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짜는 없다. 그들이 싸웠던 동료도, 서로를 공격하며 입혔던 상처도. 전부 환상으로 그려 낸 실재.
스텔라의 말은 곧, 카델이 부하들을 상대하며 입혔던 데미지가 본체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팔을 베었다면 베어 낸 만큼의 고통이. 다리를 부러뜨렸다면 부러뜨린 만큼의 고통이. 데미지의 폭탄이 되어 주인에게 날아드는 것이다.
‘그럼 만약 우리가 동료를 가짜라고 판단해 죽이려 했다면…….’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만약 자신이 루멘과 라이돈의 목숨이 위험할 만큼의 데미지를 주었다면, 그 데미지를 돌려받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은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뭐 이런 미친 시련이…….”
지금 자신과 반이 겪는 고통은 전부 루멘과 라이돈이 이쪽을 제압하며 이루어진 전투의 반증이었다.
‘대충 봐도 나보단 반을 더 격렬하게 뭉갰나 본데.’
물론 자신의 고통이 미미한 것은 아니었으나, 반에게 비할 바는 못 됐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반을 제압한 것인지. 악문 잇새에서 계속해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카델은, 문득 자신과 반이 어떤 식으로 루멘과 라이돈을 제압했었는지를 떠올렸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녀석들이었다. 한 명은 다리를 분지르고 싶어질 만큼 재빨랐고, 한 명은 사방팔방을 날아다니며 광역 마법을 난사했다. 약간의 진심을 담지 않으면 도저히 제압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힘 조절을 했지.’
카델의 떨리는 시선이 쇠사슬 너머를 향했다. 기억보다 적당히 싸웠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보이는 두 남자의 모습은 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했다. 둘 다 고통의 정도는 반과 비슷해 보였다.
그들에 비하면 카델은 한없이 멀쩡한 편이었다. 그것은 루멘과 라이돈이 카델에게 최소한의 상처만을 입히고 제압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 결과였다.
카델은 점점 사그라지는 고통과 한기를 느끼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바닥을 더듬어 겨우 중심을 잡고, 짐가방에서 물약을 꺼내 들었다. 고통을 중화시키고 상처의 회복을 돕는 물약이었다.
‘일단 물약으로 체력을 회복해야겠어. 다음 시련이 뭔지 모르니, 더 큰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상처를 줄여야 해. 루멘 쪽에도 전해 줘야 할 텐데. 쇠사슬 때문에 물약을 제대로 던져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
부하들이 정신을 못 차리니 자신이라도 대비를 해 두어야 했다. 그리 생각하며 물약의 뚜껑을 개봉한 카델이었으나.
쩌적. 쩌저적.
멀쩡하던 유리병이 쩍쩍 갈라지더니, 수습할 새도 없이 깨져 버렸다. 카델은 황망한 얼굴로 바닥을 적신 물약을 멍하니 응시했다.
“도전자는 정직하게 시련을 직면하라.”
반사적으로 돌아간 시선이 헤소니아를 향했다. 그는 정확히 카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헤소니아가 유리병을 깨뜨린 모양이었다.
카델은 손안에 남은 유리 조각을 거칠게 던져 두고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련을 이겨 내길 바라는 겁니까, 도전자가 고통받는 모습을 즐기는 겁니까? 시련의 내용도 알려 주지 않고 무턱대고 직면하라니, 뭘 원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군요.”
헤소니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주친 시선 사이로 예리한 탐색의 기류가 흘렀다. 그들의 신경전을 지켜보는 스텔라의 표정엔 즐거움이 가득했으나, 약간의 우려도 뒤섞여 있었다.
카델 역시 이러한 태도가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날 선 태도를 거두지 않았다.
‘헤소니아와 스텔라가 마지막 시련에서 보고자 하는 게 뭔지를 알아내야 해. 그걸 모른다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시련처럼 막무가내로 구르는 결과가 나올 뿐이다.’
무엇이라도 캐내야 했다. 첫 번째는 ‘협동’의 시련. 두 번째는 ‘신뢰’의 시련. 두 시련 전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 말은 즉, 모든 시련이 능력이 봉인된 요정의 옆에 ‘동료’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
문제는 시련이 요정과 그의 동료가 증명하길 원하는 궁극적인 가치의 정체였다.
‘마지막 시련은 룰을 파악하거나 단순한 행운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거야. 그들이 원하는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
앞선 두 시련처럼 어찌어찌 굴러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리 쉽게 마무리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카델은 헤소니아를 도발했다. 그리고 헤소니아는,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그가 바라보는 이는 라이돈. 죽기 살기로 고통을 인내하고 있는 요정이었다.
“나는 나의 실패를 뛰어넘을 영웅을 원한다. 나의 이상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완벽한 유대를 원한다. 새 세계를 밝힐 등불을 원한다.”
그가 허리춤에 찬 검집 위로 손을 올렸다. 스르릉, 쇳소리를 내며 빠져나온 장검의 날이 저울처럼 연결된 두 바닥의 중앙을 가리키고.
“그러니 도전자는 협동하고, 신뢰하고, 희생하라.”
「‘희생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용병단을 떠받친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무게를 재듯 위아래로 덜컹거리는 바닥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델은 점점 위로 떠오르는 바닥을 느끼며, 마지막 시련의 주제를 곱씹었다.
희생.
정확히 어떤 행동을 바라는 것인지는 몰라도, 단어만 봤을 땐 전혀 희망적이지 못했다. 치솟는 불길한 예감에 카델의 표정이 굳어 갔다.
*
저울의 무게는 한쪽으로 완벽하게 치중되어 있었다. 카델과 반이 있는 바닥은 천장과 가까이 올라갔고, 루멘과 라이돈이 있는 바닥은 지면과 가까이 내려갔다.
카델은 처음보다 세 배는 높아진 높이에 질겁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루멘과 라이돈 쪽의 바닥은 조금만 무리하면 무난히 착지할 수 있을 만큼 지면과 가까웠다.
‘단순히 무게 때문에 차이가 벌어진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무엇이 저울의 기울기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의 의문은 떠오른 바닥을 따라 상승한 스텔라가 해결해 주었다.
“이 저울은 여러분이 느끼고 있는 고통의 무게를 재고 있어요. 시련을 진행하며 입었던 상처의 총합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요?”
“상처의 총합……?”
“목표는 저울의 수평! 두 개의 바닥이 완벽한 수평이 되도록 균형을 맞춰 주면 된답니다.”
멍하니 스텔라의 말을 곱씹던 카델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고통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라며. 지금 저울이 이렇게 심하게 치우쳐 있는데, 그걸 수평으로 맞추라는 소리는…….’
상단에 위치한 쪽이 저울이 수평이 될 만큼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는 얘기였다.
“말도 안 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카델이 홱 스텔라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초점을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였으나,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고통의 균형을 맞추라고요? 자해라도 하라는 말입니까?”
“와아,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네요, 카델. 스텔라는 속상해요. 제가 그런 잔인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그럼 대체…….”
“보다 쉽게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스텔라가 도와줄 테니까요. 너무 걱정 말아요.”
일순 스텔라의 주위로 부드러운 무형의 기운이 몰아쳤다. 바람에 가까운 기운을 따라 그녀의 기다란 머리칼이 흩날렸고, 그 틈새로 비친 백안에서는 기이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일이 예상보다 지독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만약 첫 번째 시련의 비밀을 조금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두 번째 시련의 본질을 명확하게 꿰뚫었더라면. 이 편향된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었을까.
뒤늦은 후회와 끔찍한 시련의 정체에 입 안이 바싹 말라 갔다.
반은 피를 토하는 것을 멈추었지만, 대부분의 기력이 소진된 듯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당연하다. 무력으로 제압했다면 똑바로 서기도 힘들 정도로 몰아붙였을 것이 뻔했다. 자신들만 해도 그러지 않았는가.
‘양쪽 다 똑같은 상태라면 몰라도, 나는 아니야. 루멘과 라이돈은 나를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제압했다. 다른 부하들에 비해 받은 고통이 현저히 낮아.’
고마운 일이었으나, 그것이 이런 결과로 나타날 줄 알았다면 멍석말이라도 해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그렇게 카델이 감도 잡히지 않는 시련의 돌파구를 더듬거리는 동안. 스텔라를 감싸던 바람이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무형의 기운.
그를 대신해 등장한 것은, 카델과 반의 위로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마물.
젤리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