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521)

라이토스의 핏줄을 이었다는 사실을 밝히자마자 내쫓긴다는 가정도 염두에 두고 있었건만. 다행히도 다닐라는 카델이 원하는 만큼 별채를 사용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가 성안에서 편안하게 묵는 것이 루멘의 청이었으니, 단박에 말을 바꿀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닐라는 카델이 정체를 밝힌 뒤 한껏 무안해하며 꺼내 든 부탁도 흔쾌히 들어주겠노라 약속했다.

‘뭐, 자국민을 구한 용병에게 그 정도는 당연한 거지만.’

확실히 업적에 비해 받은 것이 적기는 했다. 보상금도 없었고, 명검이나 아티팩트 같은 물품도 없었다. 본인 입으로 ‘제가 바라는 건 조용히 이 나라를 뜨는 것뿐입니다.’라고 했으니 더 달라고 졸라 대기도 뭣했지만, 끝까지 보상 얘기를 꺼내지 않은 다닐라도 다닐라였다.

눈독 들이던 인재가 제국의 역적이었으니 좋게 대하기 싫은 건 이해한다만, 그래도 치사했다.

‘됐어. 기사단 승격이 코앞이야. 때가 되면 돈도 다 모이게 되어 있다고.’

카델은 펄펄 끓는 물욕을 다스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대로 별채에 돌아가 라이돈에게 마력을 주입받은 뒤, 반을 찾아가 볼 계획이었다. 상태도 확인하고 싶고, 곧 성을 떠날 예정이니 미리 준비해 두라고 일러둬야 했다.

그리 생각하며 코너를 도는데, 불쑥 튀어나온 누군가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부딪히기 전에 가까스로 걸음을 멈춘 카델이 놀란 얼굴을 치켜들었다.

“……가르엘 경?”

“어딜 그리 바삐 가십니까?”

가르엘 몬자시. 기회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납치하고픈 남의 기사였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반반한 낯짝 위로 반가운 기색이 스쳤다.

“객실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음, 이 방향이라면…… 국왕 폐하를 만났군요?”

“예, 뭐.”

“대하기 까다로운 분이죠? 말장난을 좋아하셔서, 조금만 방심해도 휘둘리기 십상입니다.”

사실이었다. 다닐라는 빠져나갈 기회만 노리며 적당히 대꾸하는 카델의 말끝마다 집요하게 꼬투리를 잡아 그를 놀려 대기 바빴다. 먹지 못할 떡임이 아쉬워 더 그랬는지도.

카델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가르엘은 이해한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어떻게 되다뇨?”

“폐하께서 카델 경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시던데. 인재를 탐내시는 데 반해 인복은 없어서, 재능 있는 청년을 보면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어 하시거든요. 이야기가 잘되었다면 경에 대한 제 호칭이 훨씬 자연스러워질 수 있겠군요?”

출신 불명의 용병에게 기사인 가르엘이 일일이 ‘경’을 붙이며 존칭을 쓸 필요는 없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저 카델을 자신과 동등한 실력자라고 인정하기 때문일 뿐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카델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좋은 제안을 해 주셨지만, 거절했습니다. 제가 바라던 게 아니었거든요.”

“이런, 의외군요. 그럼 지금부터는…….”

“다닐라 폐하께서 미스틱 공국으로 떠나는 무역선의 탑승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며칠 뒤에 출발할 예정이니,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죠.”

“그렇군요.”

한 톨의 미련도 찾아볼 수 없는 시원스러운 대답에 가르엘이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이상하게도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취향인 얼굴의 남자가 정 붙일 새도 없이 떠나 버린다는 소식을 들어서일까. 자신과 그를 잇는 운명의 끈이 생각보다 짧았다는 것이 실망스럽기 때문일지도.

카델이 이런 찝찝한 속내를 알 리는 없다. 하지만 그는 처음 봤을 때부터 늘상 그랬듯, 자신의 비밀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사람처럼 여유롭게 굴었다.

“다음엔 화이트 왕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겠네요.”

“……글쎄요. 전 의외로 나돌아 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그런가요? 하지만, 느낌이란 게 있잖아요. 영영 작별은 아닐 것 같은, 그런 느낌. 전 꽤 촉이 좋은 편이니 한번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걸요.”

카델은 제법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를 보는 가르엘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이것이 빈말이든 아니든, 이 흥미로운 남자의 직감이 옳기를 바랐다.

“그때가 오면 단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죠?”

“경도 참 끈질기네요. ……뭐, 안 될 건 없겠죠. 이상한 헛소리만 늘어놓지 않는다면, 술 한잔 정도는 괜찮습니다.”

“시원해서 좋네요. 그럼 그때까지 잘 살아남아 보죠.”

교차된 시선은 서로를 피하지 않았고, 우스운 농담도 더는 오가지 않았다. 시답잖은 인상을 남기는 대신, 앞으로 흘러갈 막연한 시간 동안 카델을 잊지 않도록. 가르엘은 짙은 자색의 눈 위로 그의 말간 얼굴과 올곧은 눈빛을 깊게 새겨 두었다.

⚔️

객실에 있어야 할 라이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또 멋대로 빠져나가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이 넓은 왕성에서 한 뼘만 한 요정을 수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카델은 다음 순서였던 반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마차를 타고 두 시간 정도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바스킨 마을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는 보호소. 신전 근처에 자리 잡은 이곳은 우려와 달리 멀쩡한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끄러운 음성들이 뒤섞여 들렸다.

“형아! 목마 또 태워 줘!”

“아이고, 팔에 힘이……. 청년, 이것 좀 대신 들어 주겠어?”

“반 씨, 여기 보고 한 번만 웃어 줘요! ……봤지, 봤지? 이러면 노려본다니까? 잘생겼어!”

혼잡하게 뒤섞인 주민들이 보호소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중심에는 반이 있었다. 그는 주민들의 편의를 봐 달라는 카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는데, 너무 충실한 나머지 그들의 일원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카델은 복작거리는 내부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아무래도 한 짓이 있는지라―마을을 통째로 불태운 탓에 땅을 고르는 데만 몇 개월이 걸릴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되도록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 누군가 카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형……?”

작은 남자아이였다. 멈칫하며 돌아본 카델이 뒤늦게 아이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피넷? 피넷이구나! 몸은 좀 괜찮아?”

피넷은 그가 바스킨 마을에서 처음 발견했던 피해자였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송장처럼 말라비틀어져 있던 몸은 어느 정도 생기가 돌았고, 살집도 붙었다.

피넷은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을 잃은 충격이 컸을 텐데도 최선을 다해 회복하고 있는 듯했다.

“건강해서 다행이야. ……그, 마을이 그렇게 돼서 속상하지? 미안해. 집이 그리울 텐데.”

“하나도 안 속상해요! 형이 모두를 구해 준 거잖아요.”

“응……? 아냐, 아냐. 다른 사람들하고 힘을 합쳐서 해치운 거지. 난 별거 안 했어.”

“하지만 반 형은 카델 형이 전부 다 무찔렀다고 했는걸요?”

카델이 작게 탄식했다. 반 녀석, 당사자가 없다고 마음대로 이야기를 부풀려 퍼뜨린 모양이었다.

사실도 아닌 무용담으로 어린아이의 순수한 존경을 받는 것은 양심상 참을 수 없었다. 때문에 카델은 즉시 사실을 정정해 주려 했으나, 문득 언제부턴가 주위가 고요해졌음을 깨달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불안한 낯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호소 안의 모두가 그를 주시하고 있는 소름 끼치는 광경이 드러났다.

“저 사람이 카델……?”

“진짜야? 진짜 카델이야?”

조그맣게 시작된 웅성거림은, 이어지는 반의 부름에 확 볼륨을 높였다.

“단장!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저 남자가 정말 마족을 해치웠다고? 저렇게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저 청년이 생명의 은인이구만!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작자가 저자란 말이지? 이봐, 목숨 연명해 놓고 그런 소리 말게.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탄성이 주위를 흥분으로 물들였다. 카델은 다가온 반의 앞에 숨듯이 몸을 밀착시킨 채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야, 넌 대체 나를 뭐라고 설명한 거야? 왜 다들 저렇게 반응이 격하냐고!”

“네? 당연히 바스킨 마을의 구원자이자 화이트 왕국을 수호한 희대의 대영웅이라고 설명했죠.”

“뭐? 미쳤어?”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어쩐지, 마을 불태운 사람을 보는 것치곤 달라붙는 시선이 이상하게 반짝거리더라니.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더 있다간 수치스러움에 혀라도 깨물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바람은, 대뜸 등장한 한 남자의 외침에 그대로 가루가 되었다.

“다들 멀찍이 서서 뭐 하고 있어요? 화이트 왕국을 구한 대영웅님이 직접 행차하셨는데! 어서 감사를 전해야죠!”

“맞네, 맞아! 자 자, 영웅님,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건 없어도, 이 벅찬 마음만큼은 꼭 보여 드려야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한번 시작된 흥분은 거침없이 기세를 타서, 사람들은 ‘단장을 함부로 만지지 마!’라며 끼어드는 반의 저지도 무시한 채 카델을 끌고 갔다.

그리고 카델은,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 갇힌 채 자신이 한 일은 물론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 마구잡이로 칭찬을 받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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