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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던 모래 폭풍은 약 세 시간 정도를 머무른 후에야 천천히 동굴을 지나쳐 갔다. 덕분에 바깥은 비교적 잠잠해졌으나, 해가 떨어진 하늘은 벌써 어두컴컴하게 물들고 있었다.
카델은 입구 앞에 걸터앉아 멍하니 너머를 내다보았다.
‘피 냄새…….’
해가 저물기 무섭게 미풍을 타고 짙은 피 냄새가 풍겨 왔다.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모래바람. 그 속의 수많은 모래 알갱이들이 불그스름한 빛을 띠며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사막 전체에 대량의 핏물이 분사된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오고 있는 거지.’
인간의 피 같지는 않았다. 사막을 흠뻑 적실 정도의 양이다. 미친 인간이나 도망자를 제외하곤 들어갈 생각조차 못 하는 지역에 이 정도 피를 뿌릴 만큼 많은 인간이 존재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마물일까? 마물들도 배는 채워야 할 테니, 인간이 없으면 서로를 사냥한다는 선택지밖엔 남지 않을 것이다.
‘역시 그 편이 더 설득력 있겠네.’
이대로 서로 잡아먹으며 멸종해 버린다면 좋을 텐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시는데, 일순 동굴 내벽이 크게 진동했다.
쿠구구구—
갸우뚱 기우는 몸에 힘을 주며 일어서자, 경계 태세에 들어간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오는 건가.’
카델이 검지와 중지를 맞부딪쳤다. 딱, 소리와 함께 어두운 동굴 천장 위로 여러 개의 불덩이가 떠올랐다. 환해진 내부를 따라 갑작스런 진동의 원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아아아! 그아악!
울퉁불퉁한 단면의 크고 작은 돌덩이가 엉겨 붙은 두툼한 몸체. 움직일 때마다 후드득 떨어지는 돌가루와 최상단에 위치한 자그마한 바위. 그 안에 조각처럼 새겨진 섬세한 이목구비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록 맨(Rock man)이었다.
“우와, 얼굴 엄청 작네. 아하하! 카델보다 작은 것 같아!”
록 맨은 동굴의 내벽에서부터 파생되고 있었다. 낮에는 동굴의 벽이 되어 모습을 숨기고, 밤에는 이런 식으로 행동을 개시하는 모양이었다.
카델은 즐겁게 웃어 대는 라이돈을 무시하며 록 맨의 머리통을 향해 [바람 칼날]을 조준했다. 무형의 검기에 가까운 공격이 정확히 목표물을 노려 날아들고. 깔끔하게 절단된 록 맨의 머리통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머리통이 사라진 몸체는 부들부들 떨리며 경련하는가 싶더니, 이내 몸체를 이루던 돌덩이가 미끄러지며 폭삭 주저앉았다. 무심하게 그 모습을 지켜본 카델이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봤지? 목을 노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카델은 깨달았다.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빠르다는 걸.
“멋있잖아, 카델! 다시 반할 것 같아.”
“닥치고 얼음이나 날려라, 요정.”
반은 카델이 보여 준 대로 최소한의 검기를 날려 정확히 록 맨의 머리를 노렸고, 루멘은 순식간에 록 맨의 머리를 포함한 전신을 난도질했으며, 라이돈은 시범을 무시한 채 록 맨을 꽁꽁 얼리고는, 그대로 산산이 부숴 버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델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떻게 명령을 제대로 듣는 게 반밖에 없냐.’
약점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은 카델이 다시 동굴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록 맨은 계속해서 생성되는 중이었지만, 그쪽에만 집중해선 곤란했다.
카델은 조금 전부터 미세하게 끓어오르고 있는 모래 바닥을 주시했다. 끓는 지점은 한 곳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근방의 곳곳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지면 위로 빠져나온 길고 굵직한 머리통을 발견한 카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샌드 스네이크(Sand Snake)군.’
모래의 색과 비슷한 비늘을 가진 샌드 스네이크는 구렁이에 가까운 굵기를 자랑하며 부드럽게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눈대중으로만 봐도 족히 서른 마리는 넘어 보였다.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던 놈들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을 향했다. 용병단이 있는 동굴 쪽이었다.
일시에 움직이는 선명한 시선에 카델이 혐오감을 드러냈다.
“징그러워. 악몽 꾸는 거 아냐?”
샌드 스네이크는 무리 생활을 하는 마물이었다. 여러 마리가 하나의 먹잇감에 달려들어 포박한 뒤, 압사시키는 것이 그들의 특징. 한번 잡히면 행동 불가가 되는 데다, 웬만큼 피통이 높지 않으면 즉사에 가까운 데미지를 입게 되는 마물이었다.
‘그래도 뭐, 이렇게 바글바글하게 모여 주시니 고맙네. 괜히 아까운 마력만 낭비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목표를 감지한 샌드 스네이크 무리가 맹렬한 기세로 지면을 미끄러져 왔다. 막힘없이 구부러지는 몸뚱이가 거대한 물결을 그리며 동굴로 접근하고 있었다.
카델은 피하지 않고 그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핑! 핑!
샌드 스네이크가 동굴 근처까지 다가왔을 때. 하늘에서 가느다란 불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화마의 화살]
밤을 대비해 미리 장전해 두었던 마법이 자비 없이 지면을 강타했다. 튜토리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촘촘해진 화살 비가 광대한 범위를 아우르며 사막을 파괴하고 있었다.
불화살에 꿰뚫린 샌드 스네이크는 불타는 몸을 배배 꼬며 오그라들었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불화살이 빼곡하게 몰려들던 마물을 차근차근 도륙했다. 마력이 쑥쑥 빠져나가는 기분 나쁜 감각을 감내하던 카델이 조금씩 기술의 화력을 줄여 갔다.
‘보이는 놈은 다 죽은 것 같군.’
같은 곳에 또 마물이 자라나지 않는 한, 근방의 마물은 전부 정리됐다. 다른 장소에 있는 마물이 이쪽을 찾기까진 꽤 시간이 걸릴 테니, 다음 전투는 부하 중 한 명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동굴의 안전만 확보한다면 밤새 이런 식으로 돌아가며 싸울 수 있다. 그리 생각한 카델이 내부의 상황을 확인하려던 순간.
후두둑.
머리 위로 떨어지는 한 무더기의 돌가루. 놀란 카델이 머리를 털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느닷없이 튀어나온 손이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바깥으로 끌고 갔다.
루멘이었다. 그는 난데없는 봉변에 당황하는 카델을 향해 짜증스레 일갈했다.
“라이돈이 동굴을 부쉈어.”
체력 비축과 안전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카델의 계획은, 라이돈이 동굴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무로 돌아갔다. 덕분에 용병단은 하룻밤 내내 사방을 경계하며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다녀야 했고, 결국엔 발견하지 못한 채로 아침을 맞이했다.
피로도는 최상, 기력은 최하. 날이 밝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거세지는 모래바람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눈 따가워, 카델. 바람 장막 만들어 주면 안 돼?”
“누구 때문에 마력 다 빠져서 안 돼. 양심이란 게 있으면 조용히 걷기나 해라.”
“너무해.”
정말 너무한 건 얼음 창으로 동굴을 난타한 네놈이다. 흉흉하게 읊조린 반이 라이돈을 노려보자,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싱긋 웃었다.
“그래도 내 덕분에 시간 낭비 안 하고 계속 이동할 수 있었잖아? 카델이 제일 싫어하는 게 시간 낭비라며. 그러니까 이럴 땐 ‘고마워, 라이돈!’이라고 말해야지?”
반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갈무리하듯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금방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듯한 그를 대신해 입을 연 것은 루멘이었다. 한껏 예민해진 눈빛엔 당장이라도 라이돈을 던져 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팽배했다.
“정신 나간 소리 그만하고 빨리 신전이나 찾아.”
“흐응, 서운하네, 루멘. 반도 그렇고 너희는 너무 까칠해. 조금만 덜 재미있었어도 그냥 얼려 버렸을 텐데 말이지! 하하!”
두 남자의 기세가 살벌했다. 카델은 라이돈이 이 이상 루멘과 반의 심기를 건들지 않도록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따끔한 통증에 두 쌍의 날개가 놀란 것처럼 경직되더니, 뾰로통한 얼굴이 그를 돌아봤다.
“폭력적이야, 카델.”
“시끄럽고, 신전 쪽은 어때. 아직도 거리가 멀어?”
“아니? 거의 다 왔는데.”
“……뭐?”
“말했잖아, 내내 이동한 덕분에 시간 낭비 안 할 수 있었다고. 한…… 20분 정도만 더 걸으면 도착할 것 같아.”
그걸 제일 먼저 말해 줬어야지! 격노한 카델이 수차례 등짝을 후려치자 라이돈이 엄살을 피우며 몸을 비틀었다.
그는 제멋대로에 상당히 얄미운 성격을 가진 요정이었으나, 대부분 사실만을 말하는 정직한 남자이기도 했다. 용병단은 라이돈의 예고대로, 20분 남짓한 시간을 지나 거대한 신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와, 어마어마한 힘이네. 재밌겠어. 기대돼!”
신전 앞에 선 라이돈이 흡족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카델은 얼굴을 가린 천을 끌어 내리며 눈앞의 신전을 올려다보았다.
삼각 지붕을 떠받친 무수한 기둥들. 거친 기후에도 크게 마모되지 않은 상아색의 대리석. 신전은 강한 모래바람에도 끄떡하지 않고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입구는 그다지 넓지 않다. 사람 한두 명이 들어가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데다, 내부의 깊이도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신전의 절반 이상을 덮은 절벽 때문이었다. 불그스름한 암벽에 박힌 신전은 입구만 간신히 빼놓은 채 자그마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어떻게 지으면 절벽 안에 건물이 박혀 있을 수 있는 거지. 바위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것도 신기하고……. 라이돈이 느끼고 있다는 특별한 힘 덕분인가.’
게임 속 ‘균형의 신전’은 하나의 스테이지였다. 봉인 상태의 요정족 기사를 덱에 포함해야만 입장이 가능한 곳. 스테이지 진행에 꽤 많은 몬스터 웨이브가 포함되었던 기억은 있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중간중간 컷신이 나왔던 것 같기는 한데……. 뭐, 대충 신전에 있는 뭔가를 소개하는 거였겠지.’
스토리도 안 보는데 컷신이라고 열심히 봤을 리 없다. 차근차근 적을 토벌하다 보면 알아서 진행되겠지. 깔끔하게 생각을 정리한 카델이 입구를 조사하는 부하들을 불러 세웠다.
“아쉽지만 근처엔 쉴 곳이 없어. 바깥에서 모래 폭풍을 만나는 것보단 바로 신전에 들어가는 게 나을 거야. 그러니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루만 더 버텨 보자.”
이 지옥 같은 사막에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신전에 입장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이돈 때문에 한 단계 더 힘겨워지긴 했지만, 그런 걸 일일이 투덜대며 쭈뼛거리고 있을 때도 아니었고.
지금은 오로지 라이돈의 봉인 해제에 집중할 때. 허공에 불덩이를 띄운 카델이 부하들을 이끌며 신전의 내부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