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521)

“라이돈! 뒤쪽을 막아!”

“흐응, 루멘은 내 마력이 무한인 줄 알아? 아쉽지만 아직 봉인은 건재하거든.”

“……그럼 걸리적거리지 말고 구석에 처박혀 있든가 해.”

지금까지 붉은 모래시계는 다섯 번 뒤집혔고, 그들은 종류 다른 마물의 습격을 다섯 번이나 막아 냈다. 그 길고 혹독한 시간 동안. 루멘과 라이돈은 자신들의 얄팍한 팀워크를 절감하고 있었다.

“원거리 마물을 검으로 쓸어버리려고? 한심해, 루멘! 원거리는 원거리로 잡는 게 당연하잖아. 내가 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누가 쟤넬 잡겠어?”

“정말 죽여 버리고 싶군.”

붉은 모래가 전부 떨어지면, 푸른 모래가 나타나며 카델 쪽과의 소통이 가능했다. 제한 시간은 약 3분 정도. 그렇게 이루어진 총 4번의 대화를 통해, 그들은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첫째, 단계가 지날수록 등장하는 마물의 힘이 강해진다.

둘째, 각 방에서 등장하는 마물의 종류와 수는 전부 다르다.

셋째, 붉은 모래의 양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몇 가지 정보들을 종합하여, 용병단은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 냈다.

시련은 모래시계의 ‘붉은 모래’가 전부 소멸할 때까지 진행된다. 그동안 반복되는 전투를 거듭하며 버티는 것이 성공 조건.

실패 조건은 제한 시간 내에 마물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정확한 것은 없었으나, 어찌 됐든 미친 듯이 싸우다 보면 저절로 시련이 끝나 있으리라는 것이 용병단의 의견이었다.

그랬기에 마음먹고 시끄러운 요정과 힘을 합쳐 보려 한 루멘이었으나.

“계속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굴어 봐. 붉은 모래가 사라지기 전에 네 머리통이 날아갈 테니까.”

“아하하! 그게 가능할 것 같아? 한번 죽여 볼래? 나도 결과가 궁금한데!”

상식이 안 통하는 놈이었다. 애초에 누구 봉인 풀어 주겠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어린애 다루듯 손쉽게 녀석을 쥐었다 펴던 카델이 존경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제발 좀 닥치고 마물이나……!”

한계까지 다다른 분노에 살벌한 낯으로 라이돈을 돌아본 그 순간.

쉬이잇!

기다란 백색의 실이 방심한 루멘의 허벅지를 옭아맸다. 다리를 끌어당기는 강한 힘에 루멘의 중심이 크게 흔들렸다. 빠르게 검을 뽑은 그가 이어진 실을 끊어 내려 했으나.

“젠장!”

반대편에서 날아든 또 다른 실이 팔을 휘감았다.

루멘을 공격한 마물의 정체는 ‘화이트 스파이더(White Spider)’. 와이어처럼 질기고 유연한 실을 발사해 목표물을 포획하여 끌어온 뒤, 어마어마한 턱 힘으로 먹잇감을 잘게 부수어 먹는 위험한 마물이었다.

루멘은 화이트 스파이더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전신에 바싹 힘을 주었다. 그럴수록 단단한 실이 살갗을 파고들며 그 위로 방울방울 핏물이 맺혔다. 아릿한 통증에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아무거나 빨리 끊어!”

“정말이지, 나한테 명령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루멘은 어지간히 기억력이 나쁜가 봐?”

투덜거리며 얼음 창을 날린 라이돈이 팔을 묶은 실을 끊어 냈다. 분산되었던 힘이 자연스럽게 편중되며 허벅지에 가해지는 압력이 강해졌다. 이대로면 다리에 치명상을 입는다.

버티는 것을 포기한 루멘이 힘을 풀자, 화이트 스파이더가 실을 감아 내기 시작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끌려가면서도 줄곧 낮은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쫙 벌어진 화이트 스파이더의 아가리 앞까지 다다랐을 때.

촤아악!

놈의 하악을 통째로 베어 냈다. 둥그런 머리통이 비스듬한 혈선을 따라 주르륵 미끄러지고서야 다리를 묶은 실을 끊어 낸 루멘이 혀를 차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니 이런 일까지 당하는군.”

실이 파고들었던 팔뚝과 허벅지가 쓰라렸다. 미간을 구긴 채 뒤를 돌자, 라이돈이 화이트 스파이더의 눈알에 얼음 창을 박아 넣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부터 저렇게 싸웠으면 오죽 좋았을까.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더 마음 편할 것 같았다. 눈치 없이 날아드는 단단한 실을 사납게 내친 그가 남은 마물들을 부지런히 소탕했다.

그렇게 그들이 방 안의 모든 마물을 처리했을 때. 모래시계의 상단부에는 아주 극소량의 모래만이 남아 있었다. 그를 발견한 루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점점 시간이 빠듯해지는군. 저놈과의 합이 더러우니 뭘 시도해 볼 수도 없고.’

오히려 피로만 가중되는 듯했다. 루멘은 죽은 마물 위에 걸터앉은 라이돈을 흘기고는, 피로 흥건해진 검을 납검했다. 다음 마물이 나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체력을 비축해 두어야 했다.

바닥의 빈자리를 찾아 앉은 그가 찢어 둔 천으로 허벅지와 팔을 지혈했다. 깔끔하게 매듭까지 묶은 뒤에야 자세를 편히 바꾸려는데, 문득 시야의 끝에서 거슬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저건 뭐야?”

루멘이 보고 있는 것은 죽은 화이트 스파이더의 시체 아래였다. 좁쌀만 한 무언가가 무리 지은 채 바글거리고 있었다.

라이돈은 자신의 아래쪽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보는 거냐는 장난스런 타박은, 뒤이어 느껴지는 기묘한 기척에 가로막혔다.

따닥. 따다닥. 따닥.

그가 걸터앉은 마물의 아래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피어나고 있었다. 휙 고개를 숙여 바닥을 살피자 보이는 것은, 갓 부화한 새끼 거미들. 얼핏 쏟아진 쌀가마니처럼 보일 만큼 떼를 지어 뭉쳐 있는 놈들의 모습에 라이돈의 인상이 구겨졌다.

“징그러워.”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내 새끼 거미들을 얼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공격이 미처 닿기도 전.

“……응?”

제한 시간이 종료되며, 한가득 모여 있던 새끼 거미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

“이건 또 무슨 전개지?”

제한 시간이 끝났음에도 푸른 모래시계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붉은 모래시계가 다시 뒤집히며 이어지는 마물의 등장을 알렸다. 짧은 휴식 시간도 없이.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단장, 거미들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아니, 벽도 다 안 열렸는데 이것들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물러서!”

난데없이 등장한 새끼 거미 떼. 벽이 채 열리기도 전에 모습을 드러낸 이 어린 마물들은, 급속도로 성장하며 여기저기 실을 쏘아 대고 있었다.

카델은 놈들이 무리 지은 틈을 타 곧장 화염구를 날렸으나, 몸놀림이 과하게 재빨랐다. 10마리를 노렸음에도 불탄 것은 고작 4마리. 나머지는 한층 더 불어난 몸을 이끌고 사방으로 산개했다.

“바퀴벌레가 따로 없네……!”

말도 안 되는 성장력이었다. 이 기세면 성체가 되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화이트 스파이던가? 몇 마리면 몰라도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오면 곤란한데.’

반이 곧장 검기를 날려 보조했으나, 놈들은 그것마저 요리조리 피해 가며 최소한의 피해를 유지했다.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좁힌 반의 시선이 정면의 벽을 향했다.

상당 부분이 개방된 벽 너머에서는, 마침 새로운 마물이 등장하고 있었다.

“저건…….”

마물의 정체를 확인한 반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아머 오우거.

멀지 않은 과거, 카델과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던 마물이었다. 총 3마리의 아머 오우거가 매서운 기세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둔중한 파공음이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짚어 주었다.

반은 질린 얼굴로 아머 오우거를 바라보는 카델을 향해 말했다.

“아머 오우거는 제가 처리할게요. 단장은 저 거미들을 맡아 주세요.”

“좋아. 대신 힘들 것 같으면 바로 불러. 시련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체력 소모는 최대한 줄이자고.”

예상 밖의 깔끔한 허락이었다. 자신이 아머 오우거를 맡아야 할 이유를 구구절절 나열할 필요도 없었다. 순간 김이 빠져 멍하게 카델을 바라보자, 그가 뭘 보냐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어서 가라며 재촉하기까지 했다.

반은 그제야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마물의 등장에 경직되었던 입가가 수줍은 호선을 그렸다.

“네. 명심할게요, 단장.”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던 카델의 신뢰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던 허락과 덤덤한 목소리가, 천사의 나팔이라도 되듯 기분 좋게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절대로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한층 더 날카로워진 오라를 두른 반의 신형이 전방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뒤편에서 마력을 끌어 올리던 카델은, 뜬금없는 시스템 창의 등장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