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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후였다.
“점점 냄새가 심해져.”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뜻이겠지.”
길가에 쭈그려 앉은 카델이 한 입 파먹힌 것처럼 지저분하게 썩어 들어간 수풀을 살펴보았다. 뭉친 풀잎 위로 녹색 점액이 맺혀 있었다.
‘군데군데 보라색 액체가 섞여 있어. 마족의 피다. 피가 섞인 점액을 배출했다는 건, 상태가 그다지 좋진 않단 소리겠지.’
하긴. 상태가 좋았다면 굳이 [아군 증식]을 사용하지 않고도 본연의 힘으로 날뛰면 됐을 테다. 게임 속에서도 적이 [아군 증식]을 사용하는 건 어느 정도 체력이 깎인 후였다.
‘적어도 완벽한 상태는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이쪽이 지는 부담은 덜어져. 아직까진 나쁘지 않은 징조로군.’
몸을 일으키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카델은 허리를 두드리며 미간을 좁혔다. 적의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 좋은 징조였으나, 그건 카델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을까지 이동하는 동안 계속 말을 타고 이동한 데다, 여관에서 제대로 묵은 적도 손에 꼽아. 안 그래도 비참한 체력인데 말이지.’
바스킨 마을에 온 후로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비실비실한 마법사인 카델에게 불면은 제법 타격이 컸다.
‘여유가 있다면 재정비를 하는 게 낫겠지만……. 역시 그럴 시간은 없어.’
사람의 목숨이 걸렸다. 태평하게 늦장을 부릴 수 있을 리가. 조금 힘들더라도 쥐어짜 내야 했다.
겨우 찾은 흔적을 따라 나아가자, 마침내 숲길이 끝났다. 대신 드러난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널찍한 황야. 정돈되지 않은 벌판 위에는 듬성듬성 자리한 커다란 바위와 굴러다니는 가시덩굴이 전부였다.
‘이렇게 트인 곳에 숨었을 리는 없는데. 좀 더 가 봐야 하는 건가.’
황야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을 가로질러야 한다면 예상보다 마을과 멀리 떨어지게 된다. 만약 지원군이 이쪽을 찾아온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모된다는 얘기.
끙, 앓는 소리를 내는 카델의 앞에서 라이돈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황야 너머의 어딘가를 물끄러미 주시하기 시작했다.
“……왜 그래? 뭐가 보여?”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라이돈은 계속해서 한곳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집요하게.
이쯤 되면 슬슬 불안해진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카델이 다시금 라이돈을 재촉하려던 그때. 라이돈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나, 숲에 있을 때보다 훨씬 약해졌지?”
“갑자기 당연한 소리를 하네.”
“어느 정도로 약해졌다고 생각해?”
“더럽게 약해졌다고 생각해. 내 절반이나 될까.”
라이돈의 능력 봉인은 절반 이상의 마력을 빼앗아 갔다. 게다가 무시전, 무영창의 버프조차 사라졌으니. 터무니없이 약해진 것이다. 그 단호한 대답이 불만스럽다는 듯, 찌푸린 얼굴로 맞은편을 응시하던 라이돈이 대뜸 카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럼 안 되겠다.”
“뭐가?”
“우리 둘로는 무리일 것 같아.”
“그러니까!”
대체 뭐가 무리냐고, 그리 말하려던 순간.
치이이익—
무언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카델의 눈앞으로 얼음벽이 치솟았다. 갑작스런 얼음 장막의 출현보다 놀라운 것은, 벽의 중앙을 뚫고 흘러내리는 녹색의 점액이었다.
흐르는 점액을 따라 거침없이 녹아내리는 얼음벽. 카델의 얼굴이 굳었다.
독성 점액질을 통한 원거리 공격, [아군 증식]을 포함한 방어 소환술. 종합적으로 밸런스는 개나 줘 버린 사기적인 스킬을 구사하는 마족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녹아내린 얼음벽 너머, 황야의 끄트머리에서부터 늪에 가까운 웅덩이가 부글거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느릿느릿 떠오르는 머리통을 발견한 카델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확실하군. 에르고다.’
몇 주는 감지 않은 것처럼 엉겨 붙어 늘어진 검은색 머리칼. 푸르죽죽한 피부 위를 덮어 내린 반투명한 점액. 길게 찢어진 눈과 비틀린 입술 아래 듬성듬성 자리한 날카로운 이빨까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마족의 정체는, 얼굴을 마주함과 동시에 결론이 났다.
[부식의 악마, 에르고]
이것이 바로 변장하지 않은 녀석의 본체였다. 맨 처음 ‘헤드 피쳐’를 보았을 때만큼이나 속이 더부룩했다.
“카델, 저 녀석 강해.”
그리 말한 라이돈이 껄끄럽다는 듯 혀를 차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법을 위한 영창. 한 박자 늦게 쏘아진 얼음 창이 늪을 향해 쇄도하고, 투명한 얼음이 막 떠오르던 에르고의 머리통을 꿰뚫기 직전.
늪을 채우던 점액이 솟아오르며 장막처럼 펼쳐졌다. 장막에 막힌 라이돈의 얼음 창이 어이없을 만치 손쉽게 녹아내렸다.
예상했다며 어깨를 으쓱한 라이돈의 옆에서, 카델은 차분하게 머리를 굴렸다.
‘평생을 무영창 마법사로 살아온 라이돈이야. 당장 공격하는 타이밍을 완벽하게 구사하기는 힘들겠지.’
괜찮다. 애초에 라이돈을 전력으로 삼을 생각도 없었다. 라이돈의 쓰임은 에르고를 발견한 시점에서 다 됐다고 봐야 했다.
‘……반지는 멀쩡히 작동하고 있어.’
마을을 벗어난 후부터 반지에 붉은 실이 연결됐다. 착용자만 볼 수 있는 실이니 에르고가 눈치챌 일은 없다. 그걸로 충분하다. 처음부터 이 반지는 지원군을 마족에게로 안내하기 위한 지표였으니.
카델의 목표는 제구실 못 하는 라이돈을 끌고 마족을 찾아 그를 꾸역꾸역 격퇴하는 게 아니었다.
‘루멘이 어떻게든 지원군을 데려올 거야. 그때까지 에르고를 묶어 둬야 해. 쓸데없이 공격을 퍼부을 필요는 없다. 최소한의 공격, 최대한의 방어로 시간을 끌자.’
루멘이 가르엘 몬자시를 데려오지 못한다 해도, 화이트 왕국이 병력 하나 내어 주지 않을 리 없다. 미리 마족을 추적한 것은 그들의 지원을 믿기 때문이었다. 라이돈의 정체를 숨기면서 마족 추적과 토벌에 드는 시간을 대폭 단축하기 위해서는, 이 그림이 최선이다.
그러니 카델은, 눈앞의 에르고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의 손에 죽임당하지 않도록 유연하게 대처해야 했다.
“끌끌……. 불쾌한 인간의 악취…… 그리고 뜻밖의 달콤한 향이 나는구나.”
어느새 상체까지 빠져나온 에르고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여유롭게 늪을 짚은 그가 한 번에 다리를 쑥 빼내더니, 점액이 뚝뚝 흘러내리는 역겨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곳에서 요정을 만나다니. 흥분되는군.”
찢어진 눈매가 기이하게 접혔다. 카델은 손안에 마력을 응축시키며 라이돈을 자신의 뒤편으로 잡아끌었다.
“아하하! 저 마족 놈이 지껄이는 거 들었어? 흥분된다니, 저런 몰골로 흥분해 봤자 역겨울 뿐인데!”
“이리 와, 라이돈. 함부로 나서지 마.”
“음? 싸우려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 거야.”
그의 손 위로 화르륵, 불씨가 피어올랐다. 가볍게 손끝을 구부리자, 카델의 뒤편으로 여섯 개의 불덩이가 생성됐다. 반원을 그리며 카델을 감싸듯 모여든 화염구.
‘일단 상태부터 확인해 볼까.’
비록 목적이 시간 끌기에 불과하더라도, 전투에 돌입한 이상 무엇 하나 허투루 할 순 없었다. 손 위의 불꽃을 거둔 카델이 검지를 뻗어 에르고를 가리키고.
장전된 화염구 중 하나가 우렁찬 포탄 소리와 함께 쏘아졌다.
콰광!
대지를 울리는 둔중한 폭음. 함께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시야를 방해했으나 카델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바람이 훅 끼치며 갑갑한 연기가 단숨에 밀려 났다.
“불쾌한 인간 놈……. 인사도 없이 공격이라니, 과연 행동 하나하나에 근본이 없군.”
카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에르고의 몸엔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허공에 떠올라 장막처럼 펼쳐진 점액이 화염구를 막아 낸 것이다. 할 일을 마친 점액은 그대로 쏟아져 내려 다시 늪으로 흡수됐다.
에르고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살고 싶다면 뛰어라. 난 네놈에게 흥미가 없어. 그 옆의…… 요정을 맛보고 싶을 뿐. 아주, 황홀한 향기가 나거든…….”
혈색 없는 입술을 핥아 올리는 기다란 혓바닥. 얼굴을 뒤덮은 점액을 변태처럼 쓸어내리는 손 틈으로 회색 동공이 번뜩였다.
꾸르르르륵.
발아래의 늪에서부터 거품이 들끓는 소리가 났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카델이 정면으로 불의 장막을 펼친 그 순간.
파바박!
늪의 표면을 박차고 수십 개의 점액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장막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며 곧 강한 반동에 장막이 위태롭게 진동했다. 빗나간 점액 덩어리는 철벅, 소리를 내며 흙바닥을 덮었다.
치이이익—
점액이 닿은 바닥에서 자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거, 하나라도 맞으면 바로 황천길 아니야……?’
게임에서도 평타 한 대 맞았다고 플레이 내내 독 디버프를 달고 다녀야 했다. 그러니 현실에서 이 점액 덩어리를 정면으로 맞는다면.
……인간 현무암이 되어 절명하게 되리라.
빠르게 결론을 내린 카델이 불의 장막 대신 바람의 장막을 생성했다.
‘기본 공격이 전부 점액으로 이루어져 있어. 장막을 유지하지 않는 한 전투는 불가능해.’
그렇다면 시야 확보가 힘든 불의 장막보다 투명한 바람 장막이 훨씬 낫다. 카델은 본인뿐 아니라 라이돈에게도 몸을 감싸는 바람의 장막을 생성시켰다. 자신을 휘감은 마력을 눈치챈 라이돈이 작게 웃었다.
“날 지켜 주는 거야, 카델?”
“저 변태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맛보고 싶다잖아.”
“아하하! 맞아, 맞아. 혼내 줘, 카델! 천 갈래로 찢어 죽여 줘!”
시간을 끌겠다는 말을 어디로 들은 걸까. 카델은 치어리더처럼 열렬한 응원을 보내오는 라이돈을 뒤로한 채, 에르고의 뒤편에 자리 잡은 늪에 주목했다.
첫 등장을 포함한 에르고의 모든 공격은 저 늪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늪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인 건가? 마력이 담긴 술식을 모아 두고 유동적으로 끌어다 쓰는 거지. 그게 가능하다면 확실히 본체는 움직이기 쉬워져. 준비된 마법을 날리는 것뿐이니, 영창도 필요 없을 거고.’
그렇다면 저 늪을 없앤다.
간단명료한 결론과 함께, 카델의 뒤편에 장전돼 있던 화염구 다섯이 일시에 발사됐다.
콰광! 쾅!
공격을 예상한 에르고가 곧장 점액을 띄웠다. 매섭게 몰아치는 화염구가 경쾌한 폭음을 연발하는 가운데. 기습적으로 한 줄기의 벼락이 늪을 꿰뚫었다.
“……음?”
눈부신 섬광이 에르고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날카로운 울림을 따라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 속으로, 늪의 표면을 덮은 푸른 전류가 들어찼다.
“애송이…….”
매캐한 연기 속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기묘한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에르고의 마력을 억눌러야 해.’
에르고의 주의를 끌기 위한 동시 시전 마법. 무사히 늪을 강타한 전류에는 카델의 마력이 담겨 있다. 그대로 늪에 담긴 에르고의 술식을 차단해 그의 전략적 선택지를 대폭 축소하는 것. 그것이 카델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3속성 마법사인가? 인간치고는 빼어나구나. 허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인간은 인간. 속이 빤히 보이는 술수지.”
에르고의 음습한 미소와 함께, 늪에 고여 있던 점액이 꿀렁거리며 치솟기 시작했다.
“크윽……!”
전류에 힘을 집중하던 카델의 미간에 금이 갔다. 억누를 수 없다. 생각보다 늪에 담긴 마력이 훨씬 방대했다.
겨우 펼쳐 두었던 전류가 볼품없이 찢겨 나가며, 늪 속의 점액이 거대한 기둥이 되어 단숨에 솟구쳤다. 10m는 족히 넘을 높이를 자랑하는 점액 기둥. 웅장한 자태를 뽐내던 기둥이 이내 질척한 소리를 내며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찰흙처럼 자유분방하게 일그러지는 점액 기둥이 서서히 형상을 갖춰 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델의 입이 벌어졌다.
“손……?”
인간의 손이었다. 탑처럼 드높이 치솟은 손목 위에 매달린 거대한 손바닥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점액과 함께 그 장대한 위용을 뽐냈다.
“고작 인간 애송이 주제에 이 몸의 마력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끌끌…… 우습군, 우스워.”
느릿한 조롱에 카델이 입술을 깨물었다.
미리 염두에 둔 것처럼, 에르고의 성격은 신중하면서도 치밀했다. 그는 보통의 적들과 다르다.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이 넘치면서도 절대 자만하지 않는다. 상대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공격하는지, 적의 전술을 다방면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파악한 경우의 수만큼 다양한 대비를 해 두고 있다는 것.
‘……얼마나 오래 붙들어 둘 수 있을지 모르겠군.’
고작 몇 가지 공략법을 아는 것만으론 압도적인 우세를 점할 수 없는 적이었다. 지금껏 빙의자의 특권을 이용해 싸워 왔던 카델에게는, 버거운 상대임이 틀림없다.
꾸루루루룩.
손이 움직였다. 쫙 펼쳐진 손바닥이 정확히 카델과 라이돈이 있는 방향을 향해 추락했다. 육중한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위협적인 스피드. 순식간에 그들의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사적으로 라이돈의 손목을 낚아챈 카델이 그림자의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점액이 그들을 감싼 장막 위를 거칠게 두드렸다.
“아하하! 달려, 달려!”
자칫하다간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신난 라이돈은 잡힌 손목을 쑥 빼내더니, 그대로 카델의 등을 떠밀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터무니없이 거대한 그림자를 벗어나긴 힘들어 보였다. 장막이 충격을 버텨 줄지도 미지수.
이를 악문 카델이 뜀박질에 속도를 높이며 [바람의 길]을 시전했다. 돌연 강풍이 둘을 감싸는 동시에, 지면과 맞닿은 손바닥이 카델의 머리통을 짓누르듯 스쳤다.
“와악!”
“하하! 스릴 있어!”
고작 한 뼘 차이었다. 라이돈과 함께 바닥을 나뒹군 카델이 땅을 울리는 묵직한 진동을 따라 진저리 쳤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손바닥이 충격에 퍼진 형태를 재정비하며 꾸물거리고 있었다.
질겁한 카델이 곧장 몸을 일으키자, 그런 그를 향해 에르고가 말했다.
“도망칠 기회는 끝났다. 널 죽이고 요정을 차지해 주지. 바삭한 날개를 베어 물고, 고소한 췌장을 음미……. 수백 년 전의 만찬이 떠오르는구나. 배가…… 배가 고프군…….”
변태처럼 혀를 쭉 내민 에르고가 본인의 지저분한 팔뚝을 핥아 올리는 장면을 목격한 카델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하는 행동이나 말이나, 전부 역겹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대놓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카델의 옆에서, 즐거움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던 라이돈의 입가가 짧게 경련했다. 잠시 조용히 눈을 굴리던 라이돈. 그가 어울리지 않게 신중한 얼굴로 침음하더니 이내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죽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