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델이 용병단을 이끌 때는 영입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기사, 가르엘 몬자시.
‘당장 입단시켜서 단물을 쪽쪽 빨아 주마.’
기사단 승격보다 치유사 영입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이 훨씬 기뻤으니. 카델은 자신이 속물적인지 소박한 것인지를 고민했다.
“아, 카델 경.”
연회장과 이어진 실외 복도. 그곳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던 가르엘이 카델을 발견하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카델은 간질거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가르엘에게로 다가갔다.
임명식은 끝났으나, 연회는 끝나지 않았다. 원래라면 연회의 주인공인 적린 기사단은 최대한 오래 자리를 지키며 여러 사람과 안면을 텄겠지만, 카델은 가르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곧바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미리 말을 해 두었으니 반과 라이돈 또한 자유롭게 해산할 것이었다.
“나갑시다. 괜히 근처를 맴돌았다간 언제 누구에게 붙들릴지 모르니까요.”
가르엘이 이끄는 대로 성을 빠져나가자, 성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연스럽게 카델을 안쪽에 태운 가르엘이 마부에게 출발 신호를 보냈다.
“지금 어딜 가는 겁니까?”
“임명식도 끝났으니, 슬슬 도움의 대가를 받아야죠.”
“무슨……. 설마 절 팔아넘기려는 건 아니죠?”
“설마요. 전 귀한 건 손에 직접 넣어야 하는 스타일이라.”
능청을 떤 그가 의심이 가득해 보이는 카델의 앞에서 나른하게 눈을 휘었다.
“좋은 방을 하나 잡아 뒀거든요.”
“방이요…?”
“제가 원하는 대가는 경과의 하룻밤이니. 그곳에서 받아 낼 생각입니다.”
좋은 방, 하룻밤.
카델은 잠시 멍하게 굳어 그 말뜻을 헤아렸다. 귓가를 울리는 가르엘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꼭 같이 마셔 주는 겁니다?”
가르엘이 맞은편의 술잔을 채워 주며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카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뻣뻣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가르엘의 손짓 하나, 눈짓 하나에도 불순한 의미를 부여하느라 몸도 마음도 편히 풀어지지 못한 탓이었다.
‘정신 차려, 인마. 날 새우면서 같이 술 마시고 싶다는 얘기겠지. 원래 이상한 소리 잘하는 놈이니까, 괜히 농담한 걸 거야. 뭘 이런 걸 가지고 일일이 신경 쓰고 있어?’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술잔을 들자, 가르엘의 술병이 가볍게 부딪혀 왔다. 그의 시선이 방에 들어온 뒤로 내내 경직된 카델의 입꼬리에 머물렀다.
“혹시 긴장했어요?”
“……제가요? 긴장은 무슨. 전혀 아닌데.”
“손을 너무 떨길래. 수전증이 있나?”
수전증이라 해도 믿을 만큼 손이 떨려 댔으나, 카델은 되려 콧방귀를 뀌며 술잔을 한 번에 비워 냈다.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 둔 그가 능글맞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르엘에게 말했다.
“무거워서 떨었어요, 무거워서.”
“술잔이 무거워서 손을 떨었다?”
“네. 제가 딱 생긴 대로 연약하거든요.”
긴장됨을 시인하는 것이 약골임을 선언하는 것보다 싫단 말인가. 새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자존심이었다. 가르엘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까딱이며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어지간히 이 상황이 어색한지, 카델은 술을 따르기가 무섭게 잔을 비우기를 반복했다.
“주량이 센가 봐요.”
“웬만큼은 마십니다.”
“취해 본 적 있어요?”
“많죠.”
“주사가 뭔데요?”
“귀소본능이라고 하죠. 여기서 취하면 성으로 돌아가겠다고 난동을 피울지도 모릅니다.”
“이런, 그럼 잔을 적당히 채워 드려야겠네.”
그리 말한 가르엘이 따르던 술병을 도로 세웠다. 한쪽 턱을 괸 채 카델을 바라보는 눈빛이 나긋하기만 했다.
쉴 틈 없이 술을 마셔 대더니, 제법 취기가 오른 모양이었다. 살짝 발그레해진 뺨과 촉촉하게 젖어 색이 진해진 입술이 유독 눈에 띄었다.
가르엘은 죄인처럼 술잔만 내려 보는 카델의 눈앞으로 손을 뻗어 흔들었다. 반사적으로 손길을 따라오는 시선에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자, 카델은 대놓고 움찔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에는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남자가, 이런 상황만 연출하면 순진한 소년처럼 구는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
“귀걸이, 빼죠.”
“……왜요?”
“다른 사람하고 술 마시는 기분이라. 뭐, 그 모습도 꽤 매력적이긴 하지만요.”
옷을 벗으라는 것도 아니고 귀걸이 하나를 빼 달라는 요구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카델은 힘든 부탁을 들었다는 듯 주춤거리며 망설였다. 그러다 가르엘이 직접 빼 주겠다며 상체를 기울이자, 화들짝 놀라며 잽싸게 귀걸이를 빼냈다.
어둡게 물들었던 머리와 눈이 본연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카델은 작게 숨을 몰아쉬며 귀걸이를 바지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었다.
“됐습니까?”
“네. 예쁘네요.”
“……뭘 그렇게 허구한 날 예쁘다, 예쁘다, 하는 겁니까? 입버릇인가.”
카델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가르엘은 카델의 의중을 파악해 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요?”
당황한 목소리를 무시한 가르엘이 카델의 앞 테이블 위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바짝 굳은 카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제 순수한 구애를 입버릇으로 매도당하니 속상해져서요. 어디가 어떻게 예쁜지 상세히 나열해 볼까 하는데.”
“하, 하지 마십쇼.”
부드러운 손끝이 카델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드러난 반듯한 이마를 엄지로 훑어 내리자, 카델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속속들이 비치는 정직한 반응에 가르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싫어요?”
“그럼 그런 낯부끄러운 짓이 좋겠습니까?”
“경은 정말 부끄러움이 많네요.”
“그쪽은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좀 가져 보시죠.”
비난하는 듯한 말투였으나, 정작 카델은 가르엘과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얼굴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고 싶다는 듯 울상이 되어 있었다. 실제로 카델은 조금씩 발끝의 방향을 돌리며 언제든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위기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이러다간 영입이고 뭐고…….’
상상으로도 해 본 적 없던 일을 당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가르엘은, 카델의 예감을 현실로 이루어 주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딱히 이러려고 부른 건 아니었는데.’
지금이야 태생적인 저급함을 증명하고자 내키는 대로 문란한 밤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라고 처음부터 육욕에 눈이 먼 사내는 아니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갈 생각이었다. 호감을 얻고,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고, 그렇게 몸을 맞대고.
몸을 탐하는 것이 아예 계획 밖의 일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가장 마지막. 긴 완주를 마친 선수에게 주어진 한 모금의 물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동요하면 보는 사람도 자극을 받아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껏 봐 왔던 카델이라면 높은 확률로 모르리라. 불안한 듯 떨리는 기다란 속눈썹도, 눈치를 살피며 굴러가는 고동색 눈동자도, 어색하고 불편한 눈빛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움찔대는 입술은 또 어떠한가. 경직된 입꼬리를 살살 풀어 주고 싶다는 욕망에, 가르엘은 앓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대가가 뭐든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이렇게 굳어 있으면 죄책감이 드는데.”
“……뭘 하려는 건데요.”
“경은 뭘 상상하고 있는데요?”
닿아 오는 진득한 시선에 카델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어찌나 필사적으로 생각하는지, 머리 굴리는 소리가 가르엘에게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짧은 침묵 끝에 카델이 가르엘의 팔을 잡아챘다. 그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퍽 간절했다.
“이러지 마시죠.”
“……뭘요?”
“전 경을 오래 보고 싶습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는, 순수한 생명의 은인으로요.”
팔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매달리는 듯도, 애원하는 듯도 한 처연한 표정에 가르엘의 입이 다물렸다. 당연히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사람을 자극하지.’
본인이 지금 한 사람의 가학심을 얼마나 열렬히 부추기고 있는지, 카델은 모를 것이다. 몰라야 했다. 알고 이러는 것이면, 자신은 영원히 그를 당해 내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뭘 하지 말라는 걸까요? 전혀 짚이는 구석이 없는데.”
가르엘은 자신의 팔을 쥔 카델의 손목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작은 접촉에도 움찔거리는 떨림이 느껴졌다.
스르륵 떨어지려는 손을 그대로 움켜쥐고, 몸을 끌어당겼다. 강한 악력에 카델의 상체가 훅 기울어졌다.
가르엘은 가까워진 카델의 얼굴을 음미하듯 훑어 내렸다. 잔뜩 겁먹은 얼굴은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뱉어 낼 듯했지만, 그것이 고함일지 눈물일지는 알 수 없었다.
“자세히 말해 줘야 알죠. 똑똑하잖아요, 경은. 하나씩 말해 줘요. 내가 뭘 하면 안 되고, 왜 그래선 안 되는지. 이해시켜 줘요.”
사실 이쯤 되면 듣고 싶은 말도 없다. 그저 눈앞의 남자를 조금이라도 더 깊게 파고들고 싶을 뿐.
가르엘은 조금씩 일그러지는 카델의 눈매를 응시하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황망한 얼굴을 스쳐 그의 어깨 위로 이마를 기댔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가쁜 숨소리가 온 신경을 자극했다.
“……하지 마요.”
그 떨리는 목소리에 가르엘은 대꾸를 포기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고민은 찰나였다. 그는 쥐고 있던 카델의 손을 놓아 주며 몸을 깊게 숙였다. 그러고는 그의 허리와 무릎 아래에 팔을 끼워 넣어 단숨에 들어 올렸다.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에 카델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떨어지지 않으려 본능적으로 가르엘의 목을 끌어안았으나, 그마저도 오래 매달리지 못했다.
훅 떠올랐던 몸이 금세 훅 꺼지더니, 등허리로 푹신한 감촉이 닿아 왔다. 카델은 자신이 눈 깜짝할 새에 침대로 눕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르엘은 경악한 카델의 얼굴에 대고 속삭였다.
“말해 주지 않으면 몰라요. 모르니까, 계속하는 수밖에.”
카델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가르엘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바짝 밀착한 가르엘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자, 잠깐만요.”
원래도 색이 짙던 가르엘의 보라색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난히 어둡게 빛났다. 한쪽밖에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그 안에서 일렁이는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욕망. 그가 느끼고 있는 갈증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카델은 그의 불순한 욕망도, 그 욕망의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같은 남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리라고는, 자신이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생전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가벼운 입맞춤이나 포옹은 괜찮았다. 그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너무… 너무 빠르잖아요.”
“……빠르다?”
나직한 반문에 카델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엘은 자신을 밀어 내는 힘에도 꿈쩍하지 않은 채 카델을 응시했다. 무게를 받치고 있던 한쪽 손을 들어, 흐트러진 카델의 머리칼을 얌전히 쓸어 넘겼다. 하얀 시트 위에 그림처럼 퍼진 머리칼이 카델의 불규칙한 호흡을 따라 사부작거렸다.
“그대의 사내들은 그대를 너무 곱게 다뤘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가르엘이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천천히 해 볼까요? 경의 속도에 맞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