것 뚫어 놨다간 내세울 거 하나 없는 반편이가 되어 버리니, 보통은 두 가지 속성을 중심적으로 키우면서 성장하는 게 이상적이지. 혹시 다른 속성 마법서면 한참 뒤에야 쓸 수 있었을 텐데……. 운이 좋았어.’

다행히도 카델이 얻은 마법서는 [바람의 서]였다. 그는 일전에 마녀와의 전투를 치르던 중 바람 속성의 마법을 뚫어 두었기 때문에, 얻은 마법서가 [바람의 서]인 것은 상당한 행운이었다. 그 말은 곧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모아 둔 속성 포인트를 훨씬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포인트를 화염에 쏟아 바람을 보조적으로 이용할 수도, 그 반대도 가능해졌다. 예상에 없던 행운에 기분이 좋아진 카델이 마법서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신나게 말했다.

“화염계 마법사이긴 하지만 바람 마법도 쓸 줄 알아요. 이 마법서, 어떻게 해독하면 돼요?”

“……뭐라고?”

“펼쳐 봐도 뭘 써 둔 건지 이해를 못 하겠어서요. 부끄럽지만 제가 마법진 해독은―”

“자, 잠깐.”

마밀은 급히 손을 올려 카델의 말을 끊었다. 그는 자신이 못 들을 소릴 들었다는 듯 잠시 귓구멍을 파더니, 이내 착 가라앉은 시선을 보내왔다.

“방금 두 속성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나? 네가? 화염과 바람, 두 가지를?”

“네!”

“감히 나를 또 농락하려는 거라면…….”

“음? 제가 왜요?”

카델은 정말 그럴 이유가 하등 없다는 순진한 표정을 지었고, 마밀이 생각하기에도 카델이 굳이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눈앞의 청년은 아무리 많게 봐야 20대 중반. 행동은 방정맞은 데다 지식인의 기품이라곤 한 올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자가 두 가지 속성을 다루는 천재 마법사라고? 혼자서는 마법서 해독을 해내지도 못하고, 마력 운용이나 관리 같은 기본적인 것을 알려 달라 졸라 대는, 이 멍청한 놈이?

납득할 수 없음을 온 안면 근육으로 표출해 대는 마밀을 마주하며. 카델은 선심 쓰듯 양손을 뻗었다.

“못 믿겠으면 보여 드릴게요.”

그가 테이블 위로 손바닥을 펼치자, 한 손에는 작은 불덩이가, 다른 한 손에는 작게 뭉친 바람결이 쉭쉭거리며 요동쳤다. 그 모습을 직접 확인한 마밀의 눈이 더 커질 수도 없을 만큼 크게 벌어졌다. 잘하면 눈알이 떨어질 것도 같았다.

“뭣……!”

“이제 됐죠? 빨리 마법서부터 해독해 주세요.”

카델은 금세 아무렇지 않게 마법을 거두었으나, 마밀의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는 카델이 진짜 2속성 마법사였다는 것에 한 번, 아무리 위력이 약하다지만 영창 하나 없이 마법을 즉시 시전한 것에 한 번,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발현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라고 있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웬만큼 나이를 먹은 후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세상의 부조리함에 다시금 신물이 나기도 했다.

‘이런 인재가 굳이 이곳까지 나를 찾아와 기본적인 마법 수업을 요청한다고? 말도 안 되지. 다른 놈도 아니고 2속성 마법사다. 이름값에 집착하는 마법사 놈들이 제자로 들여 보겠다고 아우성을 쳤을 텐데. 가문도 소속 영지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도 아직까지 기본조차 알지 못한다라……. 혹시 힘을 숨기고 살았나? 하지만 왜? 어디도 그럴 이유는…….’

납득 가지 않는 행동에 추리를 거듭하던 중. 마밀의 머릿속을 스치는 가설 하나.

‘이 녀석,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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