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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은 정말 이슬을 먹고 삽니까?”
드레프는 셀레브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제리엘은 합류한 용병단원과 함께 마법진을 찾았다. 그리고 현재. 광전사의 엄호 아래서 요정과 마법진 해제를 시도하는 중이었다.
본래라면 불필요한 대화는 일절 나누지 않았겠지만, 지금 그의 옆에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요정이었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요정이 코 옆에 있는데.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할 일만 하는 것은 제리엘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바보야? 이슬만 먹고 어떻게 살아.”
“역시 허구였군요! 하긴 그렇죠. 숲이라면 열매나 약초 같은 것도 많을 텐데, 그중에서 이슬만 골라 먹는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럼 라이돈 씨는 뭘 좋아하시나요?”
“단거.”
“아아, 아쉽네요. 급히 오지만 않았어도 사탕이 있었을 텐데. 보통 한두 개씩 챙겨 다니거든요. 아이들이 있으면 주려고요.”
“으음, 안 궁금해.”
제리엘의 일방적인 관심이 안쓰러워지는 대화였다. 반은 두 마법사의 잡담을 배경음 삼아, 근처를 스쳐 가는 레드 맨을 모조리 옭아맸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틈틈이 저 너머의 마족을 살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쪽에 있는 카델을.
‘아무래도 단장 옆에 무개념밖에 없다는 게 신경 쓰이는데.’
말투와 행동은 물론 숨소리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시적인 협력이라고는 해도 주기적으로 치솟는 살의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반이 주의를 분산하며 집요하게 카델의 전투를 관망하고 있던 때.
“……단장.”
내내 한곳을 향하고 있던 셀레브의 살기가, 향해선 안 될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반이 몸을 날린 것은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으윽……!”
하반신을 타고 얼얼한 충격이 전해졌다. 카델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곳에는, 살벌한 낯으로 주먹을 내지르는 셀레브와 공격을 막아 내는 반이 서 있었다. 오라를 두른 대검의 면이 방패가 되어 가까스로 타격을 방어했다.
야수처럼 달려드는 셀레브의 기세에 주춤했던 순간, 반이 달려와 그를 밀쳤다. 만약 반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어떤 결과가 벌어졌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반!”
“떨어지세요, 단장!”
카델의 부름에 반이 사납게 외쳤다. 꽉 다물린 턱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반은 전신의 오라를 모조리 끌어 올려 셀레브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다. 고작 주먹질 하나를. 그럼에도 온 근육이 경직될 수준의 힘이 들어갔다.
오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셀레브의 마기와 접촉한 오라의 파동이 거세지며 정신이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준비된 것 이상의 오라가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몸은 오라를 좋아해. 본인의 육체를 좀 먹는 힘인 줄도 모르고 써 대는 꼴을 보면, 웃음이 멈추질 않거든.”
대검을 짓누르던 왼손의 마기가 옅어졌다. 함께 약해진 압력의 반동으로 대검이 가볍게 흔들리고, 기회를 포착한 반이 셀레브와의 거리를 벌리려던 순간.
“바로 지금처럼!”
예고 없이 뻗친 오른 주먹이 대검을 강타했다.
이번에는 한 방이 끝이 아니었다.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속공. 셀레브의 주먹질이 쉴 틈 없이 몰아치며 오라와의 충돌을 반복했다. 회피할 시도조차 할 수 없는 파괴력과 속도는,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다.
온몸이 산산이 바스러질 듯한 고통. 육체가 도자기처럼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된 듯 매분 매초 섬뜩한 타격감이 느껴졌다. 난생처음 마주하는 충격적인 괴력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무너질 순 없었다.
‘버텨야 한다.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다음은 단장이야.’
이곳에서 확실하게 셀레브의 주의를 빼앗지 못한다면, 그녀는 가장 거슬리는 존재인 카델을 처리하려 들 것이다. 드레프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든 방어를 카델의 장막에만 의지한다면 셀레브의 주의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판단을 내린 반이 임계치 이상의 오라를 끌어 올렸다. 대검에서부터 파생된 가시가 사슬처럼 셀레브의 팔목을 휘감았다. 마기를 파고든 오라가 맹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는 기어코 마기를 뚫어 살갗을 긁어내는 가시를 거칠게 떨쳐 내고는, 희번득 눈을 빛냈다.
“적당히 놀다 버리려고 했는데……. 미리 없애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네.”
짙어진 반의 오라를 따라 셀레브의 마기 또한 어두컴컴하게 물들었다. 두 종류의 힘이 격돌하며 만들어 내는 충격파가 주변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카델은 그 위협적인 기운의 폭풍 속에서, 서슬 퍼런 눈으로 그들의 전투를 주시했다. 모든 공격을 막아 내면 반이 주의를 끌어 준 보람이 없어진다. 결정적일 때에 완벽한 엄호를 해 주는 것. 지금은 그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런 카델의 옆에는 드레프가 있었다. 자신을 보좌하던 마법사를 지키지도 못하고, 상대하던 적까지 빼앗겼다. 그것만으로도 분통이 터지는데.
“제기랄, 끼어들 틈이 없잖아!”
잘 벼려진 칼날처럼 살벌하게 드리운 기운 때문에 싸움에 끼어들기가 녹록지 않았다. 섣불리 검기를 날렸다간 용병이 다칠 수도 있었고, 마기나 오라에 튕겨 나가 아군을 해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드레프가 전전긍긍하며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내려 애쓰는 동안. 카델은 반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오라의 색이 심상치 않아.’
격렬한 전투라고는 해도 오라의 움직임이 너무 빠른 속도로 과격해지고 있었다. 반은 최종 각성을 마친 광전사다. 아무리 많은 양의 오라를 끌어 썼다고 해도 벌써부터 폭주의 전조가 보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마기 때문인가?’
오라와 마기는 각기 다른 기운이었으나, 서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특히 오라처럼 소유자의 정신을 좀먹는 특수한 힘이라면 외부의 자극에 좀 더 예민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반과 셀레브의 전투가 오래 이어지도록 둘 수 없다.
「퀘스트 성공 확률: 17%」
아직 마물과 마족, 둘 중 어느 곳에도 확실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초반부터 위태로운 싸움을 이어 가게 해서는 안 됐다.
카델의 시선이 드레프를 향했다.
“제가 전신을 보호하는 장막을 만들어 드리면, 지금 당장 저 마족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겠습니까?”
“뭐? 아무리 장막이 있어도 당장 유효타는……. 틈을 노려야지.”
“자신 없으면 제가 직접 움직이고요.”
“뭐, 자, 자신이 없어?”
“저 마족은 지금 제 부하를 죽이는 데 혈안이 됐습니다. 그 살기를 움직일 정도의 타격을 줄 수 없다면, 이 전투에서 당신을 배제하겠다는 얘깁니다.”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한 태도에 드레프의 입이 벌어졌다. 어디에도 그를 무시하거나 얕보는 기색은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존심이 상하는 발언이었다. 그에게 전장에서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
한낱 용병에게 이런 소릴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드레프가 무어라 화를 내기도 전.
“당신 자존심에 내 사람을 희생시킬 생각 없습니다. 성질 받아 줄 시간 없으니 빨리 대답하세요.”
후드 아래 반쯤 드러난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흔들림 없는 시선. 그곳에 자리한 냉철함은 드레프의 기를 누르기에 충분했고, 결국 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무식한 기운을 파고들 수만 있으면 돼.”
“좋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드레프를 감싸는 바람의 장막이 생성됐다. 짧게 호흡한 드레프가 부러진 쌍검의 위로 검기를 덧씌웠다.
더 이상의 추태는 사양이었다. 다짐한 그가 망설임 없이 마기와 오라의 폭풍 속에 몸을 던졌다.
두 종류의 기운이 짐승의 발톱처럼 사정없이 장막을 할퀴어 댔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양쪽에 담긴 살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드레프는 그 지독한 살기 속에 기척을 숨긴 채, 셀레브의 후방으로 접근했다. 다행히 그녀의 모든 감각은 반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를 제외한 모든 것을 차단한 것처럼 공방을 이어 가기 바빴다.
‘나보다 저 용병에게 구미가 당겼단 건가.’
묘하게 분한 마음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드레프는 한 자루의 검을 위로 힘껏 던져 올렸다. 그리고 남은 한 자루의 검을 치켜들고 셀레브의 후방으로 달려들었다. 단단히 응축된 검기가 군더더기 없는 궤적을 그리며 그녀의 날갯죽지를 노리고.
공격이 날개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라고 판단한 순간.
“아아, 거슬리게 하지 말란 말이야!”
가시를 다발로 움켜쥔 셀레브가 휙 뒤를 돌았다. 드레프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팔을 뻗자, 반의 대검과 이어져 있던 가시가 단숨에 뜯겨 나갔다. 그러나 셀레브의 주먹은 드레프를 치지 못했다.
푸욱.
“……허?”
미리 던져 두었던 한 자루의 장검이, 정확히 셀레브의 어깨를 꿰뚫었다. 근육을 관통한 샛노란 검기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족 주제에 자만하지 말라고.”
드레프의 팔찌 위로 노란 기운이 퍼졌다. 무기를 불러들이는 마법이었다. 그의 부름을 따라 셀레브의 어깨에 꽂혀 있던 검이 뽑혀 나가며, 보라색 핏물이 흩뿌려졌다.
갑작스런 치명상에도 셀레브의 얼굴에는 고통이 아닌 굳은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울컥 피를 쏟아 내는 어깨를 확인하고는, 다시 드레프를 보았다.
고요한 눈길이 그를 집어삼킬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였으나, 드레프도 반도. 누구 하나 섣불리 그녀를 공격하지 못했다.
마기 때문이었다. 굳은 듯 멈춰 있는 몸과는 달리, 그녀를 둘러싼 마기의 흐름이 폭발적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반은 마기를 따라 하듯 멋대로 몸집을 불리려는 오라를 제어하려 애썼고, 드레프는 실시간으로 찢겨 나가는 장막의 파편을 확인했다.
그리고 셀레브는.
“좋아, 좋아. 이렇게까지 죽고 싶어 환장했다는데. 이 몸이 친히 자비를 베풀어 주지.”
본인과 드레프를 가두는 새까만 구체를 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