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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우세했다. 반의 독주는 예상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과를 거뒀고, 이쪽은 경계를 풀지 않은 채 힘만 비축해 두면 되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힘을 끌어내는 반의 모습에, 어쩌면 마물 군단의 습격을 이대로 막아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야말로 재앙처럼 쏟아져 내리는 마물을 맞닥뜨리기 전까지만 해도.
“루멘! 더 이상 장막은 유지 못 시켜! 어떻게든 몸을 방어해!”
“이미, 필사적으로, 하고 있…어!”
연속으로 달려드는 고블린을 검집으로 후려치며, 루멘이 거친 숨을 골랐다.
불시에 쏟아져 내린 마물은 대부분이 속도와 충격을 이기지 못해 터져 죽었다. 그러나 꾸역꾸역 살아남은 마물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곧장 루멘을 노렸다. 2차로 쏟아진 마물도, 3차도, 4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3차에는 카델과 라이돈의 손발을 묶기 위해 움직인 마물이 있었으나, 여전히 루멘 쪽에 붙은 마물의 수가 압도적이었다.
‘분명해. 놈들은 루멘에게 심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냄새인가? 아니면 마력의 파동을 느끼고 있다든지.’
카델은 어떻게든 루멘을 보호해 주려 했지만, 이미 시작부터 마력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용병단 전원을 보호하는 장막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후의 계속되는 전투를 위해서라도, 마력의 배분에 신경을 써야 했다.
결국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장막을 거둔 카델은 화염구와 벼락, 돌풍을 이용해 몰아치는 마물들을 상대했다.
“끝도 없네!”
아직 반은 합류하지 못했다.
발악하며 달려드는 고블린에게 화염구를 던진 카델이 장막의 틈을 일별했다. 그곳에는 선명한 탁기가 깃든 반의 오라와, 구멍 너머로 빠져나온 자이언트 트롤의 팔뚝이 자리했다.
분명 팔뚝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다음에 보면 똑같은 장소에 똑같은 팔뚝이 빠져나와 있었다. 재생 혹은 교대. 자이언트 트롤이 몸을 재생할 수 있거나, 대체 가능한 자이언트 트롤이 무수히 많다거나. 두 가지 전제 모두 최악이었다.
아직까진 반이 최전방의 마물을 맡아 주고 있는 덕분에 용병단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마물만 상대할 수 있지만.
‘반의 오라가 너무 짙어졌어. 혈류검 상태를 무리하게 이어 가고 있는 거야.’
[안식의 팔찌]라는 아티팩트가 있다고는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른다. 만약 반이 광전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폭주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비극이었다.
‘이놈들이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상태를 보러 가는 건데……!’
여기저기 퍼진 마물의 시체가 동선을 방해하는 데다, 심핵을 가진 루멘과 임시 주둔지의 안전을 신경 쓰느라 도무지 여유가 나지 않았다.
점점 바닥나는 마력을 느낀 카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의 조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근방에서 얼음 창을 발사하던 라이돈이 목소리를 높였다.
“카델! 불의 장막 좀 만들어 볼래?”
“미안하지만 장막 유지하면서 싸울 마력은 안 남았어! 네 몸은 네가 지키라고!”
“아니, 카델 지킬 장막 말하는 건데.”
그리 말한 라이돈이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댔다.
“한 마리씩 잡으려니까 답답하잖아. 이런 송사리들은 한 번에 잡아 줘야 맛있는 건데…….”
어린 소년의 얼굴에 떠오르는 위험스러운 미소. 그의 조용한 영창을 따라, 주위에 한기가 끼치기 시작했다.
“저게 눈깔 박살 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라이돈을 감싼 범상치 않은 마력을 감지한 카델이 곧장 자신과 루멘을 감싸는 불의 장막을 생성시켰다.
라이돈의 아래로 원형의 얼음 장판이 생성됐다. 빠르게 늘어나는 범위를 따라 피어나는 한기. 위력은 줄어들었으나, 환혹의 숲에서 보았던 [대동토]와 흡사한 기술이었다.
‘여기서 대동토를 쓴다고?’
얼어붙은 바닥을 내려다본 카델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동토]는 적군의 움직임을 묶는 데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기술의 범위 안에 있는 아군 또한 다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활동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데, 라이돈의 [대동토]에 발까지 묶인다면 전투는 더더욱 불리해진다. 그리 생각한 카델이 라이돈에게 기술을 거둘 것을 명령하려 했으나.
까드드득.
무언가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지면에서부터 얕은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물의 짓인가?
긴장한 눈빛이 사위를 살피고. 그다음 순간, 카델을 감싼 불의 장막이 크게 흔들렸다.
“크윽……!”
둔탁한 충격에 몸이 흔들렸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그가 곧 충격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장막을 비껴 치며 자라난 원뿔형의 얼음 조각.
“아하하! 조심해, 카델! 이 마법, 조절이 잘 안 되거든!”
밝은 웃음소리를 따라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우후죽순 솟아나기 시작했다. 카델은 장막을 마구잡이로 두드려 대는 얼음에 밀려 나며 짜증스레 외쳤다.
“이런 거 할 거면 미리 말을 하라고!”
“흐응, 그럼 재미없잖아.”
라이돈이 전개한 마법은 원형 장판 안에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무차별적으로 솟아나는 범위기였다.
카델과 루멘은 미리 불의 장막을 두른 덕에 화를 입지 않을 수 있었으나, 그들에게로 달려들던 마물은 아니었다.
캬아악! 꾸에엑!
얼음을 피하지 못한 마물은 그대로 몸통이 꿰뚫려 하늘로 솟구쳤으며, 운 좋게 즉사를 피한 마물은 빼곡하게 들어찬 얼음 사이에 갇혀 서서히 얼어붙었다.
‘……효과는 좋네.’
자칫했으면 아군까지 휩쓸릴 뻔한 위험한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론 성공이었다. 카델은 계속해서 마력을 쏟아붓는 라이돈을 곁눈질했다.
‘오래 유지하진 못할 거야. ……이쯤에서 슬슬 멈췄으면 좋겠는데.’
절반이 된 능력치, 회복이 필요한 내상, 너무 빠른 마력의 소모. 웃는 얼굴에 가려져 있으나, 라이돈의 상태는 보기보다 훨씬 안 좋을 것이다. 계속해서 마물이 쏟아진다면 감당이 힘들어진다.
‘저 마법 덕분에 남아 있던 마물은 대부분 죽었어. 일단 마법 사용을 멈추게 하자. 언제 전투가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남은 마물은 내가 처리하고 라이돈은 힘을 아껴 두는 걸로…….’
그러나 카델이 입을 열기도 전,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다섯 번째 마물이 쏟아져 내렸다.
키에에엑!
라이돈의 장판 범위를 훨씬 웃도는 마물의 수.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인 마물의 향연은, 앞선 네 번의 활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압도적인 기운을 풍겼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델이 뒤늦게 외쳤다.
“루멘! 도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