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델은 지친 부하들을 이끌고 성내로 돌아갔다. 연회를 겸한 임명식에는 용병단 전원이 참석해야 하니, 원활한 준비를 위해 모여 있으라는 황제의 명 때문이었다.
라이돈은 황실 치유사들에게 보냈다. 본인은 금방 회복할 테니 걱정 말라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치유술 하나 없이 방치할 수는 없었다.
반은 카델의 옆 객실을 사용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시중은 일절 필요 없고, 연회 준비를 위한 것이 아니면 사람을 보내지 말라는 것이 그의 유일한 요구였다.
평민의 수발을 들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는 시종들의 숙덕거림을 들은 뒤, 카델은 그에게 좀 더 편히 지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밤마다 성을 빠져나가 다른 곳에서 날을 새고 오는 것도 모른 체했다.
가르엘은 다른 객실로 옮겨 가는 카델에게 아쉬움을 표했으나,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다만 임명식이 끝나면 시간을 내 달라는 말을 건넬 뿐이었다.
카델에겐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내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고, 만남을 약속한 후 가르엘은 따로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차근차근 흘러가고 있었다. 전부 좋은 방향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으나, 충실히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카델은 널찍한 객실의 침대 위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앞으로 사흘 뒤면 기사단 임명식인가.’
많은 것이 바뀌게 될 텐데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루멘이 이 소식을 들으면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이번 승격이 가문을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루멘의 출가를 앞당기기 위해 개인적으로 준비해 둔 계획도 있었다. 그것이 루멘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지만, 아니래도 어쩔 수 없다. 기다리기로 해 놓고선 냅다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기사단이 되면 가장 먼저 가르엘을 영입해야겠어.’
마침 그쪽에서 먼저 만남을 제안한 상태였다. 운이 좋다면 곧바로 영입할 수 있을 테지. 어떤 식으로 꾀어내면 좋을까.
‘그렇게 대놓고 내 얼굴을 좋아해 주는데. 키스나 한번 진하게 갈겨 줘?’
막상 닥치면 시도도 못할 짓을 덤덤하게 상상한 뒤엔, 진지하게 방도를 고심했다.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부터 밝혀야 할 텐데. 어떤 식으로 얘기를 꺼내는 게 좋을까. 좋게 회유할 만한 방법 없나.’
어차피 그는 황혼 기사단과의 인연을 정리하려 하고 있다. 단장인 주제에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며 은근슬쩍 부단장인 모들렌에게 권한을 내어 주고 있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마음만 돌릴 수 있다면 영입 자체는 쉬울 텐데 말이지.’
게임이라면 열심히 돈 발라 가며 획득하면 됐을 일이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사람이었으니.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그것이 어떤 전투보다 어려운 일임을, 카델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만…….’
마계 봉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결론이 나왔으니, 각국은 기사단을 보내올 것이다. 화이트 왕국에선 황혼 기사단이 올 것이고, 그들은 제국을 중심으로 한 봉인을 우선적으로 확인할 테다. 그러니 황제가 카델을 제국 바깥으로 빼돌리지 않는 한, 가르엘과 교류할 기회는 몇 번 남아 있는 셈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던 카델이 설설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데려와야 해.’
치유사의 부재가 너무도 컸다. 매번 사활을 건 전투를 벌이는 용병단에 치유사가 없다는 건 치명적인 리스크였다. 수차례의 전투로 카델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타개법을 알면서도 문제 해결을 차일피일 미룰 수는 없었다.
빤히 천장을 노려보던 그가 뻐근해진 눈꺼풀을 문질렀다.
“……반은 또 밖에서 자려나.”
외박을 말릴 수는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뻔뻔한 인간이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 화이트 왕국에서는 고작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반을 괴롭게 만드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멋대로인 단장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황제의 기사가 되었으니. 그를 이 이상 괴롭게 만들기는 싫었다.
“귀족을 얼마나 싫어하면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못 버티는 걸까.”
영입 스토리에서도 그랬다. 맨 처음 반은 카델 라이토스를 귀족이라고 판단했고, 그랬기에 곧 죽을 것 같은 몸으로도 치료를 거부했다. 귀족의 도움보다는 죽음을 택한 것이다.
문득 궁금증이 차올랐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귀족을 혐오하게 되었는지. 마침 카델에게는 그 호기심을 채워 줄 수단이 있었다.
‘어차피 임명식은 사흘 뒤니까. 조금 피곤하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
고민은 짧았고 결정은 빨랐다. 자세를 고쳐 침대에 가지런히 누운 그가 뻐근한 눈을 감았다.
익숙한 무의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무의식 상태에 돌입하였습니다.」
「시청 가능한 스토리가 존재합니다.」
「반 헤르도스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
「라이돈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
“이젠 라이돈의 과거도 볼 수 있게 됐구나.”
매번 스토리 감상을 취소하고 잠들기 바빠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잠시 라이돈의 이름 위에 머물던 시선이 반의 이름으로 옮겨 갔다.
라이돈의 과거를 살피는 것은 더 적절한 때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반의 귀족 혐오증이 시작된 원인이 더 궁금했으니.
선택을 마친 카델이 스토리 감상을 시작하자, 시야가 점멸했다.
*
카델 라이토스의 몸에 빙의되어 시작됐던 영입 스토리와는 달리, 과거 스토리를 감상하는 그의 시점은 자유로웠다. 마음대로 주변을 오갈 수 있었고, 움직임에도 제한이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날벌레가 되어 상황을 관찰하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지.’
카델은 마음껏 시야를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으나, 쉽게 스토리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곳은 숲에 인접한 오두막이었다. 한구석에는 장작이 쌓여 있었고, 작은 텃밭과 우물도 있었다.
오두막은 작고 소박했지만 허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오히려 평화롭게 숲과 어우러졌다. 혹시 이곳이 반의 집인 걸까, 그럼 안에 들어가 보는 게 좋으려나, 들어갈 수는 있는 걸까.
고민하던 찰나,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한 소년이 밖을 나섰다. 카델은 한눈에 그 소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반…!’
키는 카델의 가슴께에나 겨우 미칠 만큼 작았다. 하지만 밝은 회색의 머리칼이나 선명한 황금색 눈동자, 살짝 탄 피부는 지금의 반과 똑같았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그에게선 지금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젖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집이 적어 뼈대가 도드라지는 편에 속했으나, 그럼에도 그에게서는 따스한 분위기가 흘렀다.
“다녀올게요, 할아버지!”
밝게 인사한 그가 장작더미 앞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걸까. 카델은 문이 닫히기 직전의 좁은 틈새로 그 안을 훔쳐봤다. 누군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려 했지만, 문이 닫혔기 때문인지 침입이 불가능했다. 카델은 아쉬움을 남긴 채 반의 뒤를 쫓았다. 그는 장작을 잔뜩 넣은 수레를 끌며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미남은 떡잎부터 다르다는 건가.’
맞은편에서 어린 반의 얼굴을 살피던 카델이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벌써 자기주장이 분명한 이목구비는 더 다듬을 필요도 없이 이미 완성형이었다. 심지어 지금의 반은 이때보다도 성숙하고 듬직하게 성장했으니. 역시 인생은 부조리했다.
카델이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동안 반은 어느 대저택 앞에 도착했다. 척 봐도 돈깨나 있는 집안의 저택 같았다.
한참 근처를 서성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반은, 저택을 빠져나오는 하녀 한 명을 발견하곤 그 앞으로 달려갔다. 반을 발견한 하녀의 놀란 얼굴 위로 곤혹스러움이 번졌다.
“어머, 너 또 왔니?”
“안녕하세요!”
“얘가……. 장작은 더 필요 없어. 저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하지만 곧 겨울인걸요? 네필리아 아가씨께선 장작은 많을수록 좋다고 하셨어요.”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반은 굴하지 않았다. 하녀는 반의 똘망똘망한 눈빛을 받아 내며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는 정말 어쩌시려고…….”
한탄처럼 중얼거린 그녀가 품을 뒤적여 동전 몇 개를 꺼냈다. 반은 양손을 모아 그것을 소중하게 건네받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리 악독한 인간이라도 침은커녕 못된 소리 하나 뱉지 못할 순수한 미소였다.
하녀 역시 보는 눈은 같았는지, 옅은 미소와 함께 설설 고개를 저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저택의 앞뜰을 살피며 말했다.
“사람 없을 때 서둘러 두고 와. 장작을 어디에 모아 두는지는 알고 있지?”
“네!”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다른 사람에게 걸리면 괜히 얻어맞고 내쫓기는 수가 있으니까.”
주의를 주어도 반은 딱히 알아들은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밝게 인사하며 수레를 끌고 저택의 뜰을 가로질렀다. 익숙하게 구불구불한 샛길을 찾아간 반이 저택의 뒤편으로 향했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반은 가빠진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야 하는 곳이 잘 보이지 않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그렇게 몇 분이나 멈춰 있었을까. 위에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 오늘도 왔구나!”
“……네필리아 아가씨?”
카델은 반을 담아내던 시야를 움직여 위를 보았다. 그러자 저택의 열린 창문 너머로 몸을 절반이나 빼낸 소녀, 네필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기다란 금발을 양 갈래로 땋은 예쁘장한 소녀였다.
네필리아는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나타난 그녀는 위층이 아닌 뒤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장작이 엄청 많네. 다 네가 팬 거야?”
“많을수록 좋다고 하셨으니까요.”
“돈은? 받았어?”
“네.”
“많이 받았지?”
“많이는 필요 없어요. 장작값만 받으면 되는걸요.”
“무슨 소리야? 할아버지 약값을 감당하려면 많이 받아야지. 다음에 올 땐 값을 세 배로 받도록 해.”
단호하게 일갈한 네필리아가 멀뚱히 선 반의 손을 덥석 낚아챘다.
“세 배로 받고, 매일매일 찾아와.”
“장작을 매일 드리려면 숲의 모든 나무를 베어 내야 할 텐데요.”
“누가 매일 가져오래? 그냥 날 보러 오라는 얘기잖아.”
“아가씨를요…?”
네필리아는 반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으나, 카델은 그런 네필리아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어린 게 아주 당돌하네.’
누가 봐도 네필리아는 반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반이 제 의지로 찾아오진 않을 것 같으니, 대신 장작을 팔러 오라고 회유한 듯싶었다.
뭐, 할아버지 약값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반에게는 좋은 일이었겠지만. 카델은 어쩐지 같잖은 기분을 느끼며 둘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네필리아!”
그들의 반대쪽에서부터 잔뜩 성난 음성이 들려왔다. 이동한 카델의 시선이 뒤뜰을 가로지르는 한 소년을 발견했다.
반, 네필리아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소년은 목소리만큼이나 골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날 선 시선은, 네필리아가 아닌 그 옆의 반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