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이 시작된 공중전 속에서, 카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라이돈의 목을 힘껏 끌어안는 것뿐이었다.
“아하하! 정말 나까지 죽여 버릴 기세잖아? 할아버지가 어지간히 화가 났나 본데!”
라이돈은 아래에서부터 치솟는 얼음 창을 유연하게 회피하며 생글거렸다. 살벌한 공격임에도 여전히 이 상황을 놀이 취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그의 품에 매달린 카델은 팔을 스쳐 가는 얼음 창의 냉기나 주기적으로 몰아치는 서릿발, 투포환처럼 쏘아지는 얼음덩이의 공격에 심장이 쪼그라들다 못해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아니, 저 원로 대체 정체가 뭐야? 얼음 거인은 다른 원로들이 소환해 줬다고 쳐도, 이런 무식한 마법을 쉴 틈 없이 계속 퍼붓는다고?’
아무리 이곳이 요정족의 홈그라운드라고 해도, 멜피스의 수준은 정도를 벗어나 있었다. 괜히 S급 기사가 상대하기 버겁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까.
‘마력 공급이 원활한 특수한 상태라는 점을 감안해도 최소 8성급 마법사. 환혹의 숲 안에서만큼은, 마밀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확실해.’
스승을 뛰어넘는 괴물 마법사라니.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라이돈이 없었더라면 당장 저 서릿발 속에 갇혀 서서히 얼어 죽고 말았겠지.
섬뜩한 상상에 마른침을 삼킨 카델이 슬쩍 고개를 빼 라이돈의 뒤편을 훔쳐보았다. 비행함으로써 얼음 거인과의 정면충돌은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똑같이 비행이 가능한 요정족 전사들이 이쪽을 쫓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사들이 라이돈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 요정 왕의 후예…이기 때문인가?’
메인 스토리도 대충 넘기는 와중에 사용하지도 않는 기사의 캐릭터 설정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 때문에 카델은 라이돈의 정체가 ‘요정 왕의 후예’라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았다.
그야, 그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자신은 핀하이족의 하나뿐인 귀한 후계자를 바깥 세계로 끌고 나가려 하는 무뢰한이 되는 것이 아닌가.
‘뭐, 딱히 상관은 없지만.’
여기서 살아 나갈 수만 있다면 무뢰한이 되든 희대의 사기꾼이 되든 상관없었다.
“라이돈! 다치기 전에 그 인간을 내놔!”
“라이돈 님! 놀이는 이제 그만두세요!”
전사들의 공격은 라이돈을 노리는 대신 그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가며 위협하는 데에 그쳤다. 라이돈 또한 그 사실을 인지한 듯 아래에 있는 멜피스의 공격을 피하는 데에만 주력하고 있었고.
“하하! 뭐라는 거야, 다들. 다치긴 누가 다쳐? 죽여 버리기 전에 꺼져 줄래? 난 재미없는 놈들이 시끄럽게 구는 게 제일 싫던데.”
라이돈의 비행 속도는 다른 요정족보다도 우월했으나, 추격자들을 쉽게 떨쳐 내기는 힘들었다. 보호해야 할 카델과 쉬지 않고 공격을 날려 대는 멜피스 때문이었다.
자신을 쫓는 전사들을 향해 얼음 창을 난사한 라이돈이 비행의 고도를 높이며 품에 안긴 카델을 내려다보았다. 카델과 시선이 마주친 그가 애교스럽게 눈을 휘었다.
“끈질겨. 평생 날 쫓아올 생각인가 봐. 어쩌지, 카델? 뭘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걸 나한테 묻는 거냐?”
“응. 그야, 난 네가 했던 그 ‘제안’에 흥미가 있거든.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이 추격을 따돌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는걸. 아무리 그래도 전사를 싹 다 죽여 버리는 건 좀 그렇잖아? 미친 듯이 혼날 텐데!”
귓가에 닿아 오는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카델의 머릿속을 헤집는 하나의 발언.
‘내 제안에 흥미가 있다고……?’
함께 숲을 나가자는, 그 제안에 흥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겠지? 역시 그것밖에 없겠지? 카델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이것은 기회였다! 라이돈이 언제 변덕을 부릴까 전전긍긍하지 않고, 생존을 위한 최고의 장기 말을 확보할 기회.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카델의 다급한 시선이 라이돈의 어깨 너머로 움직였다. 뿌옇게 흩어지는 입김 사이로 아수라장이 된 풍경이 펼쳐졌다.
‘아래에는 멜피스와 얼음 거인, 공중에는 요정족 전사…… 열다섯 정도인가. 라이돈 혼자만 비행이 가능하다면 몰라도 적 모두에게 날개가 달렸다. 공격을 피하면서 거리까지 벌리는 건 쉽지 않겠지. 게다가…….’
공중전의 최대 약점은 바로 사방이 탁 트여 있다는 점이었다.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든, 라이돈의 모든 행동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말은 즉, 오로지 스피드와 추진력으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는 것.
‘그렇게 되면 공중전은 의미가 없어.’
굳이 하늘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단호하게 판단을 내린 카델이 라이돈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래로 내려가, 라이돈.”
“……음? 아래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내가 강한 건 맞지만…… 그래도 원로와의 싸움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데.”
“누가 싸우래? 저 요정들 날개를 다 썰어 버릴 게 아니라면 더 이상의 공중전은 의미 없어. 우리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도주잖아? 그렇다면 차라리 숲의 지형을 이용하는 편이 나아.”
“호오. 일리 있네!”
단번에 카델의 의견을 수용한 라이돈이 급강하기 시작했다. 냉기를 품은 칼바람이 온몸을 할퀴듯 스쳐 갔다. 그리고 그들이 지면과 가까워진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얼음 거인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빠르게 고개를 숙인 라이돈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얼음 주먹. 간신히 공격을 피하면서도 완벽하게 고도를 낮춘 그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아아, 스릴 있어! 너무 재밌잖아! 이제 어떡할까? 전부 때려 부술까? 응?”
목적이 뭔지 인지하고 있긴 한 걸까. 작게 한숨을 내쉰 카델이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위로 가나 아래로 가나 이쪽이 불리한 건 여전해. 하지만 적어도 땅과 가까운 쪽이라면, 내가 계획에 동참해 볼 기회는 생기지.’
떠오르는 계획은 기껏해야 한두 개. 그마저도 전부 도박성이 짙었고, 실행 자체가 불가능할 확률도 높았다.
‘……그래도 이렇게 죽는 것보단 나아.’
뭐든 해 보지 않고선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거다.
‘해 보자.’
결단을 내린 카델이 잔뜩 신난 라이돈의 턱을 잡아채 아래로 끌어당겼다.
“라이돈. 네 환혹 마법, 동족한테도 통해?”
“통해.”
간결하고도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그러나 화색이 된 카델이 이렇다 할 기쁨을 표출해 보기도 전.
“10초 정도?”
라이돈이 찬물을 끼얹었다. 카델은 순식간에 떨떠름해진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10초? 그게 최대야?”
“그것도 다른 요정들 기준이고, 멜피스 장로로 생각하면 길어 봤자 5초.”
“5초?”
“동족한테 거는 환혹술인걸. 10초도 대단한 거라고?”
라이돈이 실실 웃으며 칭찬을 종용했으나 카델은 무시했다. 10초라니. 그의 계획에는 멜피스가 보는 환각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니, 결과적으론 기껏해야 5초의 시간을 벌어 보는 게 전부인 셈이었다.
‘……아니. 시간은 턱없이 짧지만 그렇다고 계획 실행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일단 환혹 마법이 통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실제로도 그가 바라는 건 도망칠 타이밍을 벌 아주 작은 빈틈일 뿐. 물론 환혹 마법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굳이 대혼란을 일궈 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한 카델이 라이돈을 향해 입을 열었다.
“5초라도 좋아. 환혹 마법을 걸어 줘.”
“원하는 장면은?”
“지금 그대로. 아무것도 바꾸지 마. 환각이 풀려도 걸렸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힘들도록 네 비행 자세도 똑같이 유지해 주고.”
“음? 그게 의미가 있어?”
라이돈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는 계속해서 공격과 추격을 피해 달아나면 된다.
움직여야 할 쪽은 자신 하나.
“말했듯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전투가 아니라 도주야. 그러니 네가 환혹 마법을 유지하는 동안, 나는…….”
카델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간단한 계획을 나열하기 사직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의 설명을 듣던 라이돈이 이내 참지 못한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꺾었다.
“하하! 최고야, 카델!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됐고, 이해했으면 어서―”
“이 작은 머리통에서 어떻게 매번 그런 재밌는 생각이 튀어나오는 거야? 응?”
카델의 계획이 기대되어 못 견디겠다는 듯,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은 라이돈이 별안간 그 위로 입을 맞춰 댔다. 그에 카델이 질겁하며 손바닥으로 힘껏 그의 얼굴을 밀쳐 냈다.
“미쳤냐? 주둥이 안 떼?”
“좋아, 좋아, 너무 좋다고! 아하하!”
정말 여러모로 상대하기 버거운 놈이었다. 속으로나마 학을 뗀 카델이 자신의 손바닥 위로 입을 맞추려 하는 라이돈을 피해 빠르게 팔을 내렸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시작해. 실패하면 다 끝장인 거 알지?”
“실패라니, 카델. 그게 가능하긴 해?”
입맞춤을 거부당했음에도 여전히 즐거워 보이는 라이돈.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며 붉은 눈동자의 안광이 빛났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 위로 복잡한 술식을 가진 마법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완성된 원형의 마법진이 새하얗게 번뜩이고.
“5초 시작!”
라이돈의 활짝 벌어진 팔과 함께,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카델이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