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즉흥적인 계획이긴 했으나, 라이돈을 통한 협박이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다속성 마법사의 능력을 통해 어느 정도 위기감을 부여하고, 라이돈의 안전을 담보로 협상을 제안한다.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요정 측은 후계자를 확보한 자신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예상했었다.
그런데.
“너 진짜 유일한 후계자 맞냐? 어디 쌍둥이 동생이라도 숨겨 둔 거 아니야?”
“아하하! 나 같은 애가 둘이나 있으면 숲이 남아나지 않았을걸? 완벽한 외동아들이라고.”
카델은 위협용으로 깔아 두었던 [화마의 화살]을 유지한 채 불의 장막을 펼쳤다. 두 가지 마법의 유지는 큰 부담이었으나,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얼음 창과 눈보라를 막아 내며 허세까지 유지하려면, 무리하더라도 마력을 쥐어짜 내는 수밖에.
이래 봬도 7성 마법사다. 벌써 밑천을 드러낼 순 없었다.
“너도 장막 좀 만들어 보지 그래? 거기 멀뚱히 서 있지만 말고.”
“흐음, 여기선 카델 혼자 모든 걸 처리하는 편이 더 멋있지 않아?”
“폼 잡다 죽고 싶진 않거든? 기껏 새로 얻은 마력 이런 곳에 낭비하기 싫으니까, 도와.”
카델이 사납게 눈을 부라리자 라이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전방을 향해 뻗어진 팔을 타고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델이 정면을 방어하던 장막을 막 걷어 낸 그때. 운 나쁜 전사 한 명이 빈틈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당연하게도 그가 장막을 돌파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곧장 생겨난 라이돈의 얼음 장막. 미처 방향을 틀지 못한 전사가 퍽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다. 그의 자지러지는 비명과 함께, 멜피스의 성난 윽박 소리가 들렸다.
“숲이 얼마나 망가져야 네 행동의 무게를 깨달을 것이냐, 라이돈!”
“누가 들으면 내가 뭐라도 한 줄 알겠네요, 멜피스 님. 지금 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게 누군데. 나이가 들어서 눈이 침침해요?”
“네 이놈!”
사방 천지 공격이 날아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시원하게 [화마의 화살]을 뿌려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 온 진짜 목적이 뭔지 잊어선 안 돼. 성급하게 굴지 말고, 적절한 때를 노리자.’
이쪽이 원하는 것은 라이돈의 아버지, 요정 왕 하이론과의 대면. 제 발로 정원을 뚫고 갈 수 없다면, 상대를 탑 바깥으로 끌어내야 한다.
버틴다. 소란을 못 이긴 요정 왕이 직접 행차할 때까지.
카델은 절로 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전혀 지치지 않은 척 목소리를 꾸며 냈다.
“이렇게 나오면 인질을 잡아 두는 의미가 없잖아요? 확 죽여서 대를 끊어 버릴까 보다.”
“곧 죽을 놈이 헛소리를 하는구나!”
거센 한파에 코끝과 뺨, 귓불이 빨갛게 물들었다. 주위를 감싼 불의 장막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동상이 걸렸으리라.
‘몇 분? 몇 시간? 언제까지 버텨야 요정 왕이 나와 줄까. 오래 끌수록 불리한 건 이쪽이야. 섣불리 공격할 수도, 영원히 방어할 수도 없으니.’
어쩌면 후퇴하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그런 가정을 떠올리면서도 카델은 물러서지 않았다.
‘더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밖에 있을 루멘도, 지금쯤 깨어났을 반도. 전부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들에게 죄책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결계 밖으로 루멘을 밀친 것도, 라이돈의 기사 영입을 시도한 것도. 전부 자신이 살기 위한 선택일 뿐이었다. 살아서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멋대로 빙의된 이 세계 속에서, 그들보다 중요한 동료는 없다. 그러니 더더욱. 이 이상의 시간 낭비는 사절이었다.
결심을 굳힌 카델이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이미 협상의 여지는 없어. 미련 부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요정 왕을 끌어낼 수 있다면.’
억누르고 있던 [화마의 화살]을 사용한다. 사망자가 나오지 않게끔 조절해 보는 수밖에.
이래도 나오지 않는다면? 라이돈 몸에 불을 붙여서라도 더 큰 소란을 일으켜야지.
흉흉한 계획을 세운 카델이 [화마의 화살]을 옥죄던 힘을 풀고, 하늘에 장전된 불화살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진동하던 바로 그 순간.
“이렇게 코앞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건, 어떻게든 절 끌어내겠다는 당신의 의지라고 봐도 될까요? 멜피스.”
귓가를 시끄럽게 울리던 공격이 일시에 정지했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사위에 무언가 낌새를 느낀 카델이 급히 마력을 회수했다.
덕분에 기껏 준비했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오랜만에 보는구나, 라이돈. 옆에 있는 아이는…… 친구겠지?”
결과적으로, 그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탑의 꼭대기를 오르는 동안, 카델은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요정 왕 하이론의 기세에 눌렸다거나, 그의 넘볼 수 없는 무력에 압도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이 숲은 전부 제 관리하에 놓여 있으니까요. 카델의 등장부터 제 아들과의 첫 만남, 아들의 장난에 어울려 주던 놀이 시간, 카델의 멋진 3속성 마법까지. 전부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소리는 안 들렸지만 아주 흥미로웠어요. 사실 카델과 제 아들이 탑 앞까지 찾아왔을 땐 당장 마중 나가고 싶었지만요. 아무래도 왕의 체면이란 게 있으니까 자제했죠. 그런 의미에서, 어땠나요? 제 등장 타이밍. 적절하지 않았나요?”
“하하……. 네, 뭐…… 적절했죠.”
너무도 수다스러웠다! 사근사근한 말투와는 달리 대화의 속도가 너무 빨랐고, 중간중간 동의를 구하는 탓에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경청해야만 했다.
‘진짜 요정 왕 맞아? 위엄 어딨어?’
계단 위에서 이쪽을 돌아보는 얼굴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누가 라이돈의 아버지 아니랄까 봐, 아들에 비해 비교적 여린 느낌이긴 했으나 그 또한 확실한 미남이었다.
라이돈과 똑같은 엷은 금색의 머리칼과 살짝 처진 눈꼬리, 아들보단 좀 더 짙은 검붉은색의 눈동자. 느슨하게 묶은 결 좋은 장발이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성격이 이런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어쨌든 멜피스보단 말이 통할 것 같으니까.’
앞뒤 가리지 않고 진격을 명령하며 날뛰던 멜피스를 가로막은 것이 바로 이 요정 왕이었다. 그의 등장에 자신을 노리고 날아들던 모든 공격은 중단되었다. 하이론이란 존재의 출현만으로 모든 상황이 종식된 것이다.
“탑이 높아서 힘들죠? 이제 곧 정상이니 힘내 주세요. 날아서 가도 되지만, 보통 인간들은 이렇게 함께 걸으면서 담소를 나눈다면서요? 비행 속도를 맞추는 것보단 보폭을 맞추는 게 더 쉬우니까요. 아아, 그래도 확실히 오랜만에 걸으려니 좀 버겁긴 하네요. 제 아들은 누굴 닮았는지 덩치도 크고 힘도 세서 끄떡없을 테지만, 전 보다시피 노쇠한 상태라. 하지만 말이죠, 아들이 데려온 새 친구를 맞이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금방 힘이 솟아요. 이런 게 바로 사랑의 힘이라는 걸까요?”
이 지독한 수다쟁이는 라이돈을 꽤나 아끼는 모양이었다. 아버지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부모도 많으니까.
카델은 대충 하이론의 장단을 맞춰 주며 제 옆에 선 라이돈을 힐끔거렸다.
그는 탑에 입성한 뒤부터 말수가 극히 적어졌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긴 했으나, 그건 라이돈 자체가 웃는 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계속 시끄럽게 ‘아하하!’ ‘하하!’ 웃어 대던 놈이 갑자기 침묵이라니. 어색할 지경이다.
‘아버지랑 별로 안 친한가?’
하긴, 친했다면 아버지의 설득도 본인이 알아서 했겠지. 게다가 처음 등장했을 때, 하이론은 이렇게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라이돈. 옆에 있는 아이는…… 친구겠지?’
오랜만에 보는구나. 정겨운 부자 관계라면 한동네 사는 사이에 오랜만에 본다는 얘기가 나올 리가.
카델은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느라 조금 가빠진 숨을 가다듬었다.
‘뭐, 됐어. 애초에 라이돈의 도움은 기대도 안 했고. 다른 요정족의 방해 없이 따로 만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지.’
고맙게도 하이론은 난장판 속에서 정확히 카델과 라이돈만을 지목했다. 셋만 따로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 모두 물러가라고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멜피스의 반발이 있긴 했으나, 하이론의 한마디로 전부 정리되었다.
‘방해하면 화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