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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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혼의 결속력 약화. 회복 모드가 활성화됩니다.」

「회복 진행률: 1%」

「완료까지 남은 시간: 23시간 04분」

에르고의 독에 당해 의식을 잃은 뒤, 카델은 무의 공간에 진입했다. 육체의 손상으로 의식을 잃은 것과 잠이 드는 것은 다른지, 그는 기사들의 스토리를 감상하는 대신 똑같은 시스템 창만 주야장천 들여다보고 있어야 했다.

“회복 진행 속도 미쳤냐? 1시간에 1프로?”

100퍼센트를 채울 때까지 아무것도 없는 칠흑의 공간에 우두커니 앉아 줄어드는 시간만 멍하니 지켜보고 있으란 말인가? 분명 정신병이 올 거다.

부당한 일이라며 숨 쉬듯 욕을 해 대던 카델이 벌떡 일어섰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하루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져 있어야 한다니. 그럼 라이돈은? 바스킨 마을 주민은?’

손톱을 깨물며 서성거리던 카델은 곧 운동을 해 보기로 결정했다. 무의식 속에서의 운동이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았다. 윗몸 일으키기를 시작하자, 확실히 근육이 땅기는 느낌이 들었다.

‘에르고는 분명 라이돈을 데려갔을 거야. ……설마 먹어 버린 건 아니겠지? 아냐, 그럴 리 없어. 비록 마지막으로 본 라이돈의 상태가 그 모양이긴 했지만……. 그 녀석이 가만히 있을 린 없지. 불길한 생각은 하지 말자.’

다섯 번을 하니 힘이 들어 자세를 바꿨다. 이어서 팔 굽혀 펴기를 시도하는 카델의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대로 24시간이 몽땅 지난다고 하면, 메인 퀘스트의 제한 시간은 10시간 정도가 남아. 그 안에 라이돈을 구하고 에르고를 처치하는 게 가능한가? 이쪽은 마족의 냄새를 감지할 수 있는 라이돈을 빼앗겼어. 추적에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쓰일지…….’

여섯 번의 왕복 운동을 마치니 팔에 힘이 안 들어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카델이 털썩 드러누웠다. 무의식인 주제에 숨이 찼다.

“아…… 진짜 어떡하냐…….”

새까만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얼굴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전의가 희미해질 정도로 강력한 막막함이 정신을 지배했다.

“라이돈.”

맥없이 부른 이름에 죄책감이 일렁였다.

눈을 감싸며 쓰러지던 라이돈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무리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실패할 계획 세우기에 급급했던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쯤 어떤 심한 일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친 눈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면 어떡하나. 가뜩이나 몸집도 작아진 상태인데, 에르고에게 이렇다 할 반항이나 해 볼 수 있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전투 도중에라도 본체로 돌려줄걸.

꼬리에 꼬리를 무는 후회에 기분은 더욱 저조해졌다. 늘어뜨린 팔다리를 마구잡이로 흔들어댄 카델이 악을 쓰며 일어났다.

“미치겠네! 진짜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해?”

회복 속도를 올릴 방법은 없는 걸까? 조급한 시선이 무저갱과 다를 바 없는 절망의 풍경을 휙휙 둘러보고, 이곳이 정말 완벽한 ‘무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그 순간.

「외부의 개입이 감지되었습니다.」

「회복 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연속적으로 떠오르는 시스템 창과 함께, 고작 1%에 불과했던 회복 진행률이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으으…….”

카델은 꾸물꾸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린 시야를 몇 번 깜빡이자, 어딘가의 낯선 천장이 보였다. 몸을 감싸는 부드럽고 포근한 온기도 느껴졌다.

‘침대……? 아, 그래. 지원군이 왔나 보네.’

바닥에 쓰러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뒤따라온 지원군이 이쪽을 발견했다는 소리다. 라이돈도 발견했을까? 에르고는?

눈을 뜨기가 무섭게 여러 생각이 휘몰아쳤다. 알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카델은 늘어진 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키려 노력했다. 급한 마음과 달리 맥없는 몸은 흐물거리며 곧장 쓰러져 버렸지만.

다시 침대 위로 엎어진 그가 인상을 구긴 순간이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방 안에서, 생경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일단은 회복 중이니까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도 전. 카델이 누운 침대가 작게 출렁였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시선의 끝에 낯선 인영이 걸렸다.

“당신은…….”

“화이트 왕국에서 온 지원군입니다. 편하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 둘까요?”

한 사내가 카델이 누운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곱슬기가 도는 눈부신 백발, 나른한 분위기를 띠는 눈매, 짙고 어두운 보라색 눈동자. 굴곡 없이 높게 뻗은 콧대와 매끈한 피부가 색소 엷은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그가 카델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왼쪽 눈을 가린 검은색 안대가 드러났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색정적인 기운이 물씬 풍기는 사내였다. 잠시 그 훤칠한 미모에 시선을 빼앗겼던 카델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다급한 시선이 남자의 새하얀 머리칼과 그 아래의 밋밋한 안대를 번갈아 살폈다. 그리고.

‘우왁! 가르엘 몬자시잖아!’

내적 비명을 내질렀다. 가르엘이라니. 루멘이 가르엘을 데려오는 것에 성공했단 말인가. 반쯤 잊고 있었기에 더욱 반가운 만남이었다. 카델은 당장이라도 가르엘에게 달려들어 추근거리고 싶은 충동을 인내하며,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절 치료해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뭘요.”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한 가르엘이 들고 있던 술병을 입술 위에 갖다 댔다. 치켜든 고개 아래 묘한 시선이 카델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르엘은 카델을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그대로 술을 마셨다. 기울어지는 술병을 따라 크게 오르내리는 목울대와 날렵한 턱선이 도드라졌다.

한 번에 술 반병을 비워 낸 그가 손등으로 가볍게 입가를 훔치며 물었다.

“루멘 경과는 무슨 사이죠?”

“……예?”

“둘이 뭐 하는 사이냐고요.”

뭐 하는 사이냐니. 임시 대장과 임시 부하인 사이? 함께 싸우는 사이? 일단은 협력 관계?

카델이 신중하게 말을 고르며 망설이는 사이, 가르엘은 샐쭉한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 사이에 병의 입구를 끼웠다. 입술을 벌려 툭 튀어나온 병의 입구를 한입에 삼킨 그가 기다란 입구를 진득하게 빨아 올리며 카델을 응시했다. 자신을 향한 야릇한 시선을 발견한 카델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뭐야. 지금 뭐 한 거야.’

잘못 봤나? 방금…방금 뭔가가 지나갔는데. 봐선 안 될 무언가를 본 것 같은데.

혼란에 빠진 카델을 대신해 혀끝을 세운 가르엘이 입구를 툭 건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거 해 주는 사인가?”

“뭐…… 예? 무슨, 뭐라고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지금 설마, 자신과 루멘이 ‘서로 빨아 주는 사이’냐고 묻고 있는 걸까? 뭘 빠는 거냐는 의문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카델은 난생처음 겪는 종류의 치욕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르엘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건만. 가르엘은 만나자마자 거대한 엿을 주었다.

본능적으로 이마를 짚은 카델이 잠시 숨을 골랐다. 침착하지 않으면 살인이 날 것 같았다.

“왜 그런 오해를…… 하셨는진 모르겠지만.”

어떤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떨리지 않던 목소리가 다 떨렸다. 카델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가르엘과 눈을 맞췄다.

“절 살려 주셨으니 한 번은 봐드리죠. 두 번은 없습니다.”

“이런. 아니었나 보군요. 그럼 두 분은 어떤 관계인가요?”

“단장과 단원 사입니다. 또 오해하실까 봐 미리 덧붙이자면, 제가 용병단장이고요.”

“용병단장…….”

이번엔 가르엘의 눈이 커졌다. 대놓고 놀라는 모습이 무례하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카델은 그러려니 했다. 다른 부하들보다 몸집이 작은 데다 동안이기까지 하니, 통상적인 우두머리의 느낌은 나지 않을 거다.

가르엘은 ‘단장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는데’ 따위의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다, 이내 다시 술을 들이켰다.

‘무슨 술을 물처럼 마셔 대냐. ……하긴. 가르엘 자체가 그런 설정이긴 했지.’

타락 성기사, 가르엘 몬자시.

그가 이 꼴이 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타락한 성직자 그 자체일 뿐. 알코올 중독에 신에게 바쳐야 할 순결을 여기저기 푼돈처럼 뿌려 대는 난봉꾼에 불과하다.

이런 망나니가 아직까지 왕국의 직속 성기사단 단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건, 오로지 뛰어난 능력 하나 덕분이었다. 그를 대신할 인재가 전혀 없으니. 모르는 척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다.

‘됐어. 어차피 가르엘 영입은 기사단 승격 후에나 가능하니까. 지금은 얼굴을 터놓은 걸로 만족하자.’

이상한 소릴 들었더니 호감을 쌓을 의욕도 사라졌다. 짧게 입맛을 다신 카델이 다 마신 술병을 바닥에 던져 놓는 가르엘에게 물었다.

“마족 추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마지막으로 마족을 상대한 제가 쓰러지는 바람에 행적을 찾기가 힘들 텐데.”

카델은 슬쩍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 창을 곁눈질했다. 가르엘의 치유술 덕분에 24시간을 꼬박 채우진 않아도 되었지만, 역시 상당한 시간이 지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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