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521)

더 이상 가증스러운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카델은 멈추지 않았다. 숲을 전부 불태울 기세로 불줄기의 개수와 범위를 늘려 갔다. 기필코 녀석들을 눈앞으로 끌어낼 생각이었다.

이래도 나오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이곳을 전부 불태운다면, 숨을 수 있는 곳도 사라진다. 나타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전투적인 마음가짐을 따라 머릿속의 술식도 점차 완성도를 더해 갔다.

현재 그의 술식은 ‘화염’과 ‘바람’의 비율이 1:2였다. 아직 배분하지 않은 속성 포인트 10을 남겨 두고, 마법서로 얻은 바람 포인트 10을 곧장 사용했기 때문. 굳이 포인트를 남겨 둔 이유는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간 볼 것도 없이 화염에 써 버리면 돼. 비율이 같아지니 지금처럼 화염을 가볍고 빠르게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위력이 올라간다. 위협용으로는 충분해.’

일방적으로 모습을 들킨 상태였으나 그렇다고 이쪽이 압도적인 열세인 것도 아니었다. 이쪽이 상대방의 전력을 모르는 만큼, 상대방도 이쪽의 밑천을 모른다.

강한 척 굴면 굴수록, 힘을 가늠하기는 어려워진다. 카델은 비축해 두고 있던 속성 포인트를 사용하기 위해 ‘내 정보 창’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구는 것도 도주가 힘들어질까 봐서였지. 혹시 질까 봐는 아니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잡아서 해치우면 된다.

카델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하지만 강화된 술식을 위해 속성을 업그레이드시키려던 그 순간.

“그만, 그만! 진심으로 숲을 다 태워 버릴 생각이야? 미쳤네!”

그의 맞은편으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두둥실 떠올랐다.

‘벌레……?’

……일 리가 없지. 카델은 당혹감을 빠르게 갈무리하며 눈앞의 작은 ‘덩어리’를 주시했다.

‘역시, 요정족이었군.’

놀라울 정도로 자그마한 크기를 제외한다면 인간과 흡사한 생김새였다. 비록 등 뒤에 두 쌍의 날개가 달려 있긴 했지만.

아직은 약간 거리가 있는 탓에 자세한 생김새는 보이지 않았으나, 틀림없었다. 처음 예상했던 대로 이 짜증 나는 상황의 원인은 요정족이었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낸 요정은 고작 하나.

‘목소리는 분명 두 개였어. 한 마리는 어디 있는 거지?’

남은 하나의 행방을 의아해하면서도 시선은 눈앞의 요정을 놓치지 않았다. 한계까지 몰린 긴장감에 온몸이 저릿저릿해질 지경이었다.

“우린 좀 놀고 싶었던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난폭하게 굴 필요가 있어? 하여튼, 인간들은 재미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왜 혼자 나온 거지? 네 동료는 어디에 숨어 있는 거냐.”

“걘 부끄럼이 많아서. 나오기 싫대.”

“헛수작 부리지 말고 끌어내.”

“꺄하하! 내가 인간 명령을 들을 것 같아?”

요정은 공중을 한 바퀴 돌며 카델을 마구 비웃어 대더니, 이내 나비처럼 팔랑팔랑 카델의 가까이로 날아들었다.

그제야 선명하게 드러나는 요정의 얼굴. 붉은색에 가까운 머리칼과 치켜 올라간 눈꼬리, 인형처럼 통통하고 귀엽게 살이 오른 볼과 콧등, 광대뼈 부근을 덮은 주근깨.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D급이군. 이름은…… 에이든이었나.’

성능과 등급을 가리지 않고 무식하게 카드를 수집해 댔던 그였다. 카드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분석했던 만큼, 대부분의 캐릭터는 전부 머릿속에 남아 있다.

눈앞의 요정은 D급 기사 에이든. 등급에 딱 걸맞은 성능을 가진 놈이었다. 적에게 크게 위협이 될 만한 기술은 없다. 다만, 문제가 될 부분이 있다면 녀석의 종족.

요정족은 대개 성격이 괴팍하다. 제멋대로 구는 것은 루멘 못지않은 데다 종족의 차이 때문인지 공감 능력도 떨어진다.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방심했다간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소리.

‘혹시 이 녀석이 처음 시스템이 알려 줬던 기사인가? 그 이후로 새로운 알림이 뜨지 않은 걸 보면 맞는 것 같은데…….’

시스템은 영입 가능한 기사의 수가 ‘3’이라고 했다. 만약 그 셋이 계속 함께 움직이는 중이었다면, 지금 모습을 숨기고 있는 요정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소리.

카델은 잠시 고민했다.

D급 기사 에이든.

이 자식을 죽일까, 말까?

에이든 하나라면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의 능력 없이도 D급 하나 해치우는 것쯤, 지금의 카델에겐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나머지 두 마리의 등급을 몰라. 다 같은 D급, 혹은 C급이라면 몰라도 A급 이상의 요정족이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혼자 맞서 싸우는 것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지켜야 할 반이 있다.

카델은 여전히 자신의 위로 무게를 쏟아 내고 있는 반을 힐끗 쳐다보았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발목이 너덜거리든 말든 합세하겠다고 나설 녀석이었으나, 환영 덫에 이상한 약이라도 발라져 있던 것인지 반의 상태가 평소와 달랐다.

눈빛이 탁했고, 말수가 극히 적었으며, 식은땀만 뻘뻘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게 전부였다. 도움을 바라서는 안 됐다.

‘죽이지 않는다면 어떤 선택지가 있지?’

도주? 설득? 협상? 어떤 것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았다.

카델은 일단 평정심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이 복잡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좋게 설득해 봤자 통하지 않아. 저놈이 원하는 건 오로지 재미. 그러니 지금은, 녀석이 재미를 포기할 만한 상황을 만드는 게 우선이다.’

눈치 없이 깔깔거리는 놈에게서 웃음기를 싹 빼 주는 행위에는 꽤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좀 전의 노기를 감쪽같이 숨긴 채 에이든을 마주했다.

“숨은 두 명, 데려오지 않을 거면 얌전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거야.”

“……두 명이라니?”

“보다시피 내가 지금 기분이 안 좋거든.”

카델은 요정족을 따라 하듯 목소리의 볼륨을 올렸다. 말투에 고저를 강조했으며, 세상의 모든 것이 흥미롭다는 듯 히죽거렸다.

인간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요정처럼 말해 주면 된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빙의된 이후, 연기는 언제나 그의 특기였으니.

“이봐. 너 내 성격이 어떤지 알아?”

“허? 인간이니 별 볼 일 없이 평범한 성격이겠지.”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방금 그 공격이 내 최선인지 아닌지는? 내가 왜 굳이 ‘금지된 숲’이라고 불리는 이곳까지 찾아왔는지는? 알고 있어?”

“그걸 내가…….”

“그럼 지금 내 옆구리에 달고 있는, 이 불쌍한 남자가 나한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부하인지, 그건 알아? 알고서 일부러 숲을 못 빠져나가게 수작을 부린 거야? 응?”

“시, 시끄―!”

“나 성격 나빠! 방금 공격? 밥 먹는 것보다 쉬워. 원한다면 하루 종일 보여 줄 수도 있는데. 해 줄까? 원해? 네가 좋아하는 재밌는 인간이 돼 줄까? 감당 가능하겠어? 난 가능한데!”

입꼬리는 올라갔으나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삐딱하게 세운 고개 아래로 에이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불온했다.

“대답을 해야지! 즐겁고 싶은 거 아니었어? 뺄 필요 없어, 내 기분이 더러운 만큼 실컷 놀아 줄게. 이 숲이 평야가 될 때까지 지겹도록 재밌게 해 줄게! ‘금지된 숲’이 ‘금지된 평원’이 된다니, 멋지지 않아? 같이 한계를 시험해 볼래? 응? 짜릿하게 놀아 보자!”

순해 빠진 얼굴에 광기가 더해지니 섬찟할 정도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차분한 인상과 맞지 않는 어딘가 어긋난 듯한 말투가 그를 더더욱 광인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건 요정족의 눈에도 똑같았는지, 내내 여유롭던 에이든의 표정이 조금씩 주눅 들기 시작했다.

카델은 그 손톱만 한 얼굴을 향해 목을 길게 빼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마치 수족관 속 작은 금붕어를 관찰하듯, 서늘할 정도로 무감한 안광을 빛냈다.

“감당 못 하겠으면, 여기서 놔줘.”

카델이 택한 방법은 도주도, 설득도, 협상도 아니었다. 협박이었다.

통하지 않는다면? 그땐 싸우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어떻게 더 시간을 끌겠는가? 끌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바로 옆에 있는 반은 서서히 의식을 놓아 가는 중이었고, 어디 있는지도 모를 루멘은 여전히 감감무소식.

전부 포기할 게 아니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싸울 각오 정도는 해 둬야 했다.

다수의 선택지를 포기한 카델의 눈빛이 위험스럽게 번뜩였다.

“…….”

그리고 에이든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온몸이 오싹해질 만큼 강한 압박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 인간은 대체 뭐지……?’

처음엔 간만에 제 발로 들어온 놀잇감이구나 싶었다. 오랜만의 여흥인 만큼 실컷 가지고 놀다가 사지를 찢어 숲 앞에 전시해 버려야지. 그 정도의 흥미와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도저히 저지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강력한 화염 마법을 구사했고, 지금은 눈깔을 뒤집어 가며 미친놈처럼 굴고 있었다. 사실 미친놈처럼 구는 게 아니라 완벽하게 미친놈 같았다.

‘저 말이 진짜일까?’

원한다면 하루 종일 숲에 불을 지르며 놀아 줄 수 있다는 게. 사실일까?

겉으로는 믿지 않는 척했다. 애초에 저 정신 나간 눈빛만 아니었대도 코웃음을 치며 해 보라고 부추겼을 것이다. 이곳엔 위대한 ‘핀하이족’이 살고 있었고, 동족의 마법은 대단했으며, 장로들이 버티고 있는 한 그 어떤 존재도 숲에 위해를 가할 수 없을 테니.

하지만.

하지만 저 인간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니라면.

자신은 한낱 재미를 위해 숲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역적이 될 것이다. 동족의 힘을 빌려 인간을 처치한다고 해도, 그 후의 책임을 피해 갈 수 없겠지.

‘……혼나긴 싫은데.’

가벼운 재미로 시작했던 일이다. 이 정도의 장난은 누구나 한다. 그런데도 일일이 벌을 받지 않는 것은, 놀이에 참여했던 모두가 숲에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침입자를 완벽하게 처리했기 때문.

반면 에이든은 자신이 없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두 명의 친구가 있긴 했지만, 그 둘만으로 이 인간을 막아 낼 수 있을까?

‘일단 헨지는 안 돼. 걘 전투 경험도 없고, 너무 겁쟁이야. 라이돈. 라이돈이라면…….’

해치울 수 있을지도.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었다. 녀석은 너무 변덕이 심했고, 부른다고 와 줄지도 미지수였다.

에이든은 정신 사납게 공중을 나풀거리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앙증맞은 날개를 파닥일 때마다 빛이 반사되어 몽환적으로 반짝였다.

물론 카델은 그 모습에 감탄할 생각도, 에이든의 촐싹거리는 고민 과정을 기다려 줄 생각도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에이든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갑작스런 포박에 에이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뭐 하는 거야!”

“10초 줄게. 결정해.”

“죽여 버린다! 놔!”

“10초 안에 대답을 못 하면 네가 죽어. 터뜨려서 죽일 거야.”

“뭣……!”

“요정족 시체는 비싸게 팔린대. 확인해 볼까?”

섬뜩한 이채가 감도는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졌다. 도저히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흉흉한 일갈에, 기어코 에이든의 입 밖으로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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