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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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적린 용병단을 제국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겠노라 선언했다. 일주일 뒤, 적린 용병단의 기사단 임명식을 위한 연회가 개최될 것이었다.

소문 무성하던 신흥 세력이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어떤 이들은 아쉬움을 토로했고, 어떤 이들은 연회에 나타날 그들의 실물을 기대했다.

한 명 한 명이 빼어난 미남자로 구성되었다든가, 마이뉴 왕국의 루멘 도미닉이 소속되었다든가, 오랫동안 인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요정이 힘을 보태고 있다든가.

확인되지 못한 소문의 진위가 밝혀지는 자리이니, 연회에 관한 관심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리고 그 기대의 중심에 선 카델. 그는 본격적인 연회의 준비가 시작되기 전, 반과 라이돈을 찾아갔다.

반과 라이돈은 여전히 인적 드문 낡은 여관 안에 묵고 있었다. 반지의 붉은 실을 따라 객실의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반이 보였다.

퀭하게 물든 눈 밑과 수척해진 뺨, 건조한 눈빛이 그간 반이 겪었던 마음고생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랬기에 카델은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섰다.

“단장.”

반은 그런 카델을 불렀다. 침대에 앉혔던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머뭇거리며 다가오던 그는 좀체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답답했는지 조금씩 보폭을 넓혔다. 그렇게 카델의 코앞까지 다가와, 함부로 그를 껴안지도, 만지지도 못한 채 아슬아슬한 시선만을 보냈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카델은 반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그에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체온이 카델을 와락 덮쳐왔다.

반은 카델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에 뺨을 기댔다.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가슴의 움직임, 그 너머의 격한 박동까지 전부.

카델은 반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서 가만가만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항상 누구보다 열렬히 자신을 걱정해 주던 반이었다. 자신이 없던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지.

전부 살기 위한 결정이었다지만, 모두를 살리기 위한 결정은 아니었다. 오로지 저 자신을 위한 결정이었다. 그 때문에 부하들이 상처를 입고 힘들어한다면, 그건 너무도 미안한 일이라서. 그런데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 죄스러워서. 카델의 마음은 매번 무거웠다.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요. 그럼 된 거예요.”

그리 말하는 반의 목소리에는 짙은 안도감이 배여 있었다. 마치 자신이 카델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반은 카델을 끌어안은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어깨를 감싼 손을 움직이지도, 머리에 기댄 뺨을 흔들지도 않았다. 그저 굳은 듯 멈춰 있었다. 꽉 끌어안은 채 카델을 몸 깊숙이 새겨 두려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포옹을 이어갈 순 없었다. 조심스럽게 반을 밀어낸 카델이 객실의 안쪽을 살피며 물었다.

“라이돈은? 아직 의식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거야?”

반은 멀어지는 온기를 아쉬워하면서도 얌전히 그를 놓아주었다. 시선은 여전히 카델에게 고정된 채였다.

“종종 의식이 돌아오긴 하는데, 오래 가진 못해요.”

“오래 가지 못한다니……?”

“회복을 위한 건지, 계속 졸린 모양이더라고요. 그래도 요새는 깨어나는 빈도랑 시간이 늘어났어요. 덕분에 더 성가셔지긴 했지만.”

반이 카델을 안내한 곳은 베개 옆에 놓인 작은 쿠션 앞이었다. 새하얀 쿠션 위에는 얇은 손수건을 덮고 누운 라이돈이 누워 있었다. 침대 맡에 쭈그려 앉아 가까이 고개를 내밀자, 깊게 잠든 듯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라이돈.’

평화로운 라이돈의 얼굴을 보며, 카델은 닿지 않을 사과를 건넸다. 그의 봉인을 풀자마자 끔찍한 전투를 치르게 했다. 라이돈이 이토록 오랫동안 의식을 잃은 적은 처음이었다.

죽은 듯이 잠만 자는 모습이 영 낯설었다. 금방이라도 깨어나 한바탕 얄미운 소리를 쏟아 낼 것 같은데.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머리칼을 정돈해 주자 라이돈의 미간이 작게 구겨졌다.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휴식을 방해하기 싫어 손길을 거두려는데,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꾸물꾸물 움직였다.

“라이돈……?”

반쯤 드러난 붉은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갔다. 라이돈은 진한 잠기운을 떨쳐내듯 몇 차례 눈을 끔뻑이다, 가까스로 카델에게 초점을 맞췄다. 메말라 있던 라이돈의 입술이 잔잔한 호선을 그렸다.

“카델.”

“괜찮아, 라이돈? 힘들면 말해. 당장 치유사한테 데려다줄게.”

“카델, 카델.”

다급히 상태를 물어도 연신 카델의 이름을 중얼거릴 뿐이다. 잠꼬대인지 아닌지 구별이 힘들 정도였다.

카델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반을 올려보았으나, 반 역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라이돈은 그런 카델의 검지를 꾹 움켜쥐었다. 본인의 품 안으로 손가락을 끌어당긴 그가 손끝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카델 꿈을 꿨어.”

“내 꿈……?”

“사탕을 나눠 먹으려는데, 저번처럼 주려니까 카델이 자꾸 화를 내서……. 그래서 그냥 내 몫까지 전부 줬어. 잘 먹더라, 카델.”

“그, 그렇구나…….”

라이돈은 무엇이 그리 웃긴지 나른하게 키득거리다, 슬슬 눈을 감았다. 다시 졸음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걱정 마, 카델. 금방…… 돌아올 거야…….”

손가락을 휘감은 힘이 서서히 약해졌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눠볼 새도 없이 까무룩 잠이 든 라이돈의 앞에서, 카델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왜 네가 날 안심시키고 있는 거야.’

마음이 착잡했다. 카델은 잡힌 손가락을 빼낼 생각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매번 더 나은 단장이 되어 주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으니. 발전이 가능하긴 한 건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단장, 밥은 드셨어요? 저희가 걱정돼서 오신 거면 괜찮으니까 푹 쉬세요. 라이돈이 저렇게 비실거리긴 해도, 금방 회복할 거예요.”

“아냐, 이미 푹 쉬고 왔어. 그리고 오늘 너흴 찾아온 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내가 좀 큰일을 벌였거든.”

“큰일이요? 어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반의 의아한 시선을 받아 내며, 카델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

“제국 소속의 기사단이 된다니…….”

“좀 갑작스럽지?”

갑작스러울 뿐이랴, 원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귀족을 경멸하는 그가 사방 천지 귀족이 깔린 집단에 소속되어 황제를 위해 일하게 된다는 것은, 지뢰밭에 오두막을 짓고 살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반에게는 더더욱 면목이 없었다.

카델이 그의 눈치를 살피자, 반은 얼떨떨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어떻게든 살갑게 바꾸고자 노력했다. 그래 봤자 어색하게 움찔대는 정도였지만.

“저도 단장이 평생 제국의 역적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사는 건 원치 않아요. 황제가 그런 조건을 내밀었다면 수락하는 게 맞다고도 생각하고요. 그냥, 저는…….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가볍게 입가를 문지르던 그가 돌연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한껏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카델을 향해 말했다.

“전 귀족이 싫어요. 어느 정도냐면, 그놈들 웃음소리만 들어도 뒷골이 뻐근한 살의가 느껴질 만큼. 이성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기분이거든요. 제가 과거에 루멘 녀석을 죽이지 않고 참을 수 있었던 건, 그놈이 잘 웃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귀족이 행복해하는 건 도저히 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으니까.”

잠시 말을 멈춘 반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살벌한 얘기를 꺼내면서도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맺혀 있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분위기에 카델이 마른 입술을 축이자, 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 역겨운 족속들을 호위하고, 그들을 위해 일한다는 건……. 아무리 단장의 명령이래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시선은 어느새 카델을 향해 있었다. 밝은 황금색 눈동자에선 분노나 경멸 따위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잔잔한 다정함이 깃들어 있을 뿐.

“단장은 정말, 해내지 못하는 게 없네요.”

그는 이번에도 역시, 카델의 곁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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