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521)

내려온 원군은 총 열다섯. 왕실 소속의 하얀 파도 기사단이었다.

하얀 파도 기사단의 단장, 돌린은 가르엘에게 간략한 상황 설명을 들은 뒤, 기사단의 마법사들을 불러 보호 마법을 전개하도록 명령했다.

“자네가 하는 말이니 일단 따르겠네만, 마을과도 멀리 떨어진 데다 주위에 마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이런 허허벌판에서 보호 마법을 펼쳐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그러게나 말이야. 나도 이해가 안 가.”

“뭐?”

“농담이야, 농담.”

눈을 부릅뜬 돌린을 향해 너털웃음을 지은 가르엘이 저들끼리 모여 보호 마법을 영창 중인 마법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영창을 따라 모든 인원을 감싸는 반투명한 은빛 장막이 생겨났고, 그 위를 덮는 몇 겹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가르엘도 몇 번 경험해 봐 아는, 하얀 파도 기사단의 보호 마법 [철의 요새]였다.

‘이 정도 마법이면 용이 떨어져도 한 번은 버틸 수 있겠군.’

과연 카델은 어떤 계획을 세운 걸까? 그의 부탁으로 유추하건대, 아마도 카델은 마을을 훨씬 웃도는 범위와 심핵을 단번에 부술 만한 위력을 가진 마법을 전개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할지, 성공할지는 알 수 없다. 카델이 범상치 않은 인재임은 분명했지만, 쉽게 시도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면 마지막까지 미루지는 않았을 터.

‘죽을까, 살까?’

개인적으로는 살아 줬으면 좋겠다만. 짧게 입맛을 다신 가르엘이 용병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둘뿐인 인원임에도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는 일도 없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스킨 마을. 카델이 있는 방향이었다.

‘말이나 걸어 볼까.’

돌린이 있어 마음껏 술을 마시기도 뭣하고. 입이 심심해진 가르엘은 루멘에게 말을 붙여 볼 심산으로 발을 뗐다.

그러나 그 순간.

범상치 않은 진동이 느껴졌다.

“돌린 단장님! 철의 요새는 완성됐습니다!”

“좋다. 어떤 공격이 쏟아지더라도 방어막을 유지하도록!”

뼛속까지 떨릴 만큼 거대한 진동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몇몇 기사는 흔들림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동료의 잔상이 보일 정도로 격한 땅울림. 1시간 같은 찰나가 지나자, 언제 진동했냐는 듯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몸이 약한 마법사들은 뒤늦게 찾아온 멀미에 입을 틀어막았고, 나머지는 이 기이한 현상의 원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가르엘은, 굳은 얼굴로 눈을 굴렸다. 진동이 말끔히 사라진 대지에는 떠오른 흙먼지가 나풀거릴 뿐이었으나. 공기 중으로 느껴지는, 이 은은한 열기. 불어오는 미풍의 온도가 심상치 않았다.

가르엘은 바닥에 주저앉은 마법사들을 향해 외쳤다.

“방어막을 강화해라! 마력을 전부 부어……!”

하지만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

쿠구구구구—

저 멀리서부터, 공간을 통째로 횡단하는 일섬이 떠올랐다. 또 다른 지평선처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뻗어진 붉은 선.

그 눈부심에 한 차례 눈을 깜빡이자, 다음 순간 그것은 하나의 점이 되어 모여들었고. 그 점은 곧 하나의 구체가 되어 부풀었다.

웅대한 화염옥. 눈을 깜빡일 때마다 세 배씩 몸집을 불려 가는 불꽃은 멀리서도 보일 만큼 선명하고도 위협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걷잡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태양처럼 찬란한 불빛은 눈을 의심하게 되는 크기를 자랑하며, 계속해서 몸집을 불렸다. 그저 압도적이었다.

그 거대한 화염옥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움푹 팬 땅이 양옆으로 밀려 나며 대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쭉쭉 갈라진 땅바닥이 높게 치솟으며 파도처럼 밀려 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철의 요새]에까지 미쳤다.

“요, 요새를…… 요새를 지켜라!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져선 안 된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마법에 얼이 빠져 있던 돌린이 다급히 외쳤다. 강대한 에너지에 휩쓸린 지면이 파괴되며 흙과 바위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화염옥에 불타지 않은 잔해들은 그대로 충격파에 휩쓸려 후방으로 날아들었다.

만약 [철의 요새]가 무너진다면, 한 명도 빠짐없이 한 줌의 재가 되리라.

장막 안의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크아아악!”

“정신 놓지 마! 버텨야 한다!”

어마어마한 충격파였다. 화염옥에서부터 비롯된 인력과 척력이 각기 다른 파괴력을 뽐내며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무너진 대지의 파편은 무차별적으로 요새를 두드렸고, 장막이 막지 못한 살벌한 열풍은 거침없이 살가죽을 달궜다. 마법사들은 그 자비 없는 공격을 버티면서도, 한 가지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대체 누가 이런 마법을 사용한단 말인가?

알지 못하는 자는 의문과 공포를 느꼈으며, 알고 있는 자는 충격과 경악에 빠졌다. 그중 가장 큰 충격에 빠진 이들은, 당연하게도 용병단이었다.

시야를 가린 폭풍 너머, 진동하는 화염옥을 지켜보는 루멘과 반. 그들은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저 불꽃 속에 있을 한 명의 남자를 떠올렸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카델이 저 폭발을 견뎌 낼 수 있는가’였다.

맹목적으로 카델을 따르는 반도, 마음 한쪽에선 언제나 카델을 인정하던 루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단장…….”

작게 중얼거린 반이 장막 위로 손을 올렸다. 카델을 믿고 싶었으나, 믿을수록 확신했다.

그는 이 공격에 사활을 걸었다. 주민이 마물로 변하는 것을, 에르고의 악행을 막기 위해. 그 결단에 본인의 안전이 포함되었을 리 없었다.

“이렇게는…… 이런 식은…….”

그곳에 단장을 혼자 남겨 둬선 안 됐다. 카델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 그의 계획만 믿고 무책임하게 등을 돌려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악몽 같은 현실에 몸이 떨렸다. 장막을 움켜쥐듯 구부린 손끝이 하얗게 질리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막힌 호흡을 들이마시던 그 순간.

“아아악!”

“안 돼……!”

그들을 보호하던 [철의 요새]가 무너졌다.

⚔️

전방을 막고 선 가르엘의 뺨이 그을렸다. 까맣게 타들어 간 살점과 가죽은 이어지는 열풍에 밀려 떨어져 나갔고, 그 안의 불그스름한 턱 근육과 치아가 드러났다. 그러나 곧 상처의 위로 짙은 자색의 마력이 스며들었다.

연기처럼 아른거리던 마력이 사라지자,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뺨이 재생됐다.

찢어지는 고통과 재생의 반복이었다. 괴로울 법도 하건만, 가르엘의 눈빛엔 이렇다 할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끌어 내린 안대 속 섬뜩한 역안만이 번들거릴 뿐.

그의 양옆으로는 자색의 마력이 날개처럼 펼쳐져 있었다. 열풍을 타고 일렁이는 마력은 종말을 알리는 세이렌의 불길한 날갯짓을 연상케 했는데, 그 날개는 오히려 종말을 맞닥뜨린 이들을 품어 내고 있었다.

‘여기서 돌린이나 부하들이 깨어나 버리면 곤란한데. 쯧, 역시 오래 살아서 좋을 게 없다니까.’

철의 요새가 파괴된 뒤, 내부의 인원은 예기치 못한 충격에 그대로 휩쓸렸다. 버티는 것도 잠시였고, 주민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게 고작이었다.

황혼 기사단과 적린 용병단은 이미 상당한 힘을 소모한 상태였으며, 하얀 파도 기사단은 보호에 실패했다. 그들은 차례차례 무너졌고, 결국 정신을 잃었다. 만약 가르엘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폭발에 휩쓸려 다시는 멀쩡히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다.

마안을 개방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선택이었으나, 누군가를 죽이면서까지 아껴 두고 싶지는 않았다. 탕아가 되었다 한들, 마안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돕고 구해 내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던 신성기사였다.

그 신념만큼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힘이네…….”

각막이 녹아내리고 재생하길 반복하며, 시야 또한 점멸하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폭발은 끝났다. 태양과도 같던 화염옥은 소멸했다. 소멸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그 충격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마기가 육체의 재생을 얼마나 더 도울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모든 충격을 막아 낼 때까지는 유지되었으면 싶었다.

그 후에는, 알아서 전부 소멸되었으면.

가르엘은 버텼고, 인내했다. 그리고 하늘은 보답했다.

천지를 울리던 진동과 열기가 사그라졌다. 여기저기 뜯겨 나갔던 얼굴 또한 멀쩡히 회복되었다. 펼친 마기를 거둔 가르엘은 묵묵히 안대를 써 자신의 흉측한 왼쪽 눈을 가렸다.

“자, 그럼…….”

슬쩍 뒤를 돈 가르엘이 여전히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훑어내렸다. 다들 목숨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결론을 내린 그는 간신히 보호 범위 내에 머물러 죽음을 피한, 하얀 파도 기사단의 백마 한 마리를 찾아냈다.

“넌 나랑 마을로 돌아가야겠다.”

겁에 질린 백마를 진정시킨 그가 그 위에 올라탔다. 폭발의 여파는 전부 막아 냈으니, 이젠 시전자의 생사를 확인하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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