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데도 전부 기가 죽어 물러났더랬지. 역시 겉은 순해도 왕은 왕이라는 걸까.
복잡한 생각을 거듭하며 시끄러운 하이론의 수다까지 감당하기를 몇 분. 앞서 걷던 하이론이 우뚝 멈춰 섰다.
“도착했네요. 제 방이에요.”
두꺼운 나무뿌리가 빈틈없이 얽힌 아치형의 문. 하이론이 그 위로 손을 올리자, 두툼한 뿌리의 매듭이 느슨하게 풀어지더니 곧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한 틈이 벌어졌다.
그 어느 곳에도 왕좌는 없었다. 화려한 장식도, 고풍스런 미술품도, 얌전한 시중도.
하이론의 방은, 말 그대로 방이었다.
2인용 침대 하나와 숲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큼직한 창,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책장. 정중앙을 대놓고 차지한 거대한 수정구를 제외한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인테리어였다.
화려한 내부를 기대했던 카델로서는 실망감을 느끼기 충분한 소박함이었다. 물론 가구 하나하나에 신경 쓴 태가 났으나, 그래도 기대에는 못 미쳤다.
“제게 하고 싶다는 말이 뭔지 궁금하네요.”
카델은 수정구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하이론은 창가에 기대어 카델을 응시했고, 라이돈은 수정구를 만지작거리며 대화에 끼어들 생각이 없음을 어필하는 중이었다.
‘막상 말을 꺼내려니까 참…….’
뭐라고 해야 할까. 아드님을 주세요? 이제부터 아드님은 제 기사입니다? 뭐가 됐든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썩 기분 좋지 못한 내용이었다.
‘갑자기 화내면서 공격하려 들면 어쩌지.’
라이돈이 막아 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일단 하이론은 왕이었고, 라이돈은 후계자일 뿐이니.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카델을 바라보며, 하이론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제 아들의 백마 탄 왕자님이 되어 줄 생각인가요? 카델.”
“네……? 아니, 그건 아니고…….”
“라이돈은 기대하는 눈치인데요.”
반사적으로 라이돈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수정구만 문지르고 있을 뿐이다. 카델은 괜히 양심이 찔려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하이론은 자신이 왜 이곳을 찾아왔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말을 꺼내기는 쉬워지지.
그리 생각하며 입을 떼려던 순간.
“카델 한 명이라면 숲에 머물도록 허락해 줄 수 있어요. 원로들의 반발이 심하겠지만, 일단 전 왕이니까요. 그 정도 고집은 피워 볼 수 있겠죠.”
카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언이 튀어나왔다. 숲에 머물다니? 그가 원하는 것은 정반대였다.
아무리 눈치가 빠르다 한들, 역시 자기 아들을 숲 바깥으로 빼내려 한다는 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일까. 카델은 급격히 떨어지는 자신감을 느끼며 다시금 하이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
하이론의 검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찰나.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하이론은 이쪽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이 라이돈을 빼돌리려 한다는 것도, 라이돈이 그걸 원하고 있다는 것도.
그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이쪽은 이만큼을 양보할 수 있으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선택을 해 달라고.
“그러실 필욘 없습니다. 애초에 숲에 머물고 싶었다면 요정족의 날개를 잘라 버리거나 숲을 태우는 짓은 안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쪽은 결코 굽힐 수 없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왔다. 200을 부르면 190을 부르고, 180을 부르면 150을 불러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내는, 그런 협상을 원하는 게 아니다.
카델이 하고자 하는 것은 온전한 선언. 라이돈을 데려갈 테니 순순히 보내 달라는, 선언에 가까운 설득이었다.
“허락해 주십쇼. 전 라이돈과 함께 이 숲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하이론 님.”
“으음……. 예상은 했지만, 역시 직접 들으니 곤란하네요.”
쓴웃음을 지은 하이론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드러난 옆모습에 노을빛이 드리우며 부드러운 윤곽이 도드라졌다.
“일주일 정도면 될까요? 그 정도면 라이돈도 일탈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겠죠.”
“부족합니다.”
“한 달은?”
“부족합니다. 전 라이돈의 관광 안내원이 될 생각이 없어요. 동료가 되고 싶은 겁니다.”
“그런가요…….”
그리 대답하는 하이론의 목소리는 어딘가 처연한 구석이 있어서, 카델은 묘하게 전투력이 깎여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싶어도, 뭐랄까……. 자신보다 약한 생물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는 느낌이 들었다.
우스운 일이다. 요정 왕을 앞에 두고 이런 감상이라니.
“제 아들은, 누구의 동료도 될 수 없어요. 누구의 친구도, 누구의 연인도. 한 사람만의 특별한 존재가 될 수도 없죠.”
“종족의 숙명을 짊어진 유일한 후계자이기 때문인가요?”
“하하…….”
힘없는 웃음소리가 투명한 창에 부딪혀 맥없이 고꾸라졌다. 카델은 그런 하이론을 가만히 주시하다, 내내 품고 있던 의문을 툭 내뱉었다.
“이 숲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거죠?”
요정족, 그중에서도 핀하이족에게만 허락된 땅. 누구의 출입도 허하지 않고, 출입자는 가차 없이 제거한다.
카델이 알기로, 숲을 벗어나자마자 생기는 봉인은 후계자가 태어난 순간 당대의 왕이 직접 부여하는 것이라 했다. 사랑하는 핏줄의 운명을 제 손으로 옭아매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이 숲에 무슨 의미가 있길래.
당돌한 질문에 하이론이 설핏 미소 지었다. 그는 곤란한 듯 가볍게 눈가를 문지르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 한 종족에게만 허락된 힘을 부여하는 땅이 있다면, 카델은 어떻게 하겠어요? 그 땅에 서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강해질 수 있다면?”
“……가능하면 그 땅에서 살고 싶어 하겠죠.”
“하지만 자신이 그 선택받은 종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다면. 그때는 어떨 것 같나요?”
어떨 것 같냐니. 부럽다며 배를 잡고 나뒹굴다가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하겠지. 그런 건 원래 세계에서도 자주 하던 일이다.
그리 생각하며 하이론을 보자, 그가 안타까운 표정과 함께 창문 위로 손을 올렸다.
“부러움은 질투로. 질투는 시기로. 시기는 원망으로 변화합니다. 가질 수 없는 힘을 갈망할수록, 힘을 가진 이에 대한 원망은 거대해져요. 그 결과, 이 숲은 몇 번이고 무너졌습니다. 화합을 꿈꾼 대가였죠. 카델. 믿을지 말지는 그대의 자유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 두세요.”
“…….”
“지금의 폐쇄된 숲을 만든 것은 당신들 인간입니다. 이 숲의 가치는 동족의 생존, 그 자체에 있어요. 이곳이 아니라면 저희는 더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더욱 견고하게, 더욱 고집스럽게 핀하이의 힘을 머금은 이 힘을 가꾸고, 다지는 거예요.”
하이론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서글픈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채우며 흘러들었다.
“살고 싶으니까. 그 외의 이유는 없습니다.”
“하이론 님, 저는―”
“하나의 자유와 모두의 목숨을 맞바꿀 순 없죠. 저는 아버지이기 전에 핀하이족의 왕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시켜야만 하는 저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순 없을까요?”
“전…….”
“카델. 부디 라이돈을 포기해 주세요.”
그 크지도, 힘 있지도 않은 목소리 하나에. 카델은 그대로 말문을 잃었다.
머릿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계획들을 세우며 다양한 상황을 상상해 보았는데.
그 상상의 어디에도 이런 현실은 없었다. 요정 왕의 유약한 외모라든가, 그 외모만큼이나 가녀린 말투, 그 안에 담긴 쓰라린 바람은.
‘……못 하겠어.’
빙의된 뒤 처음으로, 카델은 그런 생각을 했다.
못 하겠다. 자신은 이 요정을 설득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작은 땅에 가둬 평생 동족을 위해 살아왔다. 그 삶이 가져오는 외로움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고 있음에도, 영원한 굴레 속에 사랑하는 아들을 끌어들이겠노라 결심했다.
전부 살기 위해서. 전부 살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라이돈을 빼앗는다면, 왕의 자리를 잇는 후계자는 사라지게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카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난 대정령 핀하이의 힘을 잇는 유일한 후계자야, 카델. 내가 왕이 되지 않는다면…… 이 숲을 지키는 힘도 맥이 끊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