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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델은 가르엘이 묵고 있는 객실에 발을 들였다. 이동하는 내내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으므로,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카델의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덕도 컸다.
그렇게 도착한 객실에서, 가르엘은 테이블 앞의 의자를 빼 카델을 앉혔다. 그러고는 수납장과 가방, 외투의 이곳저곳을 뒤지더니 작은 약통 하나를 찾아서 돌아왔다.
“상처에 약부터 바르죠.”
“……저요?”
“일단 제 몸엔 상처 하나 없으니, 네. 카델 경이요.”
피식 웃은 가르엘이 약통의 뚜껑을 열고는, 하얀 연고를 손끝으로 퍼 올렸다. 그의 시선이 카델의 어리둥절한 얼굴에 닿았다. 어지간히 급한 상황이었는지, 본인 얼굴에 생채기가 생긴 것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장미 가시에 긁혀서 얼굴이 엉망이에요. 심한 상처는 아니지만, 약을 발라 둬야 덧나지 않죠.”
“아, 괜찮아요.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좋아하는 얼굴에 흉이 남는 걸 지켜보는 제 마음은 찢어지게 아프답니다.”
과장되게 슬픈 표정을 짓자 카델이 참지 못한 짜증스러움을 드러냈다. 물론 도움받은 입장인지라 표정은 금세 풀어졌다.
가르엘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생채기 위에 연고를 펴 발랐다. 얌전히 제 손길을 받아들이는 순한 얼굴을 보며, 가르엘이 농담처럼 말했다.
“이런 거 바를 시간에 치유술이나 써달라는 얘기는 안 하네요?”
“……제가 경에게 그런 건방진 말투를 사용했던 기억은 없는데요. 이런 자잘한 상처에 아까운 마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죠.”
“음, 기특해라.”
작게 웃은 그가 뚜껑 닫은 약통을 침대 위에 대충 던져두었다. 설명을 들어야겠다며 카델을 끌고 온 것치고는 별다른 질문도 없었다. 그는 카델을 추궁하는 대신, 어김없이 테이블을 채우고 있는 술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간단히 마개를 뽑고 익숙하게 술병을 기울였다. 크게 오르내리는 목울대와 함께 단숨에 반병을 비워 내는 동안에도, 내리깐 시선은 카델을 담아내고 있었다. 카델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심하는 듯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고생을 깨나 했는지 기억보다 분위기가 거칠어졌다. 말랑해 보이던 뺨도 살이 빠져 날렵해졌고. 특유의 유순한 인상은 여전했으나, 귀엽다기보단 처연한 느낌이 더 강해졌다.
가르엘은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가볍게 훔치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 본 새 더 예뻐졌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의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카델을 마주하며, 가르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카델의 맞은편으로 새 의자를 끌고 와, 등받이를 앞에 둔 채 거꾸로 걸터앉았다. 등받이 위로 팔을 걸친 가르엘이 손에 들린 술병을 달랑이며 눈꼬리를 휘었다.
여전히 설명을 독촉하지는 않았으나, 카델은 절로 조급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언제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될지 모르니 한 명이라도 많은 아군을 확보해 두고 싶은 탓이었다.
“사실, 조금 전까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탈옥에 성공했고, 기사들에게 발견돼 쫓기던 중 가르엘 경을 만난 거죠.”
“……이상하군요.”
남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켠 가르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적린 용병단이 제국 관문을 노리던 고위 마족을 격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보통 그런 업적을 이룬 영웅에게 감옥살이를 선물하진 않지 않나요?”
“제가 감금당한 건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카델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여기서 가르엘에게 얼마나 많은 정보를 알려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나비효과로 돌아오게 될지. 예상할 수 있는 것과, 그 밖의 것들까지 치밀하게 계산했다.
그렇게 긴긴 고민이 마무리되었을 무렵. 똑바른 시선이 가르엘을 향했다.
“라이토스. 제가 나고 자란 가문의 이름입니다. 제국의 역적을 뜻하는 이름이기도 하죠. 원래라면 핏줄 하나 남기지 않고 몰살되어야 했지만, 반쪽짜리 서자인 저는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얼굴을 가리면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격렬한 전투 속에서 끝까지 정체를 숨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결국 호계 기사단의 대대장에게 들켜 끌려오게 됐습니다.”
요점만 들어간 생략 많은 설명이었으나, 가르엘은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파악을 마친 듯했다.
자신이 구해 준 남자의 정체가 제국의 역적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법도 하건만. 그의 얼굴에선 당혹감이나 곤란함이 비치지 않았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듯 연신 술을 들이켤 뿐.
얼마 안 가 남은 술을 말끔히 비워 낸 가르엘이 빈 병의 입구로 카델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경의 풀네임이 카델 라이토스, 라는 거죠?”
“예……? 네, 뭐. 그렇죠.”
“놀랍네요.”
“많이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때문에 곤란한 입장이 되어 버렸다는 것도…….”
“얼굴 닮아 이름까지 예쁘다니, 어디까지 제 취향에 들어맞을 생각인지. 이러다가 사람 혼이라도 뺏어 가는 건 아닌가 싶네요.”
저게 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진지한 낯으로 하는 얘기치고는 알맹이가 전혀 없어서, 카델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카델이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릴 동안, 가르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델 경의 정체가 제국의 역적이든, 반란군이든. 저에겐 별 상관이 없습니다. 마침 전부 지겨워지던 참이었는데 오히려 잘됐죠.”
습관처럼 안대를 매만진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원하는 걸 말해 보세요. 처음부터 카델 경의 부탁엔 약했으니, 이번에도 별 저항 없이 얌전히 들어줄 겁니다.”
현재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부하들과의 합류? 성을 탈출하는 것? 두 가지 모두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으나, 안타깝게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차피 목표는 하나야. 기사단으로 승격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기록된 성과를 분석 중입니다. 퀘스트 결과가 나올 때까지 ??? 시간이 소요됩니다.」
퀘스트는 아직도 성과를 분석 중이었고, 소요 시간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분석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 인물을 만나야만 분석이 완료된다든가.’
퀘스트가 아닌 현실로 생각해야 했다. 애초에 기사단 승격을 위해서는 그를 가능하게 할 인물을 찾아가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제국의 황제, 데릭 오스마. 그를 만나야 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찾아갈 순 없어. 황제가 내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한,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순순히 만나줄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 황제가 나와의 대면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싶은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카델은 문득 자신의 술잔을 건드리는 손끝을 발견했다. 잘빠진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마침 본인 몫의 술을 들이켜던 가르엘과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린 가르엘이 빈 술잔을 내려 두며 말했다.
“음, 드디어 관심을 주네요. 내내 한 잔도 안 마시고, 대화도 없고. 이런 걸 대작이라 할 수 있을까요?”
“……미안합니다. 생각할 게 많아서.”
“이렇게 또 뒷전으로 밀려나다니. 누군가의 ‘두 번째’라는 건 이런 기분이군요.”
“말 이상하게 하지 마시죠.”
카델의 짧은 흘김에 가르엘이 호쾌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빈 술잔을 가득 채웠다. 곧바로 이어지는 건배 제스처에 카델도 뒤늦게 술잔을 들었다.
유리가 맞부딪히며 맑은소리를 울렸다. 별생각 없이 술을 들이켠 카델은 쓰다 못해 혀가 아리기까지 한 술맛에 와락 미간을 구겼다.
“이런 독한 술을 물처럼 마시고 있었다니. 경도 참 대단하군요.”
“제 몸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실험 중입니다. 아직까진 끄떡없네요.”
그의 마기는 숙취까지 치유해 주는 걸까. 그건 조금 부러울지도 모른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카델이 간신히 비운 술잔을 내려 두었다. 가르엘은 다시 그의 빈 잔을 채워 주는 대신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부탁할 건 생각해 봤습니까? 카델 경이 뭘 부탁하든 제가 원하는 대가는 하나뿐이지만요.”
“도대체 그 대가가 뭐길래 그래요? 입장이 있으니 되도록 들어주려 노력은 하겠지만, 나가 죽으라든가, 그런 부탁은 곤란합니다.”
“미리 말하면 재미없죠. 목숨은 관련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심스러운 눈길에도 가르엘은 가증스러운 눈웃음만 보일 뿐 끝끝내 대가의 정체를 알려 주지 않았다. 카델 역시 더 캐묻는 것을 포기했다.
‘됐어. 심해 봤자 키스 정도겠지. 까짓거 눈 딱 감고 해 주면 돼.’
수차례 목숨을 위협받았더니 입술 정도는 몇 번이고 내줄 수 있는 강심장이 되었다. 오히려 그 정도로 끝난다면 이쪽이 이득이었다.
카델은 의미심장한 가르엘의 면전에 대고 말했다.
“일단은 제 마력을 차단하고 있는 이 팔찌를 풀어 줬으면 하는데요. 처음 보는 물건이라 어떤 식으로 해제해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히거든요.”
지하 감옥에서부터 달고 온 족쇄였다. 카델이 테이블 위로 팔을 올리자, 가르엘은 그의 양 손목을 감싼 은색의 팔찌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건 황실에서만 생산되는 마도구인데요. 라이토스가에서 자랐으면 심심찮게 봤을 것 같은데.”
“……오,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황실 물건엔 별 관심이 없기도 했고.”
“……흠. 지금 당장 풀어 드릴 수는 없지만, 푸는 방법 정돈 알아볼 수 있습니다. 특정한 물건이 필요하다면 최대한 구해 보도록 하죠.”
마력은 최소한의 방어 기제였다. 마력을 차단당한 상태로 황제를 만난다면, 돌발 상황에도 대처하지 못할 테니. 계획의 시작은 이 마도구를 해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가르엘 경이 제국에 있는 이유 말입니다. 마계 봉인 건을 논의하기 위해 각국의 대사를 초청했다고 하던데. 혹시 경이 대사 자격으로 온 겁니까?”
“맞아요. 임시로 얻은 자격이죠. 황제가 각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의 단장을 원했거든요. 사항이 사항인지라. 뭐, 지금쯤 화이트 왕국에서는 모들렌이 제 대신 열심히 황혼 기사단을 이끌고 있을 겁니다.”
“그럼 단장들이 전부 모이는 대로 회의를 진행하겠네요?”
“그렇겠죠. 긴박한 사항이니, 미루는 일 없이 진행될 겁니다.”
좋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카델이 테이블에 올렸던 팔을 거두며 눈을 빛냈다.
“절 그 자리에 데려가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