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521)

“이 거지새끼는 여기 왜 또 온 거야?”

소년은 와락 인상을 구기며 반을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손찌검을 할 기세에 네필리아가 반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입조심해, 로빈. 반은 장작을 전해 주러 온 것뿐이야.”

“하인한테 전해 주면 되는 걸 왜 굳이 여기까지 끌고 오는데? 야, 거지. 내 정혼자한테 손끝 하나라도 댔단 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만 못 해? 그리고 제발 내가 네 물건인 것처럼 굴지 좀 마. 확실하게 정해지지도 않은 얘기로 거들먹거리는 거, 불쾌해.”

카델은 시선을 옮겨 반의 굳은 얼굴을 훑었다. 아이들의 말싸움으로 유추해 보건대, 상황 자체는 아주 단순했다.

‘삼각관계인가. 사이에 낀 반만 괴로웠겠어.’

보통의 삼각관계였다면 반이 이렇게까지 주눅이 들 필요는 없었을 테다. 게다가 반은 네필리아의 호감을 받는 쪽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은 두 귀족과 한 평민 사이의 관계였다. 반도 네필리아에게 관심이 있다면 몰라도,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으니.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근데 저 꼬맹이는 뭔데 자꾸 남의 부하를 구박하는 거야? 확 그냥.’

이미 지나간 일일지라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어리고 귀여운 모습을 한 부하가 아닌가. 자연스럽게 보호 본능이 발동했다. 그리고 그러한 카델의 분노는, 이어지는 장면과 함께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빠르게 전환된 장면에서, 반은 무리 지은 소년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네필리아 눈에 띄지 마, 접근하지 마! 네 낯짝이 암만 반반해도, 넌 태어나길 천하게 태어났어. 분수를 알고 살란 말이야!”

무리의 중심에는 로빈이 있었다. 그는 반을 폭행하는 소년들의 뒤에서 짓밟히는 반의 모습을 똑똑히 응시하고 있었다.

인적 없는 어두운 골목에서, 반은 흐느낌 섞인 괴로운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어린 반의 불쌍하고 가녀린 모습에 카델은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어떻게든 구타를 막아 보려 애썼으나, 그는 한낱 관찰자에 불과했다. 어떤 공격도 막아 줄 수 없었고, 그저 일그러진 반의 표정이나 흐르는 눈물, 발길질을 따라 들썩이는 몸 따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집단 구타가 끝난 뒤. 반을 폭행했던 소년들은 로빈에게로 달려갔다.

“로빈 도련님, 시키신 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돈을…….”

“흥, 시원찮게 때려 놓곤 뻔뻔하구나.”

“더, 더 때리면 죽을지도 몰라요.”

“그걸 잘 조절하면서 때리라고 매번 돈을 쥐여 주는 거잖아!”

“죄, 죄송합…….”

“됐어. 다음번엔 저 짜증 나는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라고. 네필리아는 저놈 얼굴만 좋아하니, 얼굴이 망가지면 관심도 사라지겠지.”

반을 때린 값으로 돈을 받아 낸 소년들은 슬슬 눈치를 보며 골목을 벗어났다. 로빈은 떠나지 않고 웅크린 반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 위에 가래침을 뱉었다.

“재수 없는 평민 놈. 또 한 번만 네필리아의 눈에 띄면 죽여 버릴 줄 알아.”

시건방지게 지껄인 로빈이 그제야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반은 더듬더듬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작은 몸 곳곳이 붓고 멍들어 엉망이었다.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대충 문질러 닦은 반이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괜찮아. 안 아파.”

저 작은 몸으로 그렇게 심한 구타를 당해 놓곤 괜찮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반은 스스로를 세뇌하듯 연신 괜찮다며 중얼거렸다. 카델은 차마 그 씁쓸한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애먼 하늘만 올려 보았다.

분노와 안쓰러움이 가슴속에 갑갑하게 뭉쳤다.

‘할 수만 있다면 다 데려와서 두들겨 패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원통했다. 전부 지나간 과거였다. 단 한 군데도 바꿀 수 없는 이 칙칙한 기억은, 아직까지도 반의 가슴 속에 고스란히 묻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날의 밤하늘을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촘촘하게 박힌 별들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제법 운치 있는 밤이었을 테다.

다시 장면이 전환되며, 분위기에 맞지 않는 고요한 풍경 역시 사라졌다.

반은 장작이 담긴 수레를 끌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듯 절뚝거리면서도 부지런히 나아갔다. 목적지는 네필리아가 사는 저택이었다.

‘또 장작을 팔러 온 거야? 저러다 로빈 새끼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걱정이 앞섰으나 어린 반의 심경은 이해가 갔다. 그는 할아버지의 약값을 벌어야 했고, 어린 그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도 하녀에게 장작값을 받은 반이 망설임 없이 뒤뜰로 이동했다.

제발 네필리아는 마주치지 말고 장작만 두고 돌아와라. 카델의 간절한 바람은 쉽게도 배신당했다. 네필리아는 아예 처음부터 뒤뜰에 나와 반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 세상에,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야? 로빈이지? 응? 로빈이 이렇게 만든 거지?”

그녀는 반의 얼굴을 이곳저곳 살피며 발만 동동 굴렀다. 앳된 얼굴에 죄책감이 아른거렸다. 반면 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전 괜찮아요. 장작 패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는걸요. 그러니 계속 가져올 수 있어요.”

“장작이 문제가 아니잖아! 기다려 봐, 내가 약을 챙겨 올게. 상처부터 치료하자.”

네필리아가 약을 찾아 떠나든 말든, 반은 묵묵히 수레를 끌고 장작을 옮겼다. 헛간에서 수레를 비우고 나오자, 돌아온 네필리아가 반의 손을 낚아채 어딘가로 향했다. 뒤뜰 구석에 자리한 사과나무 앞이었다.

“로빈한테 분명하게 말해 둬야겠어. 난 아직 그의 정혼자가 아니고, 계속 널 괴롭힌다면 부모님께 로빈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 말씀드리겠다고. 그럼 네가 다칠 일도 없을 거야.”

네필리아는 반의 상처에 꼼꼼히 연고를 펴 바르곤 그 위에 붕대를 감았다. 반은 그녀의 치료를 받아들이면서도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자신을 대신해 분통을 터뜨리는 네필리아에게 맞장구를 치지도, 그녀를 부추기지도 않았다.

“다 됐다. 많이 아팠지?”

“아뇨,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네필리아 아가씨.”

“……왜, 왜 일어나? 벌써 가게?”

“네. 오늘 받은 돈으로 약을 지어야 해서요.”

“아……. 그럼 이것도 가져가.”

네필리아가 건넨 것은 작은 푸른색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반이 그것을 받지 않고 머뭇거리자, 네필리아는 직접 그의 손안에 반지를 쥐여 주었다.

“나한텐 필요 없는 거야. 이걸 팔면 약값은 충분히 나올 테니까, 아픈 몸으로 일하지 말고 당분간 쉬어. 대신 몸이 건강해지면 다시 찾아와야 해. 알았지?”

반지를 내려다보는 반의 표정이 복잡했다. 이런 부담스러운 선물은 받고 싶지 않지만, 그녀의 말대로 반지를 팔면 한동안은 약값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으니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결국 반은 반지를 챙겨 넣었다.

꼭 돌아와야 한다는 네필리아에게 감사를 전한 뒤, 반은 곧장 시장을 찾아갔다. 절뚝거리면서도 빈 수레를 끌고 가는 걸음은 경쾌하기만 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나 신기한 장난감 따위에 한 번쯤 눈길을 둘법한데도, 반은 꿋꿋하게 약방을 찾아갔다.

카델은 그런 반을 대신해 시장을 둘러보며 느긋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문득, 반을 쫓는 불온한 시선 하나를 포착했다.

‘……저 새낀 왜 여기까지 따라왔어? 스토커야?’

로빈이었다. 그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반의 뒤를 밟고 있었다. 네필리아를 만나고 온 걸 알고 찾아온 건지, 그냥 트집을 잡으러 온 건지는 몰라도, 녀석의 눈빛이 흉흉했다. 어린 소년이 저토록 표독스러운 얼굴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카델은 반에게 로빈의 존재를 알려 주지 못함을 통탄스러워 하며 속으로나마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 저 왔어요.”

“어이고, 반 왔냐? 오늘도 약 지으러 왔어?”

“네. 그리고 이거…….”

약방에 들어간 반이 반지를 꺼내 보였다.

“이걸 팔면 약을 얼마나 지을 수 있을까요?”

“음…?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반지인데. 어디서 난 거냐?”

“네필리아 아가씨께 받았어요. 필요 없으니 팔라고 하셔서…….”

들뜬 표정으로 반지의 출처를 설명하던 반이 말을 멈췄다. 무언가 안 좋은 낌새를 느낀 듯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로빈이 달려들었다.

그는 반지를 든 반의 손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움켜쥐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숨을 몰아쉬었다.

“너, 너 이거……. 이거 어디서 났어.”

“로, 로빈 도련님.”

“대답해! 어디서 났냐고 물었어!”

로빈의 살벌한 표정에 반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본능적으로 이 반지가 어떤 반지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설마 저거, 로빈이 선물한 반지였어…?’

제발 아니기를 바랐으나, 아무래도 맞는 듯했다. 로빈은 반의 침묵에 파들거리며 분노했고, 거칠게 반지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반의 멱살을 잡아끌어 길바닥에 내팽개쳤다.

“이 도둑놈! 쥐새끼 같은 놈이 어디서, 어디서 귀족 물건에 손을 대?”

반은 반지를 훔치지 않았다. 네필리아에게 받은 것뿐이었다. 로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는 그저 네필리아가 자신의 선물을 거절했다는 것을, 그 버려진 선물을 반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다.

그 치졸한 분노는 반에 대한 자격지심에 불을 지폈고, 이성을 잃은 로빈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반을 모욕하며 발길질했다.

“역겨운 놈! 분수를 알라고 했지? 감히 귀족의 물건을…… 내 사람을 탐내? 네까짓 놈은 네필리아를 훔쳐보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단 말이다!”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어린아이가 반항도 못 한 채 두들겨 맞고 있었다. 상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말려야 했다. 그러나 시장의 그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서로의 눈치를 보며 웅성거릴 뿐이었다.

“저 남자애, 솔레스 가문 도련님 아니야?”

“아이고, 맞네, 맞아. 뭘 잘못했길래 저렇게 심하게 때리는 거야?”

“모르지, 귀족 놈들 저러는 게 하루 이틀인가. 빈정 상하면 아무나 잡고 시비 거는 거 아니겠어. 아무리 어려도 귀족은 귀족이라니까. 괜히 말렸다가 휘말리면 힘들어. 적당히 하다 가겠지.”

평민들은 로빈의 가문이 두려워 끼어들지 못했고.

“어머나, 저게 대체 무슨 일이죠? 가서 말려야겠어요.”

“그냥 두세요, 부인. 살펴보니 저 아이가 솔레스가 막내 공자의 물건을 훔친 듯한데. 저런 손버릇 나쁜 아이는 미리 버릇을 들여야죠.”

“어머……. 하긴. 저도 얼마 전에 하녀 한 명이 제 목걸이를 걸고 거울을 보던 걸 발견했거든요. 어찌나 불쾌하던지.”

“세상에. 그래서 어찌했어요?”

“흠씬 때리고 쫓아냈죠, 뭐.”

귀족들은 버릇을 들여야 한다며 관망했다.

아무도 로빈을 말리지 않았고, 반을 구해 주지 않았다. 반은 시장 바닥 한가운데에서 그 모든 숙덕거림을 들어야 했다.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님에도, 카델은 반의 절망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로빈을 밀치고 반을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빼내 주고 싶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어떻게 이런 부당한 일을 참고 견뎠을까. 가슴이 미어졌다. 빠르게 무너지는 반의 마음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왜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 것인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짓밟히는 반을 지켜보기가 괴로워 눈을 감자, 주변의 소리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카델은 바람처럼 귓가를 스치는 소음과 함께 머뭇머뭇 눈을 떴다. 또 다른 반의 어두운 과거를 볼까 두려웠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뜬 카델의 앞에 나타난 것은, 무력하게 맞고 있는 반이 아니었다.

반은 로빈의 위에 올라타 미친 듯이 그의 얼굴을 후려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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