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521)

떨어질 때 뼈에 금이라도 간 것일까. 숨을 쉴 때마다 누군가 폐를 움켜쥐기라도 한 것처럼 아릿한 고통이 수반됐다. 카델은 갈비뼈 부근을 감싸 안은 채 둔해진 몸을 끌고 달려 나갔다.

‘라이돈의 환혹 마법이 들통나기 전까지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한다. 절대 들켜선 안 돼.’

점점 멀어져 가는 전장의 소음과 여전히 살갗을 에워싸는 지독한 한기. 카델은 규칙적인 발소리와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바람 속에서 홀로 도주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계획이었다.

‘5초 동안 적들에게 똑같은 풍경을 보여 주고, 그동안 나는 라이돈과 떨어져 반대편으로 도망치는 작전……. 아직까진 성공적이야.’

그를 쫓아오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하나, 라이돈과 자신의 체격 차는 상당했다. 거친 공중전 속에서도 고작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는 것만으로 상처 하나 입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라이돈이 대놓고 정면을 드러내지 않는 한. 자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기는 힘들 것이다.

‘라이돈이 환혹 마법을 사용했다는 걸 알아채더라도 내가 빠져나갔다는 사실까진 짐작하긴 힘들 거야. 그러니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라이돈에게는 추격자들을 전부 따돌린 뒤, 알아서 자신을 찾아오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니 자신은 다른 요정족에게 들키지 않을 만한 안전지대를 찾아 둬야 했다.

‘그런 곳을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지만. ……제일 좋은 건 역시 라이돈의 아지트려나.’

그곳이라면 라이돈이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낼 가능성이 컸다. 날개 잘린 에이든이 라이돈도 없는 아지트에 굳이 다시 찾아올 리도 없고.

하지만 목적지를 좁혀 봐도 문제는 여전했다.

‘거기가 어디쯤 있었지?’

처음부터 에이든의 엉터리 안내로 도착한 아지트였다. 그 후엔 미리 묶어 둔 천을 통해 출구를 찾아갔고, 지금은 라이돈의 화려한 비행과 끈질긴 추격전으로 현재의 위치조차 특정할 수 없어진 상태.

‘괜히 아지트 찾겠다고 돌아다니다가 다른 요정족의 눈에 띌 수도 있어. 이런 몸 상태라면 D급이 와도 상대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나. 아지트는 포기하고 숨겨진 땅굴이라도 찾아보는……. 음?’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기척을 감지한 카델이 곧장 달리기를 멈췄다. 조심스럽게 이동한 그는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으으, 다들 어디로 간 거야? 갑자기 내가 홀려 둔 인간을 뺏어 가질 않나, 잔뜩 화내고 혼자 떠나 버리질 않나……. 라이돈도 에이든도 너무해. 내가 만만한 거지?”

억울함이 듬뿍 담긴 시무룩한 음성. 기둥 너머로 슬쩍 고개를 빼내자, 작은 요정 하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포착한 카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건…….’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라이돈’, ‘에이든’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이나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보아, 저 요정의 정체는 헨지일 확률이 높았다.

B급 기사 헨지.

‘그, 그 인간은 헨지가 환혹시켰는데…… 지금은 라이돈이 데려갔어.’

에이든이 말해 주었던, 반을 환혹시킨 범인. 라이돈이 자신이 홀려 둔 인간을 뺏어 갔다고 했으니, 틀림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요정의 정체를 확신한 카델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라이돈, 에이든과 어울리는 놈이라면 분명 아지트의 위치도 알고 있을 거야. 잘만 이용하면 아지트까지 쉽게 갈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신중해야 했다. 헨지의 등급은 B. 잠재적인 능력만 보면 반과 동급이었다. 이런 몸 상태로 반급의 전투력을 감당할 수는 없다. 섣부르게 다가갔다간 오히려 역습을 당할 위험도 있었다.

“매일 괴롭히고 놀리기나 하고. 다들 미워! 밉다고! 내가 자기들 빼면 친구가 없는 줄 알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대해 줄 순 있잖아? 자기들도 나 빼면 친구 없으면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아주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카델은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리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말하는 것만 들으면 성격은 셋 중 가장 다루기 쉬워 보이는데. ……그러고 보니, 헨지의 일러스트도 그런 느낌이 있었지.’

여리여리한 생김새에 볼에는 홍조가 그려져 있고, 포즈 자체도 수줍어하는 느낌이 강했다. 소년보단 소녀에 가까운 외형이라 남성 유저 사이에서 인기가 많던 녀석―물론 카델은 철저히 능력만을 따졌기에 흥미 없었다―이기도 했고.

‘겉과 속이 다르지만 않다면, 싸움 없이 설득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성공한다면 무사히 아지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실패한다면, 기껏 도망쳐 온 보람도 없이 죽거나 포획당하겠지만…….

왠지 실패할 것 같지가 않았다. 눈앞의 요정에게서 풍기는 초식 동물의 풋풋한 향내. 그것이 카델의 모험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일종의 동물적인 직감이라고나 할까.

헨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카델의 눈빛이 차분하게 번뜩였다.

⚔️

헨지는 우울했다. 분명 오랜만에 숲에 침입한 인간들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잔뜩 흥분했었는데.

제 몫의 인간은 어떻게 하고 온 건지 대뜸 찾아와 자신이 홀려 둔 인간을 훔쳐 간 라이돈의 행패와, 그 모습을 다 지켜봤으면서도 제지 한 번 없이 짜증만 부리던 에이든의 패악질. 한바탕 난동을 부리고 떠나 버린 친구들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자니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다 내가 싸우는 걸 싫어하니까 무시하는 거야. 하지만 말이야, 싸우는 걸 싫어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싸움은 무섭다고. 무서운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오히려 싸움을 즐기는 라이돈 쪽이 더 이상해.’

이렇게 툴툴거려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안다. 여전히 핀하이족은 강한 요정을 대우해 줄 테고, 요정 왕이 되는 것 또한 지독한 겁쟁이에 평화주의자인 자신이 아닌 나사가 다섯 개는 빠진 라이돈일 테니.

그렇게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착잡한 한숨을 내쉬려던 차였다. 그러나 부푼 가슴을 꺼뜨리기도 전, 불쑥 나타난 무언가가 전신을 억세게 조여 왔다.

“으아……!”

“목소리 내면 죽인다. 대답은 고갯짓으로만.”

그의 몸을 잡아챈 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손이었다. 몸통을 꽉 조인 손가락을 발견한 헨지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돌리고.

그의 떨리는 눈동자 안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무감한 인간의 얼굴이 들어찼다.

이목구비만 본다면 그리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 유한 인상의 남자였으나, 그 눈빛이 문제였다.

감정이라곤 살의밖에 느끼지 못할 것처럼 소름 끼칠 정도로 건조한 시선. 피와 먼지로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 자리 잡은 그 시선이 헨지를 겁에 질리게끔 했다.

“누, 누, 누구세요……?”

“마지막 기회야. 셋, 둘, 하나, 하면 닥쳐.”

“네, 네?”

“셋.”

“아니, 저 아무 짓도…….”

“둘.”

“잠깐만!”

“하나.”

닥치라고 해서 닥쳤는데. 남자는 ‘하나’를 말하자마자 몸뚱이를 터뜨릴 기세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절로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여전히 감정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발견한 헨지가 벌어진 입 밖으로 틀어막힌 숨소리를 내뱉었다.

남자는 그런 헨지를 향해 말했다.

“라이돈의 아지트로 안내해.”

“……?”

“뭘 봐. 대답은 고갯짓으로 하랬잖아.”

깡패가 따로 없었다. 헨지는 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그에게도 한 줌의 의리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런 망설임을 알고 있다는 듯, 성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친구 죽일 생각 없으니까 안심하고 안내해. 혹시라도 쓸데없는 오지랖 부려서 이상한 곳으로 데려갔다간……. 뭐, 그건 알아서 상상하고.”

알아서 상상하라니?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의 참혹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싸늘한 대답에 헨지의 부정적인 상상력이 점점 몸집을 부풀려 갔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결국 삐걱삐걱 고개를 끄덕였다.

“주제 파악이 빠른 건 좋군. 약한 놈 건드리는 취미는 없으니까, 좋게 좋게 가자고.”

겨우 풀려난 팔 한쪽을 주무르며, 울상이 된 헨지가 안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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