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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벗어났어…….’
손상된 양심을 끌어안고 겨우겨우 칭찬 감옥을 빠져나오니, 밖은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단장, 많이 지치셨죠? 죄송해요. 차마 다친 일반인을 던질 수가 없어서…….”
“다친 일반인이 아니더라도 던지지 마…….”
하지만 자꾸 단장한테 손을 대잖아요. 중얼거린 반이 푹 고개를 수그렸다. 카델이 시달린 것이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뭐, 아예 탓이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
작게 한숨을 내쉰 카델이 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괜히 기죽지 마. 하지도 않은 일로 칭찬받는 건 찝찝하지만, 그래도 욕먹는 것보단 낫지.”
“세상에 단장을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감히 그런 불경한 짓을 시도한다면 제가 전부 처리할 테니까요.”
“뭘 처리한다는 거야……. 됐고, 오늘은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온 거야.”
쓰다듬던 손길을 거둔 카델이 앞으로의 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계획을 전해 들은 반의 얼굴 위로 기대감이 번졌다.
“미스틱 공국에 가는 건 처음이네요.”
“다들 마찬가지일걸? 미스틱 공국에 있는 ‘피의 사막’에 가야 하니까, 모험 준비도 할 겸 근처에 묵으면서 내 마력이 돌아오는 걸 기다릴 생각이야. 언제 힘을 되찾을지 모르니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어.”
“상관없어요. 어딜 가든 단장만 있으면 돼요.”
반은 항상 이랬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다정했고,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소를 매번 비밀스럽게 안겨 주었다. 자신에게만 집중되는 편애를 실감할 때마다 종종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카델은 조금 눈이 부신 것 같은 반의 미소에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너 오늘도 밖에서 잘 거야?”
“네? 아…… 네. 그럴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숙박비 줄 테니까 좋은 여관 찾아서 자. 괜히 몸 고생 하지 말고.”
“저…… 단장.”
주섬주섬 돈주머니를 꺼내 드는데, 반의 손길이 그를 가로막았다.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반이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카델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성에서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안 좋은 일은 무슨.”
“있는 것 같은데.”
티가 났을 리는 없다. 돌아다니는 내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으니까.
움켜쥔 돈주머니에 주름이 졌다.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걱정스런 눈길에 애써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라이돈이 제 실력을 되찾는다면 더 이상 내 도움은 필요 없을 거야. 그러니…… 거길 마지막으로, 난 용병단을 나가겠어.’
루멘의 결정이었다. 반이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고, 그가 일일이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랬지만.
“오늘 성에서 자면 안 돼?”
“네?”
정말 한심하게도, 반의 충성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믿음을 느끼고 싶었다. 반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끈끈한 결속감이, 이번에는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기를.
네가 죽도록 싫어하는 귀족의 소굴이라도, 내가 바란다면 기꺼이 함께할 수 있어? 어디든 나만 있다면 좋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야?
놀라울 정도로 유치하고 덜떨어진 시험이었다. 반은 이미 질리도록 충성을 증명했다. 여기서 더 증명할 게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 대체 뭘 더 바라기에.
한심스러워하면서도 내심 대답을 기다리는 스스로의 미련함에 치가 떨렸다.
“……물론이죠. 단장이 원한다면 갈게요. 그런데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아요? 설마 누가 뭐라고 했어요? 용병이라고 무시해요?”
카델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본인이 치졸하기 짝이 없는 덫에 걸려들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순진하게 이쪽을 걱정하고 있다니.
“무시는 누가. 다들 그 정도 양심은 있어. 정말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정말이죠?”
“응. 그리고 너, 그냥 여관에서 자.”
“네? 갑자기 왜…….”
“생각해 보니까 여관에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 난 이제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말고.”
“다, 단장.”
“가서 라이돈한테 마력 주입 받아야 해. 푹 쉬고, 나중에 보자.”
손바닥 뒤집듯 오락가락하는 요구가 황당할 법도 하건만, 반은 더 캐묻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단장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만약 힘든 일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꼭 말해 주셔야 해요.”
시험할 필요도 없이 대쪽같은 남자였다. 비록 그의 호의가 자신이 아닌 껍데기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호의에 담긴 진심만큼은 의심해선 안 됐다.
힘주어 입꼬리를 끌어 올린 카델이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잘 자, 반.”
‘적린 용병단’이 국가를 위협한 마족을 해치웠다는 소문은 자자했으나, 정작 그 용병단이 어떤 인물로 이루어져 있는지, 개개인의 특징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마이뉴 왕국의 루멘 도미닉이 단원 중 하나라는 이야기가 돌기는 했지만, 대부분 헛소문으로 치부되어 넘어가는 일이 흔했다.
전부 카델이 의도한 바였다. 그는 용병단의 노출을 극히 꺼리며 초대받은 파티는 물론 공개적인 자리에 나서는 것조차 마다했다. 오스마 제국 스토리에 돌입하기 전까지는, 세간에 ‘적린 용병단’의 이름 정도만 각인시켜 두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기 때문이다.
‘괜히 뻗대고 다니다가 기사단 승격도 전에 제국인의 눈에 띄면 곤란해.’
황제가 모습을 드러낸 멸문가의 핏줄을 잡아 죽이기 전에 ‘죽이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 두어야 했다. 그건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면 저절로 해결될 테니, 그 전까진 최대한 정체를 숨기도록 하자.
그러한 이유로 카델은 다닐라 국왕과 바스킨 마을 주민들에게 작별을 고한 뒤, 최소한의 배웅을 받으며 ‘미스틱 공국’으로 향하는 무역선을 찾았다.
“건강히 지내십쇼, 모들렌 경. 다시 뵐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배에 오르기 전, 카델은 용병단을 배웅하러 온 모들렌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처음보다 한결 옅어진 다크서클을 문지르며 멋쩍게 웃었다.
“저희 단장님도 진심으로 카델 경을 배웅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다만 그게, 몸이 안 좋으셔서…….”
“괜찮습니다. 인사라면 이전에 해 뒀으니까요.”
또 어딘가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겠지. 살갑게 배웅하러 와 주리라곤 기대도 안 했다.
‘어차피 나중에 또 볼 텐데 뭐.’
카델은 방탕한 단장을 대신해 머쓱하게 몸을 꼬는 모들렌을 위로하며, 그 옆에 선 피넷을 내려다보았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아이의 얼굴엔 서운한 기색이 만연했다. 요 며칠 왕실에서 가져온 맛있는 간식을 몰래 선물하며 예뻐해 주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카델 형, 나중에 꼭 놀러 와야 해요?”
퍽 간절한 눈빛이었다. 순진한 부탁에 일순 뺨이 작게 경련했다.
‘나중에…….’
전개상 그가 화이트 왕국으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었다. ‘카델 라이토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의 행적은 언제나 한 번도 밟지 않은 곳을 향했으니.
그러니 스토리의 끝을 보는 것이 목표인 그 또한 화이트 왕국을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목표를 이루면, 그는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물론이지. 꼭 놀러 올게. 그동안 밥 잘 먹고, 씩씩하게 기다려 줘.”
하지만 굳이 사실을 적시하며 아이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카델은 다정함을 꾸며 낸 채 거짓된 약속을 말했다.
피넷은 기특하게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곧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 카델은 애정을 듬뿍 담아 아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는, 구부렸던 허리를 세웠다.
짧게 스치는 인연일지라도, 이별은 언제나 아쉬운 법이다. 다시는 상대를 볼 수 없다면 더더욱.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걸음에 머뭇거리자, 뒤편에서 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 곧 출발한대요. 슬슬 올라오세요.”
“……응. 갈게.”
반과 루멘이 갑판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델과 시선이 마주친 루멘은 곧장 몸을 돌려 선박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여전히 노골적인 태도였다.
‘……대놓고 피할 필요까지 있나.’
어차피 라이돈의 봉인을 풀 때까지는 함께 행동하기로 했으면서.
금세 저조해진 기분이 영 어색했다. 카델은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모들렌과 피넷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상선 위로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