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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마법진 해제를 맡은 제리엘과 라이돈. 두 남자의 사이에도 좋지 못한 징후가 나타났다.
“잠, 깐만요…… 뭔가 이상…….”
상당히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얽힌 마력이 일반 마법진의 10배 이상이었고, 구성도 치밀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난해했다.
그러나 복잡한 만큼 붕괴는 확실했다. 얽힌 마력이 많으니 가닥을 잡는 대로 끊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해제 자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응? 뭐야, 왜 그래. 하기 싫어졌어?”
라이돈의 의아한 시선이 마법진 위로 쓰러지듯 머리를 박은 제리엘을 향했다.
반이 카델을 도우러 떠난 뒤, 마법진 해제보단 카델 쪽의 전황을 살피는 데 주력했던 그였다. 라이돈 역시 마법진의 해제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 판단했고, 그렇기에 설렁설렁 마력을 주입하며 마족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인간이 쓰러졌다. 웅크린 등이 경련하며 바닥을 짚은 손끝이 거칠게 지면을 긁어내렸다.
“커헉…컥, 마, 마력이…….”
제리엘의 입 밖으로 울컥 핏물이 쏟아졌다. 핏물을 한 바가지나 토해 낸 제리엘이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각혈은 멈추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코와 눈, 귀처럼 구멍 난 곳에선 전부 피가 흘러넘쳤다. 실로 흉측하고 섬뜩한 장면이었다. 라이돈은 그런 제리엘의 상태를 살피며 작게 미간을 구겼다.
“너…….”
마법사가 내상을 입어 각혈하는 경우, 원인은 딱 두 가지였다.
마력 고갈, 혹은 마력 폭주.
마력 고갈은 말 그대로 체내의 마력을 한계 이상으로 긁어모아 마력관에 무리를 가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
마력 폭주는 그 반대였다. 마력관에 한계 이상의 마력이 흘러들어 팽창된 마력관에 손상이 생겼을 때. 뼈와 근육, 내장이 마력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이다. 라이돈이 에르고를 갈가리 찢었던 기술, [시혼빙극]이 바로 마력 폭주의 원리를 이용한 공격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력 폭주의 원인은 주로 외부에서 발생한다. 누군가 일부러 마력을 주입하지 않는 한, 마력관이 팽창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법진에 함정이 있었나 보네.”
마법진의 해제를 막기 위한 함정이 있었다. 그것 말고는 제리엘의 상태를 설명할 수 없었다. 부지런히 마법진을 해제한 결과로, 정직하게 지뢰를 밟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력 폭주는, 대상의 사망 전후를 가리지 않고 외부에 심대한 피해를 입힌다는 점에서 악질이었다. 대상이 강한 힘을 가진 마법사라면 더더욱.
“도망, 도망 가십…… 크아악!”
제리엘이 짚은 땅바닥에서부터 강한 진동이 울렸다. 라이돈은 그를 중심으로 쩍쩍 갈라지기 시작하는 지면을 바라보며, 막연히 생각했다.
‘대지계 마법사가 폭주하면 지진이 나는구나?’
셀레브의 검은 구체는 내부의 모습이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기척 역시 마찬가지. 새까맣게 물든 마기는 쇳덩이처럼 단단하게 내부를 보호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숨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못했다.
셀레브는 의도적으로 드레프를 가뒀다. 감히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건방진 인간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긴박한 상황인데.
“이건 또 무슨 난리야……!”
난데없는 지진이 발생했다. 카델은 정신없이 흔들리는 땅 위에서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그의 앞에서 반은 끊임없이 구체 파괴를 시도하고 있었다. 지면의 흔들림은 그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듯했다.
마기와 충돌한 오라는 육안으로도 확인될 만큼 흐름이 광폭해졌다. 그만큼 파괴력 또한 상승했으나, 그럼에도 반의 공격은 구체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지 반의 공격은 점점 거칠어졌다. 힘의 분배가 어설펐고, 오라의 제어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언제 폭주의 전조가 보인대도 이상할 게 없다. 카델은 비틀거리는 몸을 움직여 가까스로 반과 구체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정신 차려, 반!”
예상에 없던 카델의 등장에 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의 대검은 누군가의 방해를 염두에 두지 않았고, 성난 궤적은 정확하게 카델을 내리찍었다. 당연히 카델은 끼어들 때부터 장막을 두른 상태였으나, 공격이 차단됐음에도 반은 자신의 검이 카델을 향했다는 데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떨어뜨릴 뻔한 대검을 간신히 움켜쥐고는 빠르게 카델의 안색을 살폈다.
“다, 단장. 괜찮아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전투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오라가 이 모양인데. 또 폭주하고 싶어?”
카델이 반의 주변을 안개처럼 두른 검붉은 오라를 날카롭게 훑어 내리자, 구박받은 강아지처럼 풀죽은 얼굴이 드러났다.
“죄송해요. 조절하려고는 하는데, 마기에 감화된 건지 평소보다 통제가 어려워서…….”
“이딴 마기에 휘둘릴 만큼 약한 힘 아니잖아.”
카델은 반의 한쪽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이곳에서 자신의 가장 큰 신뢰를 받는 부하는 그였다. 벌써 이런 식으로 흔들려선 곤란했다.
가라앉은 눈빛이 전장의 동태를 훑었다.
호계 기사단은 여전히 레드 맨 군단을 상대하고 있었고, 언뜻 우세한 듯 보이나 관문 근처까지 도달한 마물의 수가 적지 않았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셀레브의 명령을 이행하기 시작한다면 관문 보호가 버거워질 것이다.
마법진 해제를 맡은 제리엘과 라이돈 쪽은 대충 훑어봐도 위기 상황이었다. 저곳이 바로 지진의 근원지.
제리엘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지의 마력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라이돈의 마력은 필요 이상의 격차를 벌리며 대지의 마력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단순히 마법진 해제를 위한 움직임은 아니다.
‘마력 폭주인가.’
마력 폭주에 관한 것은 마밀에게 배워 잘 알고 있었다. 대체 뭐 때문에 폭주를 겪고 있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군에게까지 피해를 줄 것이 자명했다.
‘잘 풀리고 있는 곳이 없잖아.’
관문 보호, 마법진 해제, 셀레브 토벌. 셋 중 어느 문제도 무사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셀레브를 상대한 뒤로 더딘 상승세를 보이는 기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에 없이 까다로울 거란 건 이미 예상하던 바야. 일이 안 풀린다고 패닉에 빠져 있을 수는 없지.’
이것은 지금까지 헤쳐 왔던 그 어떤 퀘스트보다 중요했으며, 실패의 상상조차 용납될 수 없는 메인 스토리였다. 카델은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날카롭게 벼려진 신경으로, 차분하게 전황을 파악했다.
단단하게 뭉친 눈빛이 다시금 반을 향했다.
“내가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너와 라이돈, 단둘뿐이야. 그러니 어떻게든 이성 붙들고, 끝까지 내 옆에서 싸워. 알겠어?”
카델의 눈빛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신뢰와 선명한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결코 패배할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여느 때보다도 강렬한 예기. 이런 카델에게 실망을 안겨 준다는 것은,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불안정하던 오라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카델도 꽉 쥐었던 어깨를 놓았다.
“……좋아. 마법진 쪽은 라이돈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 구체를 파괴한다. 드레프를 꺼내야 해.”
라이돈 홀로 마력 폭주를 겪는 마법사를 감당하게 두는 것이 불안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를 구속하는 봉인은 없다. 본래의 힘을 되찾은 그는 분명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카델은 라이돈을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