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돈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듣지 못했으나, 분명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거라고 카델은 확신했다. 그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라이돈을 우렁차게 재촉했다.
“라이돈! 피하라니까!”
거대한 손바닥이 다시금 하늘 높이 치솟았다. 카델은 손바닥을 향해 화염구를 퍼부으며 라이돈을 불러 젖혔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는 아무리 밀고 당겨도 꼼짝 않고 양손을 합장한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바빴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은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에르고를 담아내고 있다. 라이돈은 에르고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쪽을 전혀 살피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그 많은 화염구를 맞고도 건재하기만 한 손바닥. 빠르게 메워지는 폭발의 구멍을 발견한 카델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늪이 있는 한 저건 절대 무너지지 않아. ……여기선 한번 맡겨 보는 수밖에 없나. 처음 저 자세를 취했을 때도 [대동토] 같은 빌어먹을 스킬을 사용했으니까.’
능력이 봉인되었다 해도 S급은 S급.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전투다. 이대로 도망칠 게 아니라면, 최소한의 도움은 받아야겠지.
셈을 마친 카델이 차분히 숨을 골랐다. 사용한 마법의 갯수에 비해 마력은 아직도 넉넉하다. 다속성 마력을 이용한 복잡한 술식. 그리고 7성이라는 새로운 경지. 환혹의 숲에서처럼 이성을 잃지만 않는다면, 이변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잊어선 안 된다. 이 싸움의 승기는, 마지막까지 상대의 수를 관철한 자가 움켜쥐게 될 테니.
꾸룩. 꾸르륵.
거대 손이 움직임을 재개했다. 전봇대 같은 손가락을 구부리자 점액은 곧 주먹의 형태를 띠었다.
노리는 곳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카델과 라이돈을 향해 쇄도하는 주먹. 풍압에 밀려 떨어져 나간 점액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겁먹지 마.’
빠르게 짙어지는 그림자 속에서, 카델이 양팔을 뻗었다. 피해 봤자 또 다른 공격이 시작될 뿐이다. 생각 많은 마족을 괴롭히려면, 이쪽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부터 증명해야 했다.
‘내가 왜 풀떼기 하나 먹겠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얼마나 얕보이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거 하나 못 막아 낼 수준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했다.
쿠구구구—
카델의 앞으로 묵직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것은 용오름처럼 소용돌이치며 순식간에 몸집을 키우더니, 카델의 의지를 따라 곧 손의 형상을 띠었다.
화려하게 등장한 [화염 손]이 날아들던 점액 주먹을 틀어막았다.
“……호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르고의 눈이 작게 벌어졌다. 혼탁한 동공 위로 강렬하게 이글거리는 화염의 실루엣이 비쳤다.
“인간 애송이 주제에 꽤 하는군. 끌끌…….”
반응 속도가 기이할 정도로 뛰어나다. 이쪽은 미리 준비해 둔 마법을 차례차례 꺼내 쓰는 특수한 방식을 사용한다지만, 저 인간 애송이는 아니었다.
‘다속성의 무영창 마법사…….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겠군.’
헛짚었다 해도 상관없다. 과한 대비가 목숨에 해를 끼칠 일은 없으니.
오랜 세월을 숨죽여 살다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몸 상태가 온전치 않은 만큼, 미리 뿌려 둔 씨앗이 발아할 때까진 위험 요소를 철저히 배제해야 했다. 자신의 점액을 완벽하게 붙들어 놓은 화염을 바라보며, 에르고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어차피 인간은 인간이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는 마족을 이길 수 없는 열등한 족속. 지금은 멀쩡하다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의 만면에 비릿한 속셈이 떠올랐다. 에르고는 자신의 점액에 한 차례 마력을 불어 넣었다.
“커헉!”
불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 죽어.
머리를 울리는 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살인적인 한기가 순식간에 전신을 뒤덮어 왔다.
⚔️
에르고의 몸을 꿰뚫은 얼음 가시. 여러 갈래로 뻗친 투명한 가시 위로 보라색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아니다. 급작스레 무너져 내린 점액 손 너머, 에르고의 육체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빼곡하게 엉겨 붙은 얼음 가시를 발견한 카델이 눈살을 찌푸렸다. 육신을 뚫고 나온 것이 분명한 얼음 가시의 끄트머리에는 부위 모를 내장이 매달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아하하! 이렇게까지 마력이 많이 들어갈 줄은 몰랐는데, 봉인은 정말 번거롭네!”
눈앞의 끔찍한 참상과는 별개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활기차기만 했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샌가 영창을 끝낸 라이돈이 곱상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족 안에 마력을 심어 두는 건 처음이라 시간이 좀 걸렸어. 카델, 많이 힘들었어?”
“힘들고 자시고…… 저건 대체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남의 육체에 마력을 심어 둔다니. 그 원리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경악한 카델이 묻자, 라이돈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시혼빙극(弑魂氷棘)이라는 기술이야. 몸에 힘 빡 주고, 머리를 팽팽 돌리면 돼.”
“……그걸 설명이라고 하는 거냐?”
“아! 눈도 부릅떠야 해. 대상자를 똑바로 응시해야 하거든. 은근히 쉬워.”
이런 걸 할 수 있으면서 환혹의 숲에서는 용케 추격만 했구나. 괜스레 섬뜩해진 카델이 닭살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그사이 다시 맞은편의 에르고를 응시한 라이돈이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으음……. 역시, 봉인된 상태론 버거운가.”
카델도 그를 따라 에르고를 돌아보았다. 형태도 찾아볼 수 없이 망가진 모습. 가시 끄트머리에 걸린 오장육부가 에르고의 완벽한 죽음을 암시하는 듯했으나.
“그래도 시간은 벌었잖아. 그것만으로 충분해.”
안타깝게도, 에르고는 죽지 않았다.
「남은 시간 34 : 8 : 05」
줄곧 카델의 신경을 거스르던 시스템 창과, 여전히 에르고의 뒤편에 자리한 늪의 존재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카델은 라이돈이 만들어 낸 작품을 감상하며 차분하게 분석을 시작했다.
‘원래부터 에르고는 육두문자 생성기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밸런스가 최악이었어. 스킬의 까다로움은 물론 마족 특유의 재생력까지…… 사기적이었지.’
보통의 적이었다면 라이돈의 [시혼빙극]이라는 스킬 하나에 운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가 마족 중에서도 최상위급 재생력을 뽐내는 적이 아니었다면, 분명 이 자리에서 승부가 났을 테지.
하지만 억울하게도 에르고는 보통의 적이 아니다. 그는 살아 있다. 그래도, 그가 목숨을 위협받을 만한 치명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바뀌진 않았다.
‘이건 기회야.’
처음부터 라이돈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녀석이었다. 재생을 마친 에르고의 흥분된 감각은 라이돈에게 집중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라이돈. 환혹술을 사용할 수 있겠어?”
“으음, 뭘 보여 줬으면 하는데?”
“내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만 보여 주면 돼. 환혹의 숲에서처럼.”
“하하! 그때 진짜 재밌었지.”
“그래, 그래. 할 수 있겠어?”
라이돈은 잠시 뜸을 들이며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입술을 늘이며 고민하던 그가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저놈 눈깔이 재생되는 대로 실행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