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521)

⚔️

‘음. 시작부터 이 꼴이라니.’

아름다운 정원, 신비로운 탑. 살랑살랑 불어오는 미풍을 따라 흩날리는 색색의 꽃잎. 카델은 현재,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봤을 판타지 세계 속 절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을 적대시하는 요정 군단에 둘러싸인 채.

“비켜라, 라이돈. 핀하이족의 원로와 전사들이 지켜보고 있다. 더 이상의 추태는―”

“멜피스 님이 먼저 비키면 생각해 볼게요.”

“네놈이 정녕……!”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했으면, 책임지고 아버지 앞까지 데려다줘야 하는 게 아닐까? 라이돈이 제안했던 것은 아버지의 설득이지, 까탈스러운 친척들이 아니지 않은가.

카델은 끓어오르는 한숨을 내리누르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라이돈을 슬쩍 밀어 냈다. 그러자 정면을 막고 선 멜피스가 보였다.

‘아주 눈빛으로 구타를 당하는 기분인데.’

멜피스의 머릿속에서 이미 자신은 한 덩이의 고기가 되어 바닥을 구르고 있는 듯했다. 카델은 그 살기등등한 시선을 마주한 채, 최대한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를 뽑아내 보았다.

“그렇게 잡고 싶어 하던 인간이 제 발로 찾아왔는데. 좀 더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환영 인사가 영…… 인간의 정서랑은 안 맞네.”

한 문장을 뱉을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누가 얼음 속성 마법사들 아니랄까 봐. 멜피스는 그런 카델을 바라보며 위협적으로 읊조렸다.

“라이돈이 언제까지 네 녀석의 목숨을 지켜 줄 것 같더냐. 그놈의 변덕이 다하는 순간, 네 녀석의 사지는 백 조각의 육편이 되어 이 성스러운 땅의 거름―”

“잠깐만요.”

카델은 멜피스의 서슬 퍼런 협박을 저지하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넉살 좋게 라이돈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오해라고?”

“라이돈이 제 방패막이인 건 맞죠. 하지만 그 방패를 들고 있는 건 저예요, 원로님.”

“그게 무슨 헛소리지?”

여유가 담긴 눈동자가 반짝였다. 묘하게 라이돈을 닮은 표정을 꾸며 낸 카델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며 말했다.

“얘가 내 인질이라는 소리. 당신들 지금, 코앞에서 협박당하는 중인 거야.”

상상도 못 한 발언에 일대가 소란으로 물들었다. 원로들은 서로 시선을 맞추며 자신의 청력을 의심했고, 멜피스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자리에 굳어 있었으며, 라이돈은…….

“하하! 나 인질이었어? 전혀 몰랐잖아, 카델!”

“조용히 해, 인마. 알아서 장단 맞추라고.”

이 상황이 그저 즐거운 듯했다.

라이돈을 중심으로 한 인질극은 미리 합을 맞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목구비 하나하나에 ‘고집불통’이 새겨진 멜피스를 뚫고 사지 멀쩡히 요정 왕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내세울 것이 필요했다.

“인질이라고?”

한참을 굳어 있던 멜피스가 간신히 입을 뗐다. 좀 전보다 배는 짙어진 살기가 근육질의 몸을 위협적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기세에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카델은 겁먹은 내색 하나 없이 태연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인질극은 온전히 허세로 이루어져 있다.

모름지기 진정한 허세란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상대에게 ‘비장의 한 수’를 걱정하게 만드는 것. 뻔뻔하고 당돌할수록, 그 위력은 늘어난다.

“제가 굳이 동료를 다 내보내고 혼자 이곳에 남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동료들을 내보낼 힘이 있었다면, 나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죽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헛수작 부리지 마라.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일 뿐. 아니라면 그건 네 녀석의 능력 부족 때문이겠지.”

“끝까지 무시하시긴.”

라이돈의 어깨를 쥐고 있던 카델이 천천히 검지를 치켜올렸다.

“우연이 아니에요. 전부 제 계획이죠. 난 처음부터 요정 왕을 만나기 위해 이 숲을 찾아온 거고, 그 까다로운 목적을 이루려면…… 후계자 정도의 인질은 확보해야지 않겠어요?”

카델의 손끝에서부터 불씨가 피어올랐다. 촛불처럼 자그마한 불꽃이 라이돈의 목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일렁였다. 그 모습을 발견한 멜피스가 눈을 부릅떴다.

“네 뜻대로 될 성싶더냐. 이곳은 핀하이족의 땅. 한낱 인간이 마음대로 들쑤셔도 될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주마!”

멜피스가 공격을 명령하며 팔을 뻗었다. 그에 대기하던 전사들이 즉각 날아올라 포위망을 좁히려 들었으나.

우르릉! 쾅!

마른하늘에 별안간 벼락이 떨어졌다. 난데없는 벼락에 포위망이 흩어지며 전사들의 움직임이 어수선하게 번졌다.

카델은 당황한 그들의 사이로 또 한 번 벼락을 내리꽂았다.

“인질의 의미, 몰라요? 날 건드리면 얜 죽어. 얘가 죽으면? 그래도 난 안 죽어요. 왜일 것 같아?”

싱긋 웃은 카델이 남은 한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그와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강풍이 몰아쳤다.

한차례 정원을 헤집는 묵직한 풍압. 비행 중이던 요정족 전사들은 물론, 상황을 지켜보던 원로들까지 속수무책으로 쓸려 나갔다.

그 사이에서 오직 한 명. 멜피스만이 매서운 강풍을 정면으로 버텨 내며 실핏줄 도드라진 눈으로 카델을 노려보았다.

“3속성 마법사……?”

“맞아요, 맞아. 거기서 하나만 더 추가해 봐요.”

얄미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라이돈의 목 근처를 배회하던 손끝이 천천히 하늘을 향했다.

하늘을 가리키는 작은 불꽃을 따라 덩달아 시선을 옮긴 멜피스. 단 한 번도 당혹감을 드러내지 않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완전히 올라간 고개 너머, 하늘을 수놓는 수백 가닥의 ‘실’이 드러났다. 홍염에 휩싸인 가느다란 실의 향연. 기척도 없이 나타난 불꽃이 어느샌가 정원의 하늘을 빼곡하게 메운 채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하, 시간 초과! 정답은 무영창 무시전의 천재 마법사였습니다!”

튜토리얼 퀘스트 이후, 과도한 마력 소모를 경계해 사용을 꺼렸던 [화마의 화살]이었다. 하지만 다수를 저격한 허세에 이보다 적합한 스킬은 없다. 상대의 신경을 긁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카델이 멜피스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죠? 듣도 보도 못한 3속성 마법사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귀한 후계자는 어떻게 빼내 와야 하는지, 빼낸다고 순순히 따라와 줄지……. 머리 꽤나 아플 거야.”

“……네놈은 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그걸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하기는 싫은데. 난 요정 왕만 만나면 되거든요.”

“인간이 어떤 연유로 하이론 님을 만나 뵙고자 한다는 것이냐.”

“인질을 통한 협상? 그 정도로 해 두죠. 요정 왕과 만날 수만 있다면 굳이 싸울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까 그만 빡빡하게 굴지 그래요?”

미리 [화마의 화살]을 준비시켜 두긴 했으나, 정말 이 기술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실행 직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압감을 느끼리라 예상했으니까.

[화마의 화살]은 마력 소모가 심한 스킬인 데다, 실행하면 분명히 부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아무리 인질을 통한 협박이라는 강수를 두긴 했어도, 거기까지 가면 이미 협상의 여지는 0에 수렴한다.

그러니 카델은 멜피스가 슬슬 한발 물러서 주기를 바랐다.

‘대충 봐도 멜피스보다 강해 보이는 요정은 없어. 다들 멜피스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분위기고…….’

그럼 역시, 멜피스만 공략한다면 요정 왕과의 대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 소리. 카델은 여전히 허세를 떨치지 않고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하늘을 가리킨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런 카델의 앞에서, 멜피스는 전에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라이돈을 응시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인지하고 있는 거냐, 라이돈.”

“흠? 다치기 싫어서 얌전히 붙잡혀 있죠.”

“넌 네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 핀하이족 전체를 욕보이고 있다. 동족을 위협받게 만들었고, 하이론 님의 위엄을 깎아내렸으며, 네 목숨의 가치를 낮춤으로써 핀하이족의 존재 가치를 더럽혔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일순, 라이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부드럽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경직됐다. 그의 동요를 감지한 카델이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기선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신호탄이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사고가 번질 수도 있다. 특히 라이돈은 양쪽 모두에게 발을 걸친 존재이니, 더더욱 말을 삼가야 한다. 그 때문에 카델은 라이돈이 입을 열기 전, 먼저 선수를 쳤다.

“쓸데없는 짓 마시죠. 그쪽이 구슬려야 할 건 인질이 아니라 협박범인 제가 아닐까요?”

멜피스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에게는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압박감을 선사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온전히 카델을 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전혀 예상 못 한 발언이 노기 어린 목소리를 타고 정원을 울렸다.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숲의 보존과 종족의 유지. 그것에 해가 되는 존재가 있다면 가리지 않고 처단하는 것이 도리다. 그러니 전원! 망설이지 말고 눈앞의 인간을 격퇴하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