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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멘은 잔뜩 구겨진 신문 너머로 둘의 모습을 염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면에 앉은 마밀을 두고 굳이 등을 보이고 앉은 카델의 뒤통수를 훔쳐보는 중이었다.
카델 라이토스. 루멘이 이런 후미진 카페를 꾸역꾸역 찾아온 데에는 그 이외의 이유가 없었다.
‘내 앞에서 부하로서의 매력이 없다느니, 당장 내일이라도 버리겠다느니, 잘도 말했지, 임시 대장. 하지만 이쪽도 널 간 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평소의 그였다면 용병단이 받는 의뢰에 참여해 카델의 힘을 가늠하는 식으로 상대방의 능력치를 평가했겠으나, 최근 그는 카델의 달라진 태도에 묘하게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물론 처음부터 얄미운 혓바닥을 살살 굴려 입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던 인물이긴 했다. 하지만 그땐 적어도 ‘호의’라는 것이 존재했다. 최소한의 배려심을 발휘해 챙겨 주는 척이라도 했다는 말이다.
자신이 용병단의 공을 쏙 가로채 일종의 ‘먹튀’를 했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 뒀기 때문일까. 루멘은 임시 단원이 되고부터 확 달라진 카델의 냉랭한 태도가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정확히는 대놓고 반을 우선시하며 자신을 홀대하던 어젯밤부터 그랬다.
도미닉가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는 언제나 숨만 쉬어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의미 없는 눈길 하나에 온갖 보석이 산처럼 쏟아졌고, 모두가 그와 말 한마디라도 나눠 보고 싶어 안달을 냈다. 전부 뛰어난 미모와 출중한 검술 실력, 그를 뒷받침해 주는 가문의 후광 덕이었다.
루멘은 그게 익숙했다. 자신이 조금 까칠하고 제멋대로 굴어도 모두가 떠받들어 주는, 그런 오만한 귀족의 삶이. 그것이 그가 살아온 인생이었으니까.
‘흥, 아주 신났군 그래.’
그래서일까. 자신의 앞에서는 짜증만 내던 사람이 성질 더러운 노인에겐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어 주는 꼴이 영 마뜩잖았다.
‘원래는 그냥 줄 생각이었지만…….’
루멘은 바지 주머니 안에 든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 아래 우수에 찬 눈이 빛났다. 훤칠한 키와 곧은 자세,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이목구비가 한 폭의 명화처럼 조화로웠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주변에 앉은 손님과 점원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루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카델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이 뼛가루 정도면, 더 재밌는 상황을 만들어 볼 수 있을지도.’
지금 그의 손안에서 마음껏 굴려지고 있는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외뿔 마인의 뼛가루]였다. 우연히 얻게 된 뒤 쓸모를 찾지 못해 처박아 뒀고, 그대로 존재를 잊고 있다 카델 덕에 떠올릴 수 있었던 물건.
만약 오늘 아침 카델과 반의 화기애애한 식사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더라면. 아마 가벼운 농담과 함께 카델에게 선물해 주었을 것이다. 필요도 없는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뻔뻔하게 둘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지 못했고, 그 결과. 구질구질하게 남의 약속 장소에 찾아온 염탐꾼이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을 자각하니 더더욱 기분이 가라앉았다. 카델의 가벼운 감사 인사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보답도 터무니없다고 느껴졌다.
‘뭐, 처음부터 딱히 예쁨 받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마음대로 해 볼까.’
신속하게 계획을 수정한 루멘의 반반한 낯짝 위로 생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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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토스라니! 라이토스의 핏줄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하하, 마밀 님……. 광고하세요? 저 제국에선 나름 도망자 신세인데.”
“젠장, 젠가 라이토스……. 그놈의 후손이…….”
마밀은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혼이 나간 사람처럼 ‘라이토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대뜸 이름을 물어 오기에 별생각 없이 대답해 주었더니 결국 이 꼴이다. 스트라 자작처럼 나쁜 마음을 먹고 있는 건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젠가 라이토스’를 언급하는 마밀의 표정에선 묘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젠가 라이토스가 누구야? 후손이라는 걸 보면 주인공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인가?’
둘 중 누구든 높은 확률로 죽었을 것이다. 가문이 몰락하며 참수든 뭐든 당해 세상을 떴을 테니. 주인공인 카델 라이토스는 그 난리 통에서 어렵사리 도주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일단 악감정은 없는 것 같으니까. 써먹어 볼 가치가 있을지도.’
자신이 라이토스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저렇게 큰 반응을 보인다. 공격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는 없었다. 괴로움과 그리움, 그 사이의 미묘한 감정만이 어렴풋이 느껴질 뿐.
그렇다면, 자신의 출생이 마밀을 구슬리는 데 큰 이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생각을 정리한 카델이 애써 끌어 올린 흥을 내다 버렸다. 그리고 언제 방정맞았냐는 듯 한없이 진중한 표정을 꾸며 냈다.
“저도 제 이름의 의미 정돈 알고 있습니다. 그걸 거리낌 없이 밝힌 이유는, 그만큼 마밀 님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죠. 아시다시피 제겐 꼭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귀찮음과 성가심만이 가득하던 마밀의 눈빛에 일순 이채가 돌았다.
“네 녀석…….”
주름 사이사이 짜증이 번져 있던 눈가에 힘이 들어가고. 주기적으로 혀를 차던 입술은 꾹 다물렸다. 처음과는 달라진 깊은 시선은 카델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이어진 마밀의 발언은, 카델의 연기력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지금 그 말, 진심이겠지?”
젠가 라이토스.
그는 젊은 시절 마밀의 유일한 적수이자, 영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인생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마밀이 6성의 경지에 도달하면 다음 날 젠가 또한 6성의 경지에 올랐으며, 젠가가 7성의 경지에 도달하면 다음 날 마밀 또한 7성의 경지에 올랐다.
세상천지 둘도 없는 라이벌이었다. 언젠가 자신이 10성의 대마법사가 되는 날에도, 그 옆에는 젠가 라이토스가 있으리라.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강해질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젠가는 없다. 그 빌어먹을 녀석은 얼토당토않은 죄를 짓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 버렸다. 본인을 대신할 시끄럽고 성가신 핏덩이 하나만을 툭 남기고서.
마밀은 그제야 카델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엷은 갈색의 머리칼이며 깊은 상념이 담긴 고동색 눈동자. 그와 유독 닮은 부분이었다.
젠가는 나이를 먹어도 언제나 흐물흐물 순해 빠진 인상이었으나, 그는 주변의 누구보다도 터프한 삶을 살아왔다. 카델에게도 그런 느낌이 있었다. 생긴 것은 어딘가의 캬라멜 푸딩처럼 맥없이 말랑한 주제에 눈빛만큼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아니. 그냥 콩깍지일지도 모르지.’
과거에 취해 너무 높은 평가를 내려 주고 있는 것일지도. 빠르게 객관화를 마친 마밀이 턱을 쓸었다. 뭐가 됐든 어차피 그는 카델에게 적당한 지식을 알려 줄 계획이었다. 마족의 뼛가루를 받아 내야 했으니까.
달라질 것이라면, 전달해 줄 지식의 양과 깊이 정도일까.
그리 생각을 마친 마밀이 카델이 보여 준 의지에 대한 답을 꺼내려던 그 순간.
“오, 이런 곳에서 또 뵙네요?”
묘하게 낯이 익은 훤칠한 남자가 그들이 앉은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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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흐름. 루멘은 당혹감을 숨긴 태연한 얼굴로 카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라이토스가의 재기를 위해 기꺼이 힘을 보태 주기로 한 제 소중한 친우예요, 마밀 님. 초면에 큰 무례를 저지르긴 했지만…… 이 친구도 반성하고 있답니다. 그렇지, 루멘?”
오로지 카델을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일념하에 마밀의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루멘이었으나.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임시 대장답게, 카델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이럴 줄 알았다는 능글맞은 미소를 날리며 자신을 옆자리로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그의 ‘소중한 친우’로 소개한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을 다정한 손길로 머리까지 쓰다듬으며.
아무래도 자신이 마밀의 심기를 거스르게 놔두는 것보단 본인이 먼저 나서 수습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물 흐르듯 거짓말을 해 대다니. 참 대단한 대처 능력이다.
루멘은 카델의 달콤한 시선과 옆구리를 찔러 오는 매서운 통증의 언밸런스함에 놀라며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흥, 됐네. 어차피 자네에게 마법을 알려 주는 것도 아니니. ……그런데. 계속 같이 있을 생각인가? 방해된다만.”
“아…….”
물론 그는 재미도 흥미도 없는 마법 수업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굳이 끼어든 것도 카델의 관심을 끌어 보고자 한 일일 뿐.
“이런, 어쩔 수 없네, 루멘. 웬만해선 나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귀한 수업이라서 말이야. 자리를 비켜 주겠어?”
하지만 자신의 팔뚝을 간지럽게 붙들며 ‘이제 네가 뭘 어쩔 거냐’는 듯 올려다보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조금 더 즐거워지고 싶어졌다.
“음, 글쎄요. 안타깝게도 제겐 이렇다 할 마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수업을 들어도 써먹을 곳이 없겠죠.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소중한 친우의 성장은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는 게 제 욕심이라서요.”
쓸데없을 정도로 우아하게 미소 지은 루멘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 ‘무언가’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챈 마밀의 눈이 크게 벌어지고. 카델이 붙든 팔뚝에서부터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루멘은 테이블에 올린 ‘외뿔 마인의 뼛가루’에서 시선을 돌려 카델을 내려다보았다. 부들거리는 입꼬리가 꽤 귀여웠다. 그 만족스러운 표정을 만끽하며, 루멘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장의 소중한 친우가 그러는데, 아프니까 팔 좀 놔 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