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첫 번째 시련의 시작은 시야의 점멸이었다. 지긋한 두통을 느끼며 감았던 눈을 뜨자, 좀 전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드러났다.
카델이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여긴 어디지……?’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고립된 방. 창문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공간이었으나, 다행히도 곳곳에 횃불이 달려 앞을 보는 데 문제는 없었다.
옆에는 반이 있었다. 그는 당장 이 공간의 정체를 밝혀 보겠다는 듯 날카롭고도 전투적으로 사위를 훑어 내렸다.
“쉽게 봉인을 풀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안 했지만, 시련까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대체 그 여잔 뭐였을까요, 단장? ‘스텔라’니, ‘헤소니아’니……. 설마 진짜 여신 스텔라는 아니겠죠?”
“글쎄. 이왕이면 진짜라고 믿는 편이 낫지 않아? 자랑거리가 생기는 거라고.”
그녀가 진짜 ‘스텔라’라는 것을 덥석 믿기에도, 단순히 부정하기에도.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제대로 알아내기엔 만남이 터무니없이 짧기도 했다.
하지만 카델의 말대로 그녀가 여신 스텔라라고 믿는 쪽이 더 편하기는 했다. 미지의 힘을 가진 여신이라면, 이 기묘한 현상들을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반은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어느 한 곳으로 눈길을 고정했다. 게슴츠레한 시선이 북쪽 벽면 상단에 둥실 떠오른 ‘모래시계’ 하나를 발견했다.
“단장, 저기 보여요? 모래시계…… 맞죠?”
“어…… 그러네. 모래는 없는 것 같지만. 왜 저런 게 공중에 떠 있는 거지?”
“일반적인 장식품일 린 없겠죠? 부숴 볼까요?”
꽤 거대한 모래시계였다. 둥그스름한 곡선의 유리가 잘록한 허리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 흔한 생김새. 안에 모래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모래시계였다.
쓰임새가 뭘까? 뭘 의미하기에 저렇게 대놓고 떠올라 있는 걸까? 어떻게 봐도 의심스러운 존재였다. 잠시 고민하던 카델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은 두고 보자.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뭔가…….”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사아아—
텅 비어 있던 모래시계의 하단부에 붉은색의 모래가 쌓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모래는 빠른 속도로 바닥을 채워 갔고, 그 양이 하단부의 2/3까지 미치자마자. 모래시계가 뒤집혔다.
“시계가……!”
그것이 무언가의 신호라도 되는 듯, 그들이 있는 공간이 진동했다. 정확히는 모래시계 방면의 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내는 울림이었다.
조금씩 넓어지는 벽면의 틈새에서부터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카델이 곧장 마력을 끌어 올렸고, 반은 검기를 응축시켰다.
이윽고 완전히 개방된 벽 너머에서 나타난 것은.
“젤리 봄(Jelly Bomb)……?”
물방울 모양의 탱글탱글한 몸체. 투명한 가죽은 체내를 가득 채운 정체불명의 액체를 여과 없이 비췄고, 그들이 둥그런 몸체를 박차며 튀어 오를 때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젤리 봄. 마물보다는 물풍선에 가까운 생김새를 가진 놈들이, 색색의 몸체를 튕겨 내며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다채로운 색과 깜찍한 움직임은 상대방의 긴장을 풀기에 참으로 적절했으나. 그들을 응시하는 카델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저놈들은 정직한 이름 그대로, 움직이는 폭탄에 불과했으니.
“반, 일정 거리를 확보해. 조금만 가까워도 폭발에 휩쓸릴 거야.”
“유의할게요.”
젤리 봄이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눈대중으로만 봐도 족히 5~60마리는 되어 보였다. 60개의 소형 폭탄이 꽉 막힌 방 안으로 굴러 들어오는 격이었다.
반은 놈들을 향해 크게 대검을 휘둘렀다. 낮은 고도로 지면을 갉듯이 날아든 검기가 젤리 봄의 몸체에 닿자, 놈들의 탄력적인 껍질이 간단히 찢어지며 체내의 액체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쾅! 퍼버벙!
연속된 폭음이 귓가를 때리듯 울려 퍼졌다. 매캐한 연기를 품은 열풍이 무식하게 몰아치며 금세 시야를 어지럽혔다.
카델은 반과 자신의 앞으로 바람 장막을 펼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젤리 봄의 체액은 일종의 기폭제였다. 작은 상처로도 가죽이 뜯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몹시 예민한 시한폭탄인 셈이었다.
게다가 무리 생활을 한다. 한 마리가 터지면 당연히 그 옆에 있던 놈도 터질 테니. 연쇄 폭발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면, 최대한 건들지 않고 피해 가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공략이 까다로운 놈은 아니야. 거리만 확보하면 얼마든지 이쪽의 부담을 줄일 수 있으니까. 저렇게 한 방위에서만 몰려온다면 상대하기도 더 쉽고. ……고작 이런 게 시련인가?’
물량이 과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신이 직접 나서 내리는 시련이라기엔 싱거운 면이 있었다.
‘모래시계는…….’
폭발이 이어지는 동안 벌써 1/3 정도의 모래가 떨어졌다. 상단부에 쌓인 모래가 전부 떨어지면 이 시련도 끝나는 걸까?
찜찜한 의심으로 무장한 시선이 전방의 모래시계와 활짝 열린 벽 너머를 주시했다. 폭음이 작아지기가 무섭게 새로운 검기가 연기를 가르며 쇄도했고, 다시금 시끄러운 연쇄 폭발이 재개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싱겁게 끝나진 않을 것 같단 말이지.’
*
“다 끝났네요.”
모래가 전부 떨어졌다. 그들이 있는 공간도 또 한 번 진동했다. 개방되었던 벽면이 닫히고 있는 탓이었다.
카델은 공간 전체를 순회하는 바람을 일으켜 매캐한 연기를 흩뜨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반의 검기만으로 처리한 젤리 봄은, 단단한 바닥 위에 짙은 그을음만을 남긴 채 모조리 폭발했다.
대검을 어깨 위로 둘러멘 반이 텅 빈 공간을 둘러보며 미간을 좁혔다.
“뭘까요. 모래도 다 떨어졌고, 마물도 전부 처리했는데. 벽이 닫히기 전에 그 안으로 들어갔어야 했나?”
“가능성 있네. 아니면 단순히 시련의 조건을 채우지 못한 걸지도. 놓친 게 있는 건가…….”
팔짱을 낀 카델이 모래시계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붉은 모래는 여전히 하단부에 얌전히 쌓여 있었다. 모래가 사라지지 않았으니, 시계가 뒤집히면 또 다른 마물이 나타나는 걸지도 몰랐다. 그걸 질릴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시련일지도.
영 가늠이 안 되는 시련의 정체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그때. 유리에 담긴 모래의 색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왜 색이 바뀌어?”
그뿐만 아니라 양까지 줄어들었다. 순식간에 절반이 사라진 모래가 색소라도 부은 듯 새파랗게 물들었다. 반사적으로 오라를 끌어 올린 반이 북쪽을 향해 대검을 조준했다.
“또 나오려는 걸까요?”
모래시계가 뒤집혔다. 처음보다 확연히 양이 줄어든 푸른색 모래가 하단부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북쪽 벽이 열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왜 안 열리는 거지?”
모래시계를 제외하고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쉬는 시간일까? 고작 젤리 봄 상대했다고 쉬는 시간까지 챙겨 준다고? 시련치곤 참으로 관대한 처사였다.
‘가까이서 확인해 봐야겠어.’
어딘가 장치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델이 한 발짝을 내디딘 바로 그때.
“쓸데없이 마력 낭비하지 마. 아무리 쳐도 저 모래시계는 깨지지 않아. 몇 번이고 확인했을 텐데?”
“내 마력을 걱정해 주는 거야, 루멘? 아하하! 기분 나빠! 걱정은 카델한테만 받고 싶은데 말이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곧장 반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부는 사방이 꽉 틀어막혀 있다. 좁지는 않지만 방 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크기이니, 같은 공간에 있다면 루멘과 라이돈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설마 벽 너머에?’
목소리는 북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성큼성큼 나아간 카델이 벽면에 손을 올린 채 둘의 이름을 불렀다.
“루멘! 라이돈! 내 목소리 들려? 들리면 대답해!”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쪽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걸까? 소리에 집중하며 벽 위에 귀를 가져다 대자,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뻗쳐 왔다.
“대장? 거기 있는 거야?”
“카델! 바깥에 있어? 우린 시련이란 걸 받는 중인데, 합류할래? 이쪽으로 와!”
대화가 가능하다!
카델이 떨어져 있는 반을 향해 마구 손짓했다. 다가온 반의 팔을 움켜쥔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도 시련 때문에 갇혔어! 여긴 전부 벽으로 막혀 있고, 모래시계가 뒤집히면 마물이 나와. 시간이 끝나면 마물도 사라지는 것 같고……. 그쪽은?”
“마찬가지야. 지금은 모래가 파란색으로 변했고.”
“……똑같네. 서로 대화가 가능한 걸 보니, 생각보다 벽이 얇은 모양이야.”
“이걸 부수면 공간이 이어지는 건가?”
“해 보자. 이쪽에서 벽을 부숴 볼 테니까, 뒤로 물러나 있어.”
대화를 마친 카델이 쥐고 있던 반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부숴 달라는 신호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예쁘장한 얼굴에 반의 입꼬리가 작게 경련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찾는 행동에 은근한 황홀경까지 느껴졌다. 이대로 평생 둘만의 공간에 갇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불온한 충동을 참듯 입가를 매만지던 그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를 응축한 대검을 휘두르자, 묵직한 파공음을 동반한 검기가 벽에 처박혔다.
머리가 울릴 만큼 거대한 굉음이 번졌다. 소매로 입가를 가린 카델이 나풀거리는 먼지와 돌가루 속에서 미간을 좁혔다.
‘됐나……?’
방음도 되지 않는 두께의 벽이라면 반의 검기로 쉽게 무너질 것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앞을 확인했으나.
“여기, 평범한 방이 아닌 모양인데요.”
중앙이 뻥 뚫린 벽 너머에는,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어둠. 오직 그것만이 공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며 도사리고 있었다.
너머의 어둠이 진득한 액체처럼 무너진 벽면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상처를 치유하듯, 뚫린 구멍 사이로 스며들었다. 빠르게 빈틈을 메꾼 어둠은 그대로 벽이 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돌가루와 파편을 제외하면, 벽을 부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로.
예상 밖의 전개에 카델이 입을 다물었다.
“대장, 아직 멀었어?”
반대편에서 루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벽의 파괴는 루멘 쪽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방이 이어져 있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대화가 가능한 건 위치가 가까워서가 아니라…….”
이 방만의 특수한 성질일 거라고. 그리 말하려던 때였다. 조금 전 반이 무너뜨렸던 벽면이 진동하며, 또다시 틈이 열리기 시작했다.
“단장, 모래시계가…….”
빠르게 돌아간 시선의 끝에서, 다시금 붉게 물든 모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두 번째 마물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다.
“루멘! 라이돈! 그쪽 모래시계 확인해 봐. 너희도 색이 바뀌었어?”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물었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몇 번을 더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푸른 모래시계는 단순히 휴식을 알리는 용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팀과의 소통이 가능한 시간이었던 건가. 그게 끝나면, 지금처럼 다시…….’
반쯤 열린 벽 너머, 우렁찬 포효가 들려왔다. 반은 카델을 확 잡아끌어 뒤편으로 도약하고는,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붉은 모래시계가 마물의 등장을 알린다는 건 확실해졌네요. 모래가 전부 떨어지기 전까지 죽이지 못하면, 시련은 실패하는 걸까요?”
“별로 확인해 보고 싶진 않네.”
모래시계의 용도는 대강 파악했다. 남은 것은 시련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
‘차근차근 해결해 볼까.’
벽 너머를 응시하는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