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호흡이 가빠졌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몸에 흐르는 혈액의 온도가 급상한 듯 온몸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카델은 쓰러진 반을 끌어안은 채 헐떡이고 있었다.
“표정 좋네!”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여유롭게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한 명의 요정족. 에이든보다 커다란 몸집을 가진 그는 히죽 웃으며 카델의 절망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부신 금발과 새하얀 피부, 유한 곡선을 그리며 살짝 내려간 눈꼬리가 아기 천사처럼 앙증맞고 사랑스러웠으나. 그 위에 떠오른 표정은 소름 끼칠 정도로 순수한 흥미뿐이었다.
그는 삐걱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 카델과 시선을 맞췄다. 바로 옆에서 부하가 쓰러진 것이 적잖은 충격이었는지, 예쁘장한 얼굴이 분노와 충격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인간들의 저런 얼굴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본인들이 세계의 우두머리라도 되는 양 으스대다가, 진정한 힘의 차이를 깨닫고는 파스스 무너지는 마음이. 그 조각난 마음이 가릴 것 없이 드러나는 얼굴이. 너무나 탐스러웠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인간은 최고였다.
흥미가 동할 만큼 강력한 마법을 구사했고, 보통의 인간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신선할수록 무너질 때의 쾌감은 배가 된다.
“죽어…….”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일부러 샐쭉 웃으며 가까이 날아가자, 실핏줄이 터져 새빨갛게 충혈된 두 눈이 맹렬한 기세로 자신을 쫓았다.
“죽여 버리겠어!”
끝이 갈라진 살기등등한 외침이 귓가를 시끄럽게 울렸다. 마력을 끌어모으는 카델을 응시하며, 그가 뒤편을 향해 훅 물러났다. 귀염성 있는 눈매가 살갑게 접히며 그와 대조되는 새빨간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즐겁게 죽일 수 있겠다.’
오랜만에 골을 울릴 만큼 강렬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눈앞의 인간은, 그의 케케묵은 무료함을 달랠 재능이 충분해 보였다.
⚔️
반이 숨을 쉬지 않았다. 죽었을까? 죽었겠지. 숨을 쉬지 않으니까.
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 여행에 함께한 걸, 내 용병단에 들어온 걸, 날 위해 싸우는 걸. 죽는 날까지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은 진심이었다. 본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는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정말 반 헤르도스의 단장으로서. 그의 앞에서만큼은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어 주고 싶었다.
“화려하게 놀아 줄 거야? 기대되는걸!”
“입 닥쳐.”
그런데…… 정말 죽은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카델의 손안으로 화염구가 생성됐다. 무시전, 무영창의 [화염구]였다. 텀이 없는 매서운 공격이 지체 없이 요정을 노렸다.
그러나 공격은 명중하지 못했다. 타깃이 작고, 그 작은 타깃을 조준할 만큼 상태가 침착하지 못한 탓이었다.
심장이 무거운 울림을 머금은 채 쿵쾅거렸다.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끔찍한 목소리로 웃어 대는 눈앞의 요정과 끊임없이 마력을 뽑아내는 자신의 오른팔뿐.
마밀에게서 배운 복잡한 술식을 생각해 낼 여유는 없었다. 카델은 그저 맨 처음 마법을 사용할 때처럼, 무식하게 몸의 마력을 끌어내 그대로 퍼부었다. 그럴수록 요정의 얄미운 웃음소리는 볼륨을 키워 갔고, 얼마 남지 않은 카델의 얄팍한 이성의 끈 또한 끊어지기 직전의 상태로 팽팽해졌다.
“하나도 못 맞히잖아. 자유롭게 움직이던 그 화염 마법은 왜 안 써? 이렇게 맞히지도 못할 애매한 화염구보단 그쪽이 훨씬 나을 텐데.”
“닥쳐.”
“역시, 에이든한테 했던 말은 허세였어?”
무식하게 쏘아 대는 마법을 따라 마력 또한 빠른 속도로 소모되었다. 이런 기세라면 얼마 못 가 밑천이 드러날 테지만, 카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경 쓸 여력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저 자식을 죽일 수만 있다면.
“하긴, 능력이 없으니까 바로 옆에서 부하를 죽게 놔둔 거겠지만! 아하하!”
툭.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간당간당한 이성이었을까? 무엇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카델은 그 순간, 자신이 이곳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눈앞의 요정만큼은 죽여 버리겠다고. 그리고 녀석이 삶을 가꿔 온 이 역겨운 터전을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리겠노라고, 결정했다.
카델의 오른손이 화염에 휩싸였다. 이글거리는 불길이 화려하게 타오르며 그의 손목을 집어삼켰다. 카델은 그대로 요정을 향해 달려 나갔다.
“좋아! 뭐든 해 봐! 날 즐겁게 만들어 줘!”
원거리 공격이 맞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 두들겨 패면 그만이다. 보란 듯 웃는 낯짝을 짓뭉개고, 흔적도 없이 갈아 버리리라. 살벌한 눈빛에 이채가 깃들고, 카델의 주먹이 여유롭게 양팔을 펼친 요정의 몸체에 닿기 바로 직전.
“대장!”
익숙한 외침과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강한 힘이 카델의 허리를 낚아챘다.
카델은 복부에 가해지는 압력에 컥, 숨을 내뱉었다. 그를 낚아챈 힘은 카델을 요정으로부터 떨어뜨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반대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칼이 헝클어질 만큼 엄청난 속도를 따라 매서운 바람이 피부를 후려쳤다.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자신의 두 다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루멘……?”
그를 낚아챈 것은 다름 아닌 루멘이었다. 내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걱정했던, 루멘. 그가 자신을 데리고 어딘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거길 왜 뛰어들어? 죽고 싶어 환장했어?”
“루멘, 이거 놔…….”
“그런 게 있으면 달려들 게 아니라 도망을 가야 할 거 아니야!”
카델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루멘의 팔을 밀어 냈다. 하지만 그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단단하게 엉킨 밧줄 같았다.
그럼에도 카델은 계속해서 루멘의 팔을 밀어 내며, 멍한 표정으로 맞은편을 보았다. 힘없는 시선의 끝으로 점점 작아지는 반의 시체가 닿았다.
반의 시체. 흐릿하던 초점이 선명하게 돌아왔다. 허망하게 풀렸던 표정에 다시금 적의가 들어찼다.
자신은 아직 반의 복수를 하지 못했다. 반의 시체를 챙기지도 못했다.
그런데 도망을 가라고?
“……네가 뭔데.”
“가만히 좀 있어!”
“네가 뭔데! 놔! 놓으라고!”
“대장, 미쳤어? 왜 이러는 거야!”
“저기에 반이 있다고! 반이 죽었단 말이야!”
“……뭐라고?”
발작하듯 몸부림치던 카델이 희번뜩 눈을 빛냈다. 힘으로 루멘을 떼어 내는 것을 포기한 카델은 그대로 몸을 틀어 그의 얼굴을 향해 화염구를 날렸다.
쾅!
반사적으로 고개를 물린 루멘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경악한 시선이 닿아 왔으나, 카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또 한 번 마력을 모아, 이번에는 루멘의 등을 조준했다. 카델을 안고 있는 한, 몸을 조금 비튼다고 피할 수 있는 궤적이 아니었다.
“카델!”
결국 카델을 놓친 루멘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공격을 회피했다. 빗나간 공격이 폭발을 일으키며 근방을 새까맣게 불태웠다. 적중했다면, 중상 정도로 끝나진 않았으리라.
루멘의 품에서 벗어난 카델이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른 후에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운 그가 흐르는 코피를 닦아 내며 으르렁거렸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