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521)

「남은 시간 01 : 32 : 29」

기어코 라이돈을 빼앗아 간 반과 찢어져 주위를 탐색하고. 근방에 남은 마물이 한 마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카델은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사자의 강이 마을을 덮치기 전, 마물은 심핵을 노리는 대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 집중했어. 걸리적거리는 걸 없애려는 것처럼.’

본인들이 설 자리를 넓게 다지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상 행동은, ‘베이비 데빌’이 끔찍한 음파를 내지른 직후의 일이었다.

‘무언가의 신호였던 걸까.’

대체 녀석은 무슨 계획을 세웠던 걸까.

깊게 생각할수록 치미는 불안감. 직감에 가까운 그 감정은, 주둔지 바깥에 있는 루멘을 발견함과 동시에 확신이 되었다.

루멘은 장검을 빼 들어 무언가를 내리찍고 있었다. 팔이었다. 사람의 것이라곤 볼 수 없는 푸르죽죽한 팔. 그리고 그 기다란 팔과 어깨의 끝에 이어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심핵’이었다.

“루멘, 설마 그거…….”

카델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루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를 돌아보는 루멘 역시 표정이 좋지 못했다.

“슬슬 부활하려는 모양이야.”

검에 꿰뚫린 손바닥은 손끝을 까딱이며 파들거리고 있었으나,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루멘이 검날을 비틀어 상처를 헤집어도 마찬가지였다.

“베어 낼 수가 없어. 상처가 생기는 즉시 회복하는 모양이야. 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해 두는 게 최선이었어.”

“참 징그럽게도 부활하네.”

“심핵을 부수지 못한다면 이 징그러운 부활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 에르고의 부활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결국 최종적인 목표는 심핵의 파괴였다. 그 외의 돌파구는 없다.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린 카델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베이비 데빌은 에르고의 부활이 시작됐다는 걸 감지한 게 분명해. 심핵의 탈환이 힘들어질 것 같으니, 아예 부활한 에르고를 지키는 쪽으로 노선을 틀었던 건가.’

에르고가 부활하자마자 격퇴당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마물을 마을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 같다. 다행히도 반의 각성이라는 변수가 적용해 번거로운 싸움은 피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마물이 없어도 부활한 에르고를 죽여 심핵까지 파괴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되살아난 에르고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도 미지수였다. 간신히 놈을 제압한다 해도, 심핵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원점. 결국 시간이 지나 주민들은 전부 마물로 변할 것이다.

모든 싸움은 그 비극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가만히 앉아서 부활을 기다릴 수는 없지.”

“생각해 둔 방법이라도 있어?”

“……글쎄.”

애매한 대답이었다.

심핵을 부술 만한 마법이라면, 고민하는 기술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성공을 보장할 수 없기에 섣불리 실행하지 못했을 뿐. 게다가 공격의 여파로부터 주민을 지킬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카델이 머릿속을 헤집어 최선의 공략을 찾고 있던 때. 황혼 기사단을 찾으러 이동했던 가르엘이 돌아왔다. 그의 옆에서 늘어진 모들렌이 부축을 받고 있었고, 뒤편의 기사들 또한 넝마가 된 모습이었다.

“이런, 제 부하들이 이 꼴이 된 걸 따져 볼까 했더니.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엄청난 게 생겨났네요?”

가르엘의 시선이 루멘이 붙들어 둔 에르고의 팔과 심핵을 향했다. 카델은 그에게 답하는 대신, 처참한 꼴의 기사단을 훑어보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반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내진 못한 모양이었다. 마력도 체력도 고갈되었을 테니 당연하다.

반 덕분에 남아 있던 마물을 단번에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군이 맞은 날벼락까지 뻔뻔하게 넘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사과는 해 둬야겠지.’

가르엘의 반응으로 보아 사망자는 없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카델은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한 모들렌의 앞으로 다가갔다. 못 본 새에 다크서클이 한 단계 더 짙어져 있었다.

“모들렌 경.”

“무사하셨군요, 카델 경.”

“먼저 찾아가 공격을 예고해 드렸어야 했는데…… 상황이 급했던지라 주민들의 보호가 최선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사과하지 마세요. 저흰 괜찮습니다.”

모들렌이 엉망이 된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가르엘은 ‘그 얼굴로 말해 봤자 유언 같을 뿐’이라며 타박했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기사단이 막아 내지 못한 마물을 처리해 주셨잖습니까. 목숨이 아슬아슬했던 건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론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최상의 결과도 끌어냈고요.”

“그렇지만…….”

“일일이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장이시잖아요? 저희 단장님은 죽을죄를 지은 게 아니면 절대 머리를 숙이지 않으세요. 카델 경이 이렇게 정중하게 나오시면, 가르엘 단장님에 대한 제 자부심이 상처받으니까요.”

가르엘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으며 모들렌의 부축을 그만두었고, 모들렌은 크게 비틀거리면서도 기어코 중심을 잡아 냈다.

“그런데…….”

모들렌의 지친 눈빛이 심핵을 향했다. 에르고의 부활을 예감한 듯, 표정엔 서늘한 허탈감마저 떠올라 있었다.

그럴 수밖에.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그런데도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데다, 에르고는 부활을 코앞에 두고 있다.

모들렌은 심핵의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확인했다.

“……저희만으론 무리입니다.”

아무리 찌르고 베어 내도 그보다 빠르게 재생하는 팔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모들렌은 확신했다.

“안 어울리게 약한 소리를 하네, 모들렌.”

“저희 상태를 보십쇼, 단장님. 걷는 게 최선입니다. 치유술을 받는다 해도 상처를 치료하는 데서 그칠 뿐. 전투는 불가능해요.”

“그래, 우리 모들렌이 그렇게 판단한다면야. 미리 도망가 있을까?”

“단장님!”

“왜?”

의견을 따르겠다고 해도 난리네. 능청스럽게 고개를 저은 가르엘이 카델을 바라보았다. 그의 의견은 어떨지 궁금한 기색이었다.

당연하게도, 카델은 싸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가르엘 경. 화이트 왕국까지 전서조를 보내 지원군을 요청한다면, 여기 오는 데까지 대략 몇 시간 정도 걸립니까?”

“규모에 따라 다르겠죠. 최소 인원이라면 2시간 정도일 거고, 규모가 커질수록 시간은 늘어날 겁니다. ……카델 경은 남아서 싸울 생각인가 보네요?”

카델은 미간을 좁힌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최소 인원이 바스킨 마을까지 도달하는 데 약 2시간. 지원군이 시간 안에 주민을 대피시키는 걸 기대하긴 어렵겠어.’

황혼 기사단, 전투 불능. 라이돈, 전투 불능. 반 헤르도스는 경이롭게 성장했지만, 각성과 동시에 대부분의 힘을 소모했다. 루멘 역시 지옥 같은 마물의 습격을 버티며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이것저것 제외하면, 남는 것은 역시 ‘그 마법’뿐이다. 그리고 계획의 실행을 위해서는, 주민의 대피가 최우선이었다.

“지원을 요청해 주세요.”

“으음, 지원군이 오는 중에 부활이 완료될 가능성이 더 클 텐데요? 그동안 이쪽에서 마족을 붙들어 두지 못한다면, 마족 토벌보다 주민의 마물화가 더 빠를 거고요. 그럼 꼼짝없이 포위될 겁니다.”

“충분히 알고 있어요.”

카델의 눈빛에는 한 걸음의 후퇴도 용납하지 못할, 단단한 결의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지원군의 전력이 아닙니다. 주민들의 보호죠. 그러니 황혼 기사단은 용병단과 함께 주민들을 화이트 왕국 방면으로 이동시켜 주세요. 중간에서 원군과 합류하면, 그 자리에서 보호 마법을 부탁하시고요.”

“마을 바깥에서 보호 마법을 부탁하라니…….”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계획에 가르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카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카델 경 혼자 마족을 상대하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네.”

“……진심이에요?”

물론이다. 이보다 더 진심일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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