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521)

*

“자꾸 땅 흔들지 마. 너 때문에 카델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목숨으로 책임질 거야?”

라이돈이 제리엘의 목덜미를 꾹 내리누르며 투덜거렸다. 지진의 원인이 제리엘인 만큼, 그들이 선 땅에서 다른 어느 곳보다도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땅이 갈라져 추락할 것 같은 살벌한 울림이었으나, 다행히 그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다. 라이돈이 제리엘의 마력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대지의 마력을 덮듯이 펼쳐진 얼음 장막. 상당한 양의 마력을 퍼부은 장막은 돔의 형태를 띠며 두 남자를 가뒀다. 만약 이 장막이 깨진다면 제리엘의 마력은 전장의 대지를 모조리 깨부술 것이다. 아비규환이 되는 건 시간문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으나, 사실 라이돈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땅이 갈라지면 날면 되니까. 평소였다면 지진이 나든 말든 신경 끄고 제리엘의 마력 폭주를 관망했을 테다.

그러나 이곳에는 카델이 있다. 날개 없는 가련한 인간은 땅 없이는 몸을 가눌 수 없다. 그러니 폭주에 휘말리도록 두고 볼 순 없었다.

“으음, 그냥 죽여 버릴까. 그게 더 쉬울 텐데.”

마력 폭주를 억제하는 작업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그보다는 제리엘을 죽인 뒤, 시체에서 범람하는 마력을 처리하는 편이 더 간단했다. 힘깨나 쓰겠지만 지금의 라이돈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카델이 걸렸다.

“……싫어하려나?”

그냥 죽여서 없애면 편해질 일들을, 굳이 어렵게 돌아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자신의 인간은 사람의 목숨에 민감했다. 인간 몇의 마물화를 막겠다며 전력으로 몸을 날리던 때만 돌아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살릴 방법이 있음에도 죽였다는 사실을 알아내면, 단단히 화를 낼지도 몰랐다. 화가 난 카델도 재미있긴 하나, 역시 웃는 얼굴이 더 귀엽다.

고민은 짧았고, 결론은 명쾌했다.

“우리 자기는 정말 번거롭단 말이지.”

목덜미를 압박하던 손을 떼어 내자 제리엘의 경련이 심해졌다. 칠공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그의 모습이 불쌍할 법도 하건만, 라이돈은 생글 웃으며 가차 없이 그의 몸뚱이를 뒤집었다. 바로 누운 제리엘의 가슴 위로 라이돈의 손끝이 닿았다.

폭주를 억제하는 동시에 마법사의 목숨을 구제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폭주 대상자 본인의 힘으로 마력을 갈무리해 온전히 흡수하거나, 타인의 힘으로 마력관의 수용량을 넘긴 마력을 빼내야 한다. 두 가지 모두 고난이도의 작업이었으나, 특히 두 번째 방법은 폭주 대상자보다 상대방의 위험이 더 컸다. 대상자의 마력을 직접 흡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본인 마력관의 수용량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폭주를 막기는커녕 폭주자가 두 명이 되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못 버티고 싱겁게 죽어 버리면 안 된다? 예쁨 받아야 한단 말이야.”

위험 부담이 큰 시도임에도 라이돈의 얼굴에선 긴장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무조건적인 성공을 예감하는 여유마저 떠올라 있었다.

“자아, 빨리 낫자.”

*

눈가를 덮은 핏물을 닦아 내며, 소린이 전방을 응시했다.

‘심상치 않군.’

제리엘과 드레프. 두 대대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은 요정의 것으로 추정되는 얼음 장막 안에. 다른 한 명은 마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체 안에 갇혀 있다.

두 대대장과는 수많은 전장을 휩쓸며 자주 합을 맞춰 왔다. 제리엘은 제국이 주목하고 있는 마법 명가의 인재였고, 드레프는 개성 강한 전투법을 구사하며 어린 나이에 대대장의 자리까지 오른 신성이었다. 작지 않은 위기 속에서도 그들은 언제나 살아남았다. 처음에는 개성 강한 성격 탓에 자주 충돌하기도 했으나, 소린은 차츰 인정하게 되었다. 그들은 호계 기사단의 대대장을 맡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그들을 믿었다. 고전을 예상했을지라도 죽음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제1대대! 토벌을 멈추고 관문 앞으로 이동하라!”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것은 일평생 질리도록 생사를 넘나들었던 기사의 직감이었다.

그는 여전히 전장을 활보하는 레드 맨 군단의 숫자를 셈하며 부하들을 이끌었다.

기사들은 부지런히 마물의 숫자를 줄이고 있었으나, 일관성 없이 퍼진 마물 군단의 위치는 효율적인 토벌을 방해했다. 그 증거로 슬슬 관문 코앞까지 접근한 레드 맨이 속출하고 있었다.

‘레드 맨은 관문 앞에 도달하기 전까지 전진만 한다는 건가?’

‘예. 하지만 도착하는 즉시 공격성을 띱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투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군단의 접근을 허락하면 관문의 보호가 힘들어질 겁니다.’

물량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 마물이다. 그들에게 공격성까지 생긴다면 전투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었다.

관문에 다다른 소린이 도열한 부하들을 향해 말했다.

“최전방의 마물은 제4대대, 제5대대에게 맡긴다. 너희는 이곳에서 빠져나온 마물을 처치해. 한 마리도 놓쳐선 안 된다. 목숨을 걸고 제국의 관문을 수호하도록!”

격한 전투에도 지치지 않은 절도 있는 외침이 귀청을 울렸다. 소린은 관문을 둘러싸며 흩어지는 기사들의 틈에서, 가장 발이 빠른 부하 한 명을 찾아 불러 세웠다.

“혼, 너는 지금 당장 성으로 복귀해 황제 폐하를 찾아가라. 고위 마족과 마물의 특징을 설명하고, 치유사와 기사단의 추가 지원을 요청해.”

“알겠습니다, 대대장님!”

현재 호계 기사단의 단장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지원이 온다 해도 여전히 지휘권은 그에게 있을 것이고, 책임 또한 여전했다.

명령을 하달한 그는 용병단과의 합류를 결정했다. 관문의 보호가 일 순위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으나, 지금은 감을 따라야 할 것 같았다.

제리엘과 드레프. 두 대대장의 사이에서 고민하던 소린은 결국 정체불명의 검은 구체를 택했다. 용병단장이 있는 방향이었다.

반의 검기와 카델의 화염 마법이 사납게 구체를 갉아 갔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흠집조차 남지 않던 것이, 슬슬 끈질긴 공격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기가 닿을 때마다 구체는 크게 진동했고, 폭발이 일 때마다 균열이 번졌다. 카델은 언제든 드레프를 보호할 수 있는 마법을 장전해 둔 채 화염구를 물처럼 뿌려 댔다. 점점 벌어지는 균열을 살피는 눈빛이 매서웠다.

‘이곳에서 호계 기사단의 대대장이 죽게 놔둘 순 없어. 분명 일이 꼬일 거다.’

만약 드레프가 죽는다면 그 이유는 셀레브일 테지만, 기사단이 용병단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묻지 않는다 해도, 그들이 계속 용병단의 도움을 필요로 할지가 미지수이기도 했다.

반대로 이곳에서 드레프의 목숨을 구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받게 될 테다. 카델은 그런 지극히 계산적인 이유로 드레프를 구하려 했다.

“반, 준비해!”

균열의 너비는 충분했다. 조금만 충격을 주어도 껍데기가 벗겨지리라. 그러나 드레프의 안위를 걱정하여 소심하게 구체를 부순다면, 먼저 이상을 눈치챈 셀레브가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강력한 한 방.

명령을 들은 반은 곧장 검기의 응축을 가속했다. 대검의 날에 고인 오라의 색이 점점 짙어지고. 새빨갛게 물든 검신이 낮은 울림 소리를 내며 오라와 공명했다.

“준비됐어요, 단장.”

“네 공격을 보조해 줄게. 신호 주면 바로 날려.”

반의 검기는 강했으나, 카델은 그 이상을 원했다. 그는 검기에 스피드와 폭발력을 실어 줄 계획이었다.

‘화염과 바람 정도면 되겠지.’

단번에 두 속성 마력을 끌어 올렸다. 날카로운 시선이 일렁이는 흙먼지 너머를 응시했다.

귓가를 시끄럽게 울리는 기사들의 함성, 여전히 대지를 진동시키는 마력의 흐름, 조금 가빠진 자신의 호흡. 모든 것을 천천히 밀어 내며 집중했다.

그리고 가라앉은 흙먼지 사이로 균열의 중심이 드러난 순간.

“지금!”

대기하던 반의 검기가 1초의 오차도 없이 날아들며, 두 속성 마법이 검기를 휘감았다. 뒤에서부터 불어온 돌풍은 검기의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공격을 균열의 정중앙으로 이끌었고, 강렬한 불꽃은 불그스름한 검기를 감싸며 몸집을 불렸다.

마법에 싸인 검기가 흐릿한 잔상을 남긴 채 구체의 위를 파고들었다. 집요한 공격으로 만들어 낸 구체의 유일한 약점. 카델은 자신의 마법에 마력을 퍼부으며 검기의 소멸을 막았다.

균열은 반의 검기를 버티지 못했다.

쩍. 쩌적.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균열이 구체 전체로 번졌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부터, 지독하리만치 농도 짙은 마기가 새어 나왔다.

‘뭐야, 저건.’

대량의 마기는 마치 연막탄처럼 그들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델은 시야가 차단되는 상황 속에서도 검기의 보조를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콰아아아—

검기가 완벽하게 구체를 갈랐다. 시원스러운 궤적을 남기며 사라진 검기를 확인함과 동시에, 구체의 내부에 숨어 있던 마기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살갗에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따끔거렸다. 새까맣게 물든 마기는 기운이라기보단 독에 가깝게 느껴졌다. 카델은 시큰한 눈을 부릅뜨며 드레프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폭발한 마기는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해 갔다.

“단장! 제 쪽으로 오세요, 혼자는 위험―!”

검어진 사방과 함께 반의 외침이 뚝 끊겼다. 급히 눈을 돌렸으나 역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카델은 어둠에 가까운 마기 속에서 주춤거렸다.

‘드레프도, 반도 보이지 않아. 기척조차도…….’

시야는 물론 소리까지 들리지 않았다. 근방을 가득 채우던 함성은 섬뜩한 고요 속에 잡아먹혔다. 오감을 상실한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기의 특성인 건가?’

같은 마기를 사용하는 가르엘의 스킬 중엔 상대의 오감을 차단하는 기술 같은 건 없었지만. 셀레브는 진짜배기 고위 마족이니, 특별한 마기를 다룰지도 몰랐다.

‘셀레브의 기술은 대부분 체술로 이루어져 있었지. 마기는 파워를 높이거나 근접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어막 대용쯤으로 사용하고. 그중에서 이런 식으로 기척을 지우는 기술은…….’

카델은 필사적으로 셀레브의 스킬을 되짚었다. 지겹도록 많이 상대했고, 지겹도록 많이 당해 봤다. 큼직한 패턴을 제외하고는 스킬의 조합이 랜덤인 보스인 만큼, 사용하는 스킬의 개수도 많았다.

그리고 그 무수한 스킬 중, 최소 한 턴 전에는 미리 보호막을 둘러 둬야만 데미지를 피할 수 있는 스킬이 있었다.

‘……검은 손아귀.’

회피가 전혀 먹히지 않는 스킬로, 탱커 포지션이 아닌 이상 타격 즉시 즉사급 데미지를 입게 된다.

‘검은 손아귀를 전개하기 전의 셀레브는 뿜어내는 마기의 양이 범상치 않았어.’

셀레브 캐릭터를 감싼 마기의 양과 색으로 미리 공격을 예측해 장막을 두르는 것이 공략법이었다. 만약 이 무식한 양의 마기가 [검은 손아귀]의 전조라면.

‘이런 거지같은……!’

자신과 반, 드레프 중 누구를 노리고 달려들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카델은 아군의 위치도 몰랐다. 혹시라도 마기의 범위가 마법진까지 닿아 있다면, 제리엘과 라이돈 역시 위험했다.

카델은 일단 침착하게 본인의 몸에 장막을 둘렀다. 그리고 마기 속을 헤치며 닥치는 대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셀레브의 마기 속에 있는 한, 그녀 몰래 이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깃이 되는 걸 피하려 숨는 것보단 어떻게든 아군을 찾아 장막을 둘러 주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카델이 몇 걸음을 떼기도 전.

툭.

발끝으로 무언가 단단한 것이 걸려 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일렁이는 마기 너머로 어렴풋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드레프 경?”

드레프였다. 바로 쭈그려 앉은 카델이 가장 먼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죽었나?’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의 몰골이었다. 그나마 얼굴은 비교적 멀쩡한 축에 속했으나, 목 아래부터는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입고 있던 갑옷은 전부 깨져 이음새가 덜렁거렸고,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핏물이 흥건했으며, 오른쪽 팔다리는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도저히 생존을 믿을 수 없어 축축한 가슴팍 위로 귀를 대 보았다. 사방의 기척이 사라진 덕에 고동은 비교적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죽지는…… 않은 것 같네.’

비록 입김 한 번에 꺼질 것 같은 희미한 생명력이긴 했으나, 아직은 죽지 않았다.

“대체 안에서 무슨 짓을 당한 거야.”

구체 안에서 얼마나 지독한 싸움을 벌였기에 제국의 기사가 이런 꼴이 되었다는 말인가. 새삼스럽게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 죽기 전에 어떻게든 드레프를 기사단에 넘겨줘야 할 텐데.’

그를 살리려면 당장 치유사를 불러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드레프를 운반하는 것도, 치유사를 요청하는 것도. 전부 이 마기 속을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마기를 거두기 전에 무조건 [검은 손아귀]를 사용할 거야. 굳이 다 죽어 가는 드레프에게 힘을 낭비할 것 같지는 않고. 가장 유력한 건…….’

구체와 가장 근접해 있던 자신과 반. 카델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쓰러진 드레프의 위로 장막을 두르고, 자신의 장막 위로는 화염의 마력을 흘려보냈다. 불의 장막은 시야 확보가 불편했으나, 이 불빛으로 반이 자신을 찾아내기를 바랐다. 늦기 전에 어떻게든 반을 찾아 장막을 둘러 줘야 한다.

그 일념하에 다시금 따가운 마기 속을 헤집던 카델이었으나. 그가 반을 찾아내는 것보다, 셀레브의 마기가 흩어지는 것이 빨랐다.

퍼지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그라지는 마기. 점점 밝아지는 시야를 따라 주변의 기척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기합 소리, 검날이 살가죽을 가르는 소리, 뿌연 연기의 매캐한 냄새가 차례차례 공간을 채워 가고.

카델은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마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셀레브의 [검은 손아귀]가 무사히 목표물을 타격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카델이 찾아낸 이는 드레프 한 명뿐이었는데.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눈빛이 급작스레 귀청을 때리는 거친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너희 때문에 진도가 안 나가잖아!”

누군가를 방패처럼 치켜든 채 달려드는 셀레브가 보였다. 그러나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녀의 신형도, 전신을 새까맣게 물들인 살벌한 마기도. 그 순간만큼은 카델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카델이 담아내는 것은 오직 한 사람. 셀레브의 손에 들린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반.”

축 늘어진 반의 고개가 셀레브의 속력을 버티지 못한 채 훅 꺾였다. 그리고 정면으로 드러난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전부 죽어 버려!”

카델은 불의 장막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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