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아아아—
순식간에 하늘을 흠뻑 적신 눈부신 섬광. 한 줄기로 응축되었던 빛이 폭발하며 상공의 와이번을 뒤덮었다.
대섬광포에 휩쓸린 와이번의 몸체가 빠르게 분해되며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천하를 물들인 빛.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바스러진 와이번은 물론, 지상의 적군 또한 차단당한 시야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시야를 회복하고 공격을 재개하라! 대섬광포 재장전!”
마법으로 빠르게 시야를 되찾은 황혼 기사단은 곧장 반격을 시도했다. 허둥지둥 흩어지는 마물을 처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쇄도하는 검기가 한바탕 전장을 휩쓸고. 거두어진 섬광을 따라 드러난 푸른 하늘에서, 더 이상 와이번 무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범위를 피한 열댓 마리의 와이번만이 저 멀찍이서 겁에 질린 날개를 퍼덕일 뿐.
“대섬광포! 북서의 오우거 무리를 조준하라!”
마물의 단순 무력은 높지 않다. 그 수가 문제인 만큼, 대섬광포의 위력을 조절하며 최대 횟수를 끌어 쓴다면 지옥의 해일처럼 몰려드는 마물 군단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
그리 판단한 모들렌이 다시금 목소리를 높인 순간이었다.
크어어어—!
마물 군단의 뒤편에서부터, 무언가 거대한 것이 돌진해 왔다. 아군의 피해를 무시하며 무차별적으로 진격하는 거대한 그림자.
그것의 정체를 파악한 모들렌의 표정이 경직됐다.
⚔️
장막의 북쪽 방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른침을 삼킨 카델이 손 위로 마력을 응축시켰다. 고맙게도, 황혼 기사단은 예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버텨 주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진 장막을 유지해 줄게. 죽을 각오로 싸우되, 절대 죽지는 마라.”
그들의 수고를 헛되이 할 수 없다. 각각의 인원을 감싸는 바람결. 용병단의 기세가 비장해졌다.
반은 대검을 바로 쥐며 전방으로 나섰다. 붉은 눈동자가 균열이 번지는 장막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곧이어 빠르게 부서진 장막의 틈을 뚫고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주먹 하나.
“……자이언트 트롤이군요.”
장막을 꿰뚫은 주먹이 그대로 장막을 들추듯 위를 향했다. 막힘없이 올라가는 주먹의 아래로 장막의 파편들이 떨어지고. ‘자이언트 트롤’이 만들어 낸 구멍 사이로, 기사단이 해치우지 못한 마물들이 쏟아지듯 몰려들기 시작했다.
본능적인 시선이 빠르게 마물 군단을 살폈다. 다행히도, 언데드는 보이지 않았다.
“부탁한다, 반.”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응답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반이 그대로 정면을 향해 쇄도했다.
곧 반의 존재를 발견한 고블린들이 날카로운 함성을 내지르며 뛰어올랐다. 난잡한 공격을 매끄럽게 피해 낸 그가 곧장 검기를 날렸다. 고블린 무리를 횡으로 가르는 붉은 잔상. 뒤이어 핏물이 솟구치며 동강 난 몸체가 추락했다.
거리낌 없이 고블린의 피를 뒤집어쓴 반의 안광이 번뜩였다.
[혈류검(血流劍)]
범람하며 휘몰아치는 붉은 오라 속에서, 반의 움직임은 매분 매초 진화했다.
‘아주 날아다니네.’
최전방에서 마물을 도륙하는 반을 지켜본 카델의 감상이었다. 여태껏 대량의 피를 통해 능력을 각성하는 ‘광전사’가 활약할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카델이 자신의 부하가 제대로 힘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아쉬워했던 만큼, 반 역시 활약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촤악!
하늘을 가른 검기가 화염을 토해 내던 와이번의 머리통을 절단했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핏물을 머금은 오라가 환호하듯 몸집을 불렸다. 검날의 색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시뻘겋게 물든 대검이 진동하고, 반의 눈 위로 야성에 가까운 거친 기운이 스쳤다.
혈류검이 진화할수록, 그의 이성은 서서히 살육의 본능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들끓는 충동을 억누르듯 꽉 다문 잇새로 새어 나오는 낮은 목울림.
그의 손목에서는 과거 카델이 선물해 준 [안식의 팔찌]가 계속해서 마력을 방출하고 있었다. [안식의 팔찌]는 착용자의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아티팩트. 선물받은 뒤 처음으로 작동하는 만큼, 팔찌의 마력은 현재의 반이 ‘제대로 된 광전사’의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단장 앞엔 한 마리도 못 보내.”
대검의 날을 바로 세운 그가 뻥 뚫린 장막의 구멍을 주시했다. 큼직한 틈을 타고 끝없이 몰려드는 마물. 붉어진 눈동자 위로 희미한 기대감과 짙은 살기가 깃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반의 대검에서부터 수십 갈래의 오라가 뻗쳐 나갔다.
혈검술 제1식. 가시.
전방을 집어삼키듯 펼쳐진 오라의 가닥을 촘촘하게 채운 날카로운 가시. 오라의 자유분방한 움직임은 이렇다 할 목표물이 없었고, 그렇기에 더욱 무차별적으로 눈앞의 적들을 공격했다.
콰드드득!
여러 갈래의 오라는 걸려드는 적을 재빠르게 포박했고, 조임을 따라 촘촘한 가시가 몸체를 파고들었다. 적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한 오라는 새어 나온 핏물을 흡수한 채 몸집을 불려, 또 한 번 두 갈래로 나뉘었다.
적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이 밀집하면 밀집할수록. [가시]의 범위와 위력은 커져만 갔다. 순식간에 일대를 뒤덮은 오라가 마치 거대한 거미줄처럼 마물을 끌어들여 섬멸하고 있었다.
“더 많은 피를…….”
그렇게 [가시]의 힘이 강력해짐에 따라, 반의 정신력도 빠르게 소모되었다. 붉은 기운이 탁해지며 서서히 검어지는 오라가 그를 증명했다.
하지만 반은 [혈류검]을 해제하지 않았다. 그는 용병단 내에서 섬멸전에 가장 뛰어난 인물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제대로 적을 처리하지 않으면 남은 것은 전부 카델의 몫이라는 것 또한 잘 알았다.
지금껏 제대로 된 도움 한 번 주지 못했다. 마녀와의 전투에서도, 환혹의 숲에서도. 그러니 단장이 자신을 믿고 선두를 양보한 지금이야말로 믿음에 대한 보답의 순간이었다.
콰득. 콰드득.
한 번에 고블린 열 마리를 해치운 반의 가시가 장막의 구멍을 향해 쇄도했다. 막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마물 무리는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들어오는 족족 먹어 치워 혈류검을 최대로 개방한다. 그다음엔…….’
점점 어렴풋해지는 의식 속에서 빠르게 계획을 세운 반이 대검을 힘껏 휘둘렀다. 궤도를 따라 휘어지는 가시들이 장막을 파고드는 마물을 둘러싸고, 그대로 놈들을 휘어잡으려던 바로 그때.
쿠오오오—!
갑작스레 등장한 무언가가 먼저 마물을 낚아챘다.
“……?”
매섭게 일그러진 눈 안으로 자이언트 트롤의 큼직한 손아귀가 들어찼다. 장막의 틈새로 팔을 욱여넣은 자이언트 트롤이 반의 오라보다 먼저 마물 무리를 낚아챈 것이다.
짧게 혀를 찬 그가 다시금 가시를 휘둘러 자이언트 트롤의 팔뚝을 휘감았으나, 녀석은 괴상한 포효와 함께 오라를 뜯어냈다.
“보호하려는 건가.”
마물이 마물을, 그것도 다른 종족인 마물을 보호한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이것 또한 그 마족의 힘이란 말인가.
반은 [가시]의 해제를 택했다. 자이언트 트롤의 팔뚝을 통째로 베어 낼 만한 강한 검기를 응축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채 검기를 완성하기도 전.
쿠구구구—
장막을 찢어 내며 등장한 자이언트 트롤의 나머지 팔이 내부로 몸을 욱여넣었다.
‘……뭘 하려는 거지?’
그 모습을 본 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자이언트 트롤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처음엔 아군을 보호하려는 줄 알았으나, 녀석은 마물을 장막 밖으로 빼내거나 안전하게 움켜쥐는 대신, 마물이 든 손바닥을 쫙 펼쳐 놓았다.
그 안에 모인 마물은 범상치 않은 높이에 뛰어내리지도 못한 채 발만 굴렀다. 대놓고 적에게 아군을 내어 주는 모양새.
—라고 생각했으나. 이어지는 자이언트 트롤의 움직임은, 반의 예상을 완벽하게 벗어났다.
마물을 들지 않은 나머지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손은 엄지로 중지의 손톱을 꽉 눌러 둥글게 만, 꼭 딱밤을 때리려는 것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중지의 마디를 마물이 올라간 손바닥 위에 가져다 댔다. 마치 손안의 마물을 저 멀리 튕겨 내려는 것처럼.
“무슨……!”
반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자이언트 트롤이 조준하고 있는 곳은 바로 뒤. 적린 용병단이 자리한 위치였다.
‘날 건너뛰고 아군을 용병단 쪽까지 날려 보내려는 건가? 이 거리라면 그대로 터져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을 텐데,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아니면…….’
그렇게라도 해서 아군이 용병단을 만나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가.
‘설마.’
반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루멘을 찾았다.
이 마물은 전부 에르고의 수하. 마족이 직접 만들어 낸 괴물인 만큼, 심핵의 존재를 탐지하는 능력을 갖췄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놈들의 목적은 전투가 아니다. 오로지 심핵. 심핵의 탈환만 성공한다면 얼마가 죽어 나가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야.’
그렇게 둘 순 없었다. 반의 검기가 다급하게 자이언트 트롤의 손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쾅!
한 박자 늦었다. 그의 검기는 자이언트 트롤의 중지가 뻗어 나가며 한 차례의 찢어지는 파공음이 울린 뒤에야 도착했다.
툭 떨어진 자이언트 트롤의 팔이 굉음을 만들어 냈다.
쿠오오! 쿠오오오—!
고통 때문인지 승리감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끄러운 포효. 그리고 총탄처럼 쏘아져 나가는 마물 무리.
마구잡이로 흩어진 채 하늘을 물들인 시꺼먼 마물 군단을 바라보며, 반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