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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돈의 아지트에 숨어든 지 약 15분.
그동안 카델은 그야말로 피 말리는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붙잡은 헨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힘도 안 들어가는 손을 꽉 움켜쥐었고, 위압감을 유지하기 위해 맘껏 골골거리지도 못한 채 무표정하게 아지트의 입구만 노려보았다.
1분이 1년처럼 느껴지는 생지옥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독한 기다림의 종지부를 찍어 줄 라이돈이 도착했다.
“카델! 우린 천생연분인가 봐. 어떻게 이렇게 한 번에 찾아낼 수가 있지? 텔레파시가 통한 건가? 교감해 버린 거야! 아하하!”
라이돈의 아지트로 왔으니 텔레파시 없이도 한 번에 찾아내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으나, 카델은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정정해 줄 기력도 없었다.
‘드디어 왔구나.’
라이돈의 얼굴을 보자마자 숨통을 조이던 긴장감이 단숨에 해소됐다. 절로 몸의 힘이 풀리며 느슨해진 손아귀 안에서 헨지가 빠져나왔다. 곧바로 라이돈을 향해 몸을 던진 그가 불쌍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라이돈! 나 죽을 뻔했어! 저 인간이 날 터뜨려서 죽일 거라고 몇 번이나―!”
“뭐야, 헨지. 왜 여기 있어? 내 인간이랑 멋대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거야?”
“……내 인간?”
라이돈은 그런 헨지의 날개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는, 자신의 눈앞에서 달랑달랑 흔들었다.
“흐음, 어떡한담. 헨지는 착하니까 그냥 놔주고 싶은데. 카델, 어떻게 하면 좋겠어?”
멀리서 봐도 헨지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는 게 느껴졌다. 요정족답지 않게 순한 성격인 헨지였기에 카델 또한 약간의 동정심을 가지긴 했으나, 그건 정말 새끼손톱보다 작은 크기에 불과했다.
“착하다고 배신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어.”
단호한 대답에 라이돈이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상당히 귀엽고 안타까운 표정이었지만, 튀어나오는 말은 달랐다.
“그렇대, 헨지. 안됐지만 죽어 줘야겠어.”
“무, 뭐?”
“하하! 표정 봐!”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속, 붉은 눈동자 위로 새겨지는 새로운 마법진. 환혹술보단 단조로운 술식의 마법진이 하얗게 번뜩인 바로 그 순간.
“잘 자, 헨지.”
놀라 발버둥 치던 헨지의 몸이 축 늘어졌다.
라이돈은 의식을 잃은 헨지의 작은 몸뚱이를 풀숲 어딘가에 대충 던져 버리고는, 신난 얼굴로 카델에게 걸어갔다.
“헨지를 인질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였어? 재밌었겠네!”
“네 재미의 기준은 대체 뭐야?”
“카델이 하는 모든 행동이 재미있어.”
“……그래. 많이 웃어라.”
카델은 라이돈을 평범하게 상대하기를 포기했다. 그가 힘 빠진 몸을 나무 둥치에 기댄 채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이 숲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거야?”
라이돈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카델의 맞은편에 자릴 잡고 앉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 부담스러울 정도로 또렷한 시선을 받아 내기도 잠시.
카델은 자신과 라이돈의 아래로 형형색색의 들꽃이 피어나는 신비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다리를 간지럽히는 꽃잎에 카델이 작게 몸을 들썩였다.
“신기하지? 내 능력이야.”
“꽃을 피우는 게?”
“선택받은 요정만 할 수 있는 거라고? 향긋해서 좋지 않아?”
“뭐…….”
나쁘진 않았다. 지랄맞은 라이돈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예쁜 능력이구나, 싶어 조금 당황스러웠을 뿐. 라이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델을 향해 애교 있게 웃어 보이고는, 처음의 질문에 답했다.
“정말 내 봉인을 풀어 줄 수 있어?”
“풀어 줄 수 있어. 네 봉인이 해제하기 까다로운 건 봉인 해제를 위한 장소가 ‘피의 사막’이기 때문인 거잖아. 숲을 빠져나와 약해진 몸으로 그 사막을 뚫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인간이면서.”
“딴 데로 새지 마. 봉인에 대해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 두면 되잖아.”
차가운 태도가 너무하다며 투덜거리던 라이돈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옆에 피어난 꽃송이를 꺾기 시작했다.
툭. 툭.
떨어진 꽃봉오리가 카델의 발치에 쌓였다. 침묵 속에서 몇 송이의 꽃이 꺾였을까.
카델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장 대답이나 하라며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을 때, 라이돈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세계를 보고 싶어. 바다도 보고 싶고, 한 번도 안 먹어 본 음식을 먹어 보고 싶어. 숲이 아닌 다른 곳을 느껴 보고 싶어.”
“그 말은…….”
“응. 너와 함께 나가고 싶어, 카델. 그러니까…….”
돌아가는 고개를 따라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닿았다. 라이돈에게선 절대 찾아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복잡한 심경이 담긴, 그것을 모조리 억누르는.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차분해진, 그런 눈빛.
당혹감이 느껴졌다. 제안을 수락해 봤자 대충 재미나 지껄이며 웃어 버릴 거라 예상했었는데. 덩달아 진지해진 카델이 숨을 죽인 채 라이돈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본래의 장난기 가득한 눈빛을 되찾은 라이돈이, 아주 가벼운 부탁을 하듯 산뜻하게 말했다.
“내 아버지 좀 설득해 줘.”
카델은 자신의 손에 들린 [증폭의 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밀이 알려 준 대로 [증폭의 풀]에서는 달큼한 향기가 났다. 색이 푸르죽죽했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잎맥을 가로지르며 순환하는 불그스름한 마력이 비쳤다.
이거 하나 얻으려고 들어왔던 건데.
적당한 허탈함과 적당한 분노, 적당한 원망과 적당한 걱정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품고. 카델이 [증폭의 풀]을 입술 위로 가져갔다.
“맛있게 먹어, 카델. 많이 주고 싶지만 인간은 증폭의 풀을 연달아 먹으면 죽는다더라고. 1년 정돈 기간을 둬야 한대.”
라이돈은 그런 카델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렇다. 이 ‘증폭의 풀’은 라이돈이 직접 가져온 선물이었다.
‘웃냐? 웃음이 나와?’
카델은 속으로나마 라이돈의 하얀 뺨을 왕복으로 휘갈기고는, 증폭의 풀을 거침없이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절로 인상이 구겨질 만큼 씁쓸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맛을 음미해 보기도 전에 꿀떡 삼키자, 그의 눈앞으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히든 아이템 [증폭의 풀]을 섭취하였습니다.」
「육체에서 놀라울 정도로 강렬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마법 성취도가 ??? 증가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칭호 [7성 마법사] 획득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