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하! 카델, 대체 무슨 얘길 한 거야? 뭐라고 했길래 아버지가 내 모험을 허락했지? 상상도 안 가! 뭐라고 했어? 응? 카델!”
“시끄러워…….”
그리 길게 대화한 것 같지도 않은데. 심신의 피로도가 최고조라 체감상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카델은 퀭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어깨를 늘어뜨렸고, 라이돈은 그런 카델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 위에 뺨을 비볐다.
거치적거리는 치댐을 떨쳐 낼 기력도 없다. 한숨과 함께 묵직한 걸음을 옮기던 그가 제 위에 얹어진 무게감을 좇아 눈을 굴렸다.
“그런데 너, 정말 아버지랑 작별 인사 안 해도 돼? 친구들이나 다른 동족은 몰라도 아버지랑은 얘기 좀 나눠야 하는 거 아닌가.”
“흐응, 별로. 필요 없는데? 작별 인사 같은 건 재미도 없고. 시시해.”
“……진짜 아들 맞냐?”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설설 고개를 저은 카델이 하이론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제 소중한 아들을, 잘 부탁드려요, 카델.’
그 소중한 아들은 시시하다며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하이론이 불쌍해지는 대목이었다.
‘뭐, 남의 가정사까지 간섭할 필요는 없지. 나는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숲을 빠져나가는 길.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천년 묵은 체증이 싹 가시며 오장육부가 개운해졌다.
‘아직 결계는 남아 있지만 그건 나가기 직전에 하이론이 풀어 준다고 했으니까.’
짧은 시간 안에 핀하이족 전원을 설득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 하이론은 우선 라이돈과 카델을 숲 바깥으로 무사히 탈출시킨 뒤, 시간을 들여 동족을 설득해 보기로 했다.
결과가 어찌 되든 탈출한 이후의 일이니, 카델에겐 다행스러운 부분이었다.
‘예상 밖의 선물도 잔뜩 받아 버렸고 말이지.’
소중한 아들의 여행길이 걱정됐는지, 하이론은 카델에게 아들의 보호자 자격을 부여하며 이것저것 다양한 용품들을 챙겨 주었다.
바깥에서 비싸게 팔아 먹을 수 있는 희귀한 약초는 물론, 특수한 힘이 깃든 아티팩트, 심지어는 마법서―숲에 침입한 인간에게서 빼앗았다는―까지! 고생한 보람이 있는 두둑한 보상이었다.
‘일단 당장 써야 할 아티팩트부터 꺼내 둘까.’
껌처럼 달라붙은 라이돈을 밀어 낸 카델이 품속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중앙에 붉은 보석이 박힌 날개 모양 팬던트. 목걸이의 이름은 [환상의 날개]였다. 이 펜던트에 마력을 불어 넣은 뒤 본인 혹은 타인에게 걸어 주면, 착용자의 외형이 변한다.
마력 주인이 원하는 대로 변화한 외형은 마찬가지로 마력 주인의 마력을 통해서만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물론 마력 주인이 아닌 착용자 스스로 목걸이를 풀 수도 있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상당한 마력이 소모된다고 한다.
‘뭔가 개 목줄 같은 느낌이지만…… 그만큼 라이돈을 통제하긴 편하겠지.’
아직은 바깥에서 라이돈의 정체가 드러나선 곤란하다. 그러니 이것은 라이돈이 멋대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니지 않도록 배려한 하이론의 선물인 셈이었다.
‘외형은 어떻게 바꾸지? 일단 날개는 없애야겠고. 음…….’
펜던트 위로 한 차례 마력을 불어 넣은 카델이 외형 변화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 잠시 밀려 났던 라이돈이 뒤편으로 접근해 다시금 카델을 꽉 끌어안았다.
힘을 버티지 못한 카델이 비틀거리자, 라이돈은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언은.
“또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해? 귀여워라. 카델은 왜 이렇게 작고 귀여운 거야? 생각하는 동안 툭 치면 저 멀리 굴러갈 것 같아. 하하! 표정 봐, 진짜 귀여워!”
카델의 고민을 깔끔하게 종식해 주었다. 가만히 미소 지은 카델이 자신을 껴안은 라이돈의 손에 목걸이를 들려 주었다.
“이거 걸어. 봉인 해제할 때까진 무조건 걸고 다녀야 하니까, 허락 없이 풀지 말고.”
“선물이야?”
“그런 셈이지.”
별 의심도 없이 냉큼 목걸이를 받아 거는 라이돈. 그를 지켜보는 카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
한편.
멜피스의 명령으로 결계의 유지 보수를 위해 떠난 쌍둥이 원로 보르누와 노르부. 그들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있었다.
쩌저적. 쩌적.
“히익! 노, 노르부! 결계가 또 깨지고 있어! 빨리, 빨리 마력을 쏟아부어!”
“난 방금 균열 때 쏟아부었잖아! 이번엔 보르누 차례라고!”
겁에 질려 격양된 목소리를 주고받는 두 쌍둥이 원로의 정면에는, 벌써 몇 번째 등장인지 모를 대검의 몸체가 결계를 뚫고 절반이나 빠져나와 있었다. 대검을 감싼 붉은 오라가 위협적으로 일렁이며 결계의 빈틈을 파고들자, 다급해진 노르부가 별로 남지도 않은 마력을 끌어모아 대검을 반대편으로 튕겨 냈다.
보르누는 그사이 대검이 만들어 낸 구멍을 메우려 마력을 끌어 올렸으나.
“쥐새끼들이…… 성가시게 하는군. 좋아, 계속해 봐. 금방 찢고 들어가서 다 죽여 줄 테니까.”
그 구멍으로 흘러든 음산한 목소리와 붉은 물결이 회오리치는 살벌한 눈동자를 발견한 순간.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뒷걸음질 쳤다.
“보르누! 뭐 하는 거야!”
“무, 무서운 인간이…….”
“숲을 지켜야 할 거 아니야, 이 얼간아! 저 인간보다 멜피스 원로가 더 무섭다고!”
알고 있다. 자신에게는 이 결계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위협적인 외부인의 침입을 완벽하게 차단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인간의 살의였다.
‘자꾸만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잖아.’
보르누와 노르부는 앳된 외형과는 달리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요정이었다. 그 말은 즉, 이 숲이 ‘금지된 숲’이라 불리기 전. 자신들의 터전이 인간들에게 무너지던 때의 격통을 기억하는 세대라는 것. 그럴수록 더 치열하게 불청객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의 트라우마가 족쇄가 되어 발목을 잡아 버렸다.
그리고 보르누가 과거의 잔상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뭐, 뭐야? 결계가 왜…….”
노르부는 창공을 가리던 결계가 서서히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구멍 뚫린 하늘을 발견한 그가 뒤늦게 마력을 쏟아부었으나, 빠르게 거둬지는 결계를 복원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보르누! 정신 차려!”
“어어? 겨, 결계가…….”
보르누의 합세로도 결계가 무너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었다. 두 쌍둥이 요정은 안간힘을 다해 마력을 끌어냈지만, 애초에 원로의 절반이 힘을 모아 구축했던 결계였다.
단 두 명의 마력. 심지어는 반복되는 복구 작업으로 소진된 마력으로는 결계의 재구축은 무리였다.
그렇게 완벽하게 사라진 결계의 앞에서. 그들은 형형한 눈빛을 번뜩이는 두 인간을 목도했다.
“드디어 들어갈 수 있겠군. 온종일 결계에 구멍만 내다 끝나는 줄 알았잖아.”
“닥쳐. 빨리 저놈들이나 잡아. 단장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도 희귀한 오라 사용자였다. 게다가 두 명이라니. 느낌이 좋지 않다. 마력이 이렇게나 소진된 상태로는 이들을 완벽하게 막아 낼 수 없으리라.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리 판단한 보르누가 날갯짓을 시작하려 했으나.
“일단 저 거슬리는 날개부터 없애 둬야겠네.”
눈앞에서 사라진 흑발 사내의 신형. 소름 끼치는 살기를 동반한 음산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뒤늦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그 순간.
“멈춰, 멈춰! 둘 다 아무 짓도 하지 마!”
예고 없이 피어난 불꽃이 보르누의 등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