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521)

화이트 왕국 직속 신성기사단, [황혼 기사단].

단장 ‘가르엘 몬자시’라는 인재를 선두로 수많은 전장을 휩쓸며 마물을 토벌하고 부상자의 치료까지 도맡아, 황혼 기사단은 물론 그들이 소속된 화이트 왕국까지 ‘선인들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분명 그랬었는데 말이지.’

루멘은 자신의 앞에서 말을 몰고 있는 ‘가르엘 몬자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백발과 말의 움직임을 따라 자유분방하게 흔들리는 몸짓. 한 손으로는 고삐를, 다른 한 손으로는 술병을 쥐고 벌컥벌컥 들이켜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잘 봐 줘도 여느 귀족가의 망나니다.

느려 터진 단장을 필두로 하니 자연스럽게 행렬도 늘어졌다. 답답함을 버티지 못한 루멘이 결국 고삐를 가볍게 내리쳤다.

가르엘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루멘을 일별하며 설렁설렁 고개를 까딱였다.

“조금 서둘러 주시죠. 설명해 드렸다시피 마을 주민들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새하얀 머리칼 아래 자리 잡은 검은 안대가 왼쪽 눈을 가리고 있었으나, 드러난 오른쪽 눈만으로도 그의 의욕 없음은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아! 그랬죠, 참. 제가 이렇게 정신이 없습니다.”

정신이 없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나태함인가. 슬쩍 들어차는 경멸을 감쪽같이 숨긴 루멘이 품위 있는 미소를 지었다. 마주 웃어 준 가르엘이 술병을 든 손을 뻗어 뒤편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마을이 코앞이다! 속도를 높여!”

우렁찬 대답이 귓가를 울렸다. 여기저기서 고삐를 내리치며 ‘이랴!’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루멘 또한 속도에 박차를 가하려 했으나.

“……안 달리십니까?”

정작 명령을 내린 가르엘은 술병의 입구를 입 안으로 꽂아 넣기 바빴다. 꺾인 고개 너머로 어리둥절한 시선이 닿아 왔다. 루멘은 자신과 가르엘을 피해 일사불란하게 이동하는 기사단을 돌아보며 도저히 숨길 수 없는 황당함을 드러냈다.

“주민들의 치료야 제 부하들만으로 충분합니다, 루멘 경. 워낙 뛰어난 인물들인지라. 솔직히 말해 저까지 동원될 필요도 없었죠.”

“아직 마을의 상태를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마족의 소행입니다. 마족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텐데, 가르엘 경의 힘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뭐……. 그럴 수도 있죠.”

벌써 다 마신 술병을 흔들며 밑바닥을 들여다보던 가르엘. 그가 씨익 웃으며 빈 병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럼 그때 불러 주세요. 전 하첼란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요.”

“……예?”

“원정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돼서, 여독이 쌓였거든요. 하첼란의 술집에 유명한 무희가 있다는 걸 아십니까, 루멘 경? 가끔 생각날 때마다 들르곤 하는데…… 역시, 춤을 잘 추는 만큼 유연해서 말이죠. 여러 자세가 가능하니 잠자리가 즐거워요.”

루멘은 체면을 내려 두고 잠시 자신의 귀를 파 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잠자리라니. 그게 무려 ‘신성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이란 말인가. 사실 못 본 새 신성기사단의 방침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루멘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이, 가르엘은 왼쪽 눈을 가린 안대의 위치를 바로잡으며 말을 멈췄다.

“그럼, 급한 일이 생기면 하첼란 마을로 부하를 보내 주십쇼. 그 외 잡다한 일은 부단장인 모들렌을 마음껏 부려 주시길.”

그러고는 바스킨 마을의 반대편으로 휙 말머리를 돌리더니, 힘차게 고삐를 내리쳤다. 조금 전의 늦장이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멀어지는 가르엘의 뒷모습에, 루멘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

바스킨 마을.

먼저 도착한 황혼 기사단은 그룹을 나누어 생존자들의 치유와 마을의 탐색을 맡았다. 그 조직적인 움직임을 지켜보던 루멘의 시선이 돌아갔다.

“대장이 먼저 움직였다고?”

대강의 사정을 설명한 반이 짐가방을 둘러멨다.

“라이돈과 함께 가셨어. 지원군이 왔으니 우리도 바로 합류하는 게 좋겠지.”

“위치는?”

“이게 알려 줄 거다.”

반의 약지가 자랑스럽게 올라갔다. 욕을 연상케 하는 손동작에 미간을 찌푸리던 루멘이 뒤늦게 반지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게 뭔데?”

“단장과 나의 커플링이다.”

“……뭐?”

“운명의 붉은실이 서로의 위치를 알려 주지. 실의 떨림으로 상대방의 상태도 알아볼 수 있다고 하니, 여러모로 완벽한 커플―”

“아, 평범한 아티팩트인가. 유용한 걸 손에 얻었군, 대장.”

반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가볍게 무시한 루멘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반은 사나운 눈빛으로 루멘을 노려보았다.

“커플링이다.”

“커플링은 커플이 껴야 커플링이고. 굳이 따지자면 그건 부하링이지.”

“흥, 부하도 아닌 놈은 부하링도 못 끼겠군. 어쨌든 이건 커플링이지만.”

그러고 보니 대장의 ‘화장실 소동’ 이후로 입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이 사건이 해결되면 다시 운을 떼어 볼까.

그리 생각한 루멘이 자꾸만 반지를 강조하는 반을 밀치며 걸음을 옮겼다.

“대기하고 있어. 함께 움직일 인원을 요청해 볼 테니까.”

가르엘은 부단장인 ‘모들렌’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고 했다. 그동안 본인은 술집에서 여자랑 놀아날 궁리나 하고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명망 높은 성기사단의 단장이 할 법한 행동은 아니었다. 사실 가짜인지도 모르지. 모종의 이유로 대역을 내세운 걸지도.

아직도 가르엘이 남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루멘이 복잡한 생각을 머금은 채 모들렌을 찾았다. 모들렌은 성실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는데, 일이 고되기 때문인지 상사가 그 모양이라서인지,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부하들과 함께 마을을 탐색하던 그가 루멘을 발견하곤 곧바로 다가왔다.

“들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하군요. 일의 원인이라는 마족의 행방에 대해선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 부분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마침 저희 대장이 마족을 추적하고 있다고 하니, 기사단이 힘을 보태 주셨으면 합니다. 추적에는 일가견이 있는 부하를 대동한 만큼 마족과 근접해 있을 거예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그럼 당장 인원을 나눠서…….”

상사와는 달리 일 처리가 빠릿빠릿한 모들렌이 즉시 추적 계획을 세우려던 때. 뒤에서부터 루멘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멘! 당장 이동해야 해!”

반이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루멘의 어깨를 낚아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한 루멘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도 전. 그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반의 반지. 카델이 건네주었다는 반지에서부터 불길한 공명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건…….”

“실이 진동하고 있어. 단장이 위험하다는 뜻이야.”

루멘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모들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상황이 급해졌습니다. 먼저 이동할 테니 모들렌 경은 이동 가능한 인원을 추려 따라붙어 주십쇼.”

“예? 그냥 같이 움직이는 편이―”

“부탁드립니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뒤를 돈 루멘이 반과 함께 말이 묶인 곳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각각 말 위에 올라타자마자 지체 없이 고삐를 내리쳤다.

잠시 멍하니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모들렌은, 뒤늦게 허둥지둥 부하들을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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