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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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그 유명한 적린 용병단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영광이네요. 용병단장께선 영창도 없는 다속성 마법을 사용하신다죠? 이번 기회에 구경해 볼 수 있겠어요.”

제리엘은 딱딱한 소린이나 재수 없는 드레프와 달리 살가운 구석이 있었다. 카델 역시 거부감 없이 부드러운 태도로 그를 대했다. 드레프는 둘의 허물없는 대화에 배알이 꼬인 듯했지만.

“잡담은 그만하고, 용병단은 레드 맨 군단을 정리해. 용병단이 길을 트면 제리엘은 마법진으로 이동하고, 나는 셀레브라는 마족을 맡는다.”

“혼자서 마족을 상대하겠다고? 적린 용병단 앞이라고 폼 잡는 거야, 드레프?”

“흥, 혼자서도 충분해. 용병 도움을 받아 봤자지.”

드레프는 들으란 듯 목소리를 높이며 카델을 흘겼으나, 정작 카델은 별 반응 없이 얌전히 제안을 수락했다. 드레프의 무례함에 발끈한 것은 되려 반이었다.

“저 무개념은 뭐 하는 놈인가요, 단장? 몰래 가서 실수인 척 찌르고 올까요?”

“허락하고 싶은 마음이 드네.”

나름대로 화를 참는 중인지 카델에게만 들리도록 살벌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예전이었다면 진즉에 충돌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것이 기특해 카델은 반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참아. 예전에 말했지? 화내기 전에 열을 세라고.”

“벌써 다섯 번도 넘게 셌어요.”

“착하다, 착해.”

달래듯 말하자 드레프를 노려보던 날카로운 눈빛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내 목표는 드레프나 호계 기사단에게 인정받는 게 아니야. 실적만 올릴 수 있다면 구박을 당하든 핍박을 당하든 전혀 상관없다고.’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 그것이 카델의 최우선 목표였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

그는 미리 동선의 합을 논의하는 두 대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간 없으니 바로 진행하죠. 최대한 일직선으로 길을 터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장 공격을 개시했다.

가장 먼저 전개된 것은 라이돈의 [대동토]. 범위를 대폭 줄인 얼음 마법이 그들과 셀레브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마물의 발목을 붙들었다. 다음으로 혈류검을 개방한 반의 [가시]가 빙판 위를 휩쓸며 놈들의 몸체를 으스러뜨렸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카델의 [화사군]. 수십 마리의 화염 뱀이 빙판길을 녹이며 질주하는 동시에, 반이 처리하지 못한 마물까지 말끔히 불태웠다.

그렇게 단시간 안에 정리된 길목의 끝에는, 정확히 셀레브와 마법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근처의 마물은 미끄러운 빙판과 오라에 묶여 접근조차 못 하는 상황.

“가시죠.”

휑한 정면을 가리키며 뒤를 돌자, 제리엘과 드레프의 넋 나간 얼굴이 보였다. 뒤늦게 카델을 의식한 드레프가 곧장 안색을 바꾸기는 했으나, 제리엘은 용병단이 만든 길을 내달리며 연신 감탄하기 바빴다.

“들은 것보다 더 대단한데요? 오라 사용자와 요정이라……. 부하들 실력도 상당하지만, 전 역시 용병단장님이 마음에 드는군요. 이런 재능이라니, 만약 제국에 라이토스가 건재했다면 분명 그들과 견줄 만큼 대단한 마법사라고 소문이 자자했을 겁니다.”

“……그런가요.”

“뭐, 지금은 다 죽은 역적이니. 비교되면 되는 대로 모욕이겠지만요.”

쓴웃음을 짓는 제리엘의 뒤를 따르며, 카델은 표정 관리에 열중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라이토스 얘기에 심장이 펄떡이는 것이, 조금만 수상하게 굴어도 자신의 신분을 들킬 것 같았다.

한편, 겁도 없이 전장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다섯의 남자를 바라보며, 셀레브는 마법진 위로 흩뿌리던 마기를 천천히 거둬 갔다.

감히 자신을 앞에 두고 정면 돌파를 감행하다니. 참으로 용맹하지 않은가. 가볍게 손목을 돌린 그녀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언제 놀아 줄까 고민했는데. 직접 찾아와 주다니, 못 본 새 인간계의 배려심이 깊어졌나 봐.”

“제리엘! 놈을 끌어낼 테니 바로 시작해!”

마법진 해제를 위해서는 자리를 차지한 마족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이 우선이다. 제리엘을 앞지르며 달려간 드레프가 두 자루의 검을 교차시켜 들었다.

X 자를 그린 검날이 셀레브의 정면을 노렸다. 주의를 끌기 위한 선공.

“으흠, 한주먹 거리.”

셀레브의 눈에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단순한 공격이었다. 드레프의 검술을 한마디로 일축한 그녀가 다가오는 검신을 노리며 주먹을 뻗었다. 그런데 그녀의 주먹이 검신에 닿기 직전, 드레프의 신형이 사라졌다.

“……?”

힘을 잃은 두 자루의 검이 추락하며 셀레브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느껴지는 묵직한 타격감.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저릿한 통증에 그녀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눈앞에서 사라졌던 드레프가 어느새 후방을 점하고 있었다.

“마족 주제에 감히 제국의 영역에 발을 들이다니. 어떻게 튀어나왔는지는 몰라도, 다시 봉인해 주마.”

쌍검은 셀레브의 시선을 교란하기 위한 미끼였을 뿐. 확실한 유효타를 먹인 드레프가 가볍게 도약하며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양 손목에 걸린 팔찌에서부터 은은한 노란빛이 퍼졌고, 함께 빛을 띤 쌍검이 자력에 이끌리듯 드레프의 손안으로 되돌아왔다.

틈을 줘선 안 된다. 근접전에서 중요한 것은 스피드. 검을 단단히 움켜쥔 드레프가 곧장 연계 검술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이 몸은 봉인이라는 단어에 아주 민감해. 곱게 죽고 싶다면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셀레브의 우악스런 손아귀가 교차한 쌍검의 날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그녀의 주먹을 감싼 마기가 사납게 일렁이고, 아무리 힘을 주어도 돌에 박힌 듯 꿈쩍 않는 검날에 드레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게 무슨 괴력이야……!’

단순히 힘이 센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의 육체는 난공불락의 요새라도 되는 양 강대하고도 아득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평생을 내리친대도 흠집이나 날까 싶은, 절로 기가 질리는 압도력.

그에 아차하던 칠나.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쌍검의 날이 부러졌다. 부러뜨린 검날을 거꾸로 치켜든 셀레브가 지체 없이 드레프의 목을 노렸다. 검날의 끝이 반원의 잔상을 남기며 대기를 가르고.

“큭……!”

가까스로 몸을 물린 드레프가 이를 악물었다.

살짝 스쳤을 뿐이다. 보통이라면 갑옷에 흠집을 내는 정도에 그쳤을 타격임에도, 쇄골을 가로지르는 깊은 상흔이 남았다. 마력을 두른 철 갑옷이라는 이중 방어막을 파고든 것이다.

제대로 맞았다면 즉사였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강자를 직면한 드레프의 안색이 흐려졌다. 혼자서 막아 내겠노라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주제에. 전투 시작 몇 분 만에 무기가 부러졌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잡히면 무사하지 못한다. 근접전은 안 돼. 차라리 검기를 사용하는 편이 낫겠어.’

원거리전엔 그다지 자신이 없었으나, 현재로선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쉴 틈을 줬다간 셀레브의 주의를 끄는 일이 어려워진다.

기운을 불어 넣자, 부러진 검날의 위로 노르스름한 검기가 솟구치더니 온전한 검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단숨에 거리를 벌린 그가 셀레브를 향해 교차된 검기를 날렸다.

셀레브는 작은 표정 변화도 없이 검기를 맨손으로 내치며 조금씩 앞으로 걸어왔다.

“뭐야, 이 형편없는 검기는. 예나 지금이나, 검사들은 내 앞에서 맥을 못 추린다니까.”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는 참담한 상황이었으나, 드레프는 차분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물러섰다. 셀레브를 마법진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야 했다.

“본인이 일평생 쌓아 온 무공이 타고난 강자 앞에선 풍전등화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인간의 표정, 본 적 있어? 빌어먹게 못생겼거든. 그리고 난…….”

셀레브는 드레프의 의도대로 착실히 마법진과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또 다른 문제가 드레프를 덮쳐 왔다.

“그 못생긴 얼굴을 꽤 좋아해.”

바로 과도하게 빠른 셀레브의 움직임. 검기보다 빠른 몸놀림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뭣……!”

고위 마족의 날개와 괴물 같은 각력이 합해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든 셀레브가 망설임 없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드레프는 반사적으로 쌍검을 들어 공격을 방어했으나, 그것이 큰 효과는 없으리라고 직감했다.

운이 좋아도 치명상.

최악의 수를 면하기 위해 전신의 힘을 바싹 끌어모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화르륵!

셀레브의 타격 범위를 정확하게 가로막으며, 불의 장막이 등장했다.

“……왜 마법사 놈들은 멸종을 안 하지.”

후끈하게 끼쳐 오는 열기. 드레프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곧바로 용병단장의 모습을 담아낸 그의 진녹색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여전히 뭐가 보이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깊게 후드를 눌러쓴 그가,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과 셀레브를 주시하고 있었다.

“혹시 제가 방해였으려나요?”

목숨 살려 준 것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굴다니. 얄미운 태도였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까지 자존심부터 세울 만큼 못 배워 먹은 놈은 아니었다. 카델이 벌어 준 틈을 놓치지 않고 셀레브의 사정 범위 내에서 벗어난 드레프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할 일 없으면 이쪽이나 돕지 그래, 용병단장.”

“할 일은 아주 많은데요?”

“…….”

“뭐, 그렇게나 간절하게 보시는데 무시하기도 힘들겠지만.”

금세 죽상이 된 얼굴이 몹시도 통쾌했다. 카델은 자꾸만 삐져나오는 비웃음을 억누르며 대기 중인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제리엘 경을 보호해. 라이돈, 넌 가능하면 제리엘 경과 합류해 마법진 해제를 도와라.”

“네, 단장. 전투는 최대한 저 무개념에게 맡기시고요. 알았죠?”

“마법진 해제는 재미없는데. 그냥 싸우면 안 돼, 자기?”

적당한 어르기와 무시로 부하들을 제리엘에게 보낸 뒤. 카델은 드레프와 셀레브의 전투에 오감을 집중시켰다.

반의 당부대로, 카델은 가능한 한 셀레브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생각이었다.

‘가뜩이나 빈약한 몸뚱인데. 잘못해서 주먹에 스치기라도 했다간 바로 빈사 상태지.’

비루한 마법사의 몸으로 일대일의 정면 승부는 무리였다. 그러니 어디 한 군데 부러져도 상관없는 드레프에게 셀레브의 견제를 맡기고, 틈틈이 데미지를 넣는 방식이 나았다.

“드레프 경! 방어는 생각하지 말고 싸우십쇼!”

“뭐? 맞아 죽으라는 소리야?”

“이 상황에서 제가 그런 소릴 하겠습니까?”

저 용병의 무엇을 믿고 방어를 맡긴단 말인가. 힘을 빌리는 것과 의지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그 때문에 드레프는 방어에 편중된 소극적인 전투법을 고집하려 했으나.

‘……아예 못 쓸 건 아니네.’

방어할 새도 없이, 셀레브의 모든 타격점을 가로막는 불의 장막이 생성되고 있었다. 정확히 주먹 하나만을 막아 내는 최소 범위의 장막. 셀레브의 공격 타이밍과 속도에 맞춘 즉각적인 장막이 드레프를 보호했다.

무영창의 마법사라는 것이 뭐 얼마나 대단한가 했는데. 실로 대단했다. 쉴 틈 없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장막의 향연은 도통 현실감이 없었다. 마법사 여럿이서 오로지 자신만을 보좌해 주고 있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칫.”

결국 드레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용병단장은 그 소문만큼이나 뛰어난 마법사라는 걸.

드레프는 방어에 급급했던 좀 전의 태세를 전환하곤 좀 더 공격적인 동작을 취했다. 부러진 검날에 덧댄 검기가 셀레브의 왼쪽 팔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대부분의 무게중심을 오른쪽에 두고 있어. 왼팔을 휘두를 힘을 끌어오기 위해서다. 아무래도 왼손잡이 마족인 모양이니, 가장 먼저 이 팔을 부러뜨려 주지.’

온몸이 무기인 격투가는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전체적인 힘의 균형이 기울게 된다. 무너진 곳이 주로 사용하는 부위라면 더더욱. 지금처럼 장막을 앞세워 공격을 퍼부을 수만 있다면, 승산은 확실히 있었다.

‘용병단장도 그렇게 판단했을 거고.’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고 방어를 돕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것이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분담이었다.

남은 것은 차근차근 셀레브를 공략하며 마법진 해제를 위한 시간을 버는 것.

“맛있는 건 가장 마지막에…가 내 신조였는데 말이지. 이건 안 되겠어. 더는 열받아서 못 버티겠다고.”

그러나 셀레브는 드레프의 희망적인 계획을 배반했다. 내내 그를 향해 있던 셀레브의 시선이, 살벌한 기운을 띠며 휙 돌아갔다.

무시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이토록 완벽하게 자신의 모든 공격을 차단하다니. 신경을 긁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그녀의 살기 어린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카델이 멈칫하며 몸을 물렸다. 드레프가 서둘러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그가 제대로 몸을 날리기도 전, 셀레브의 신형이 카델에게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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