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고 뭐고, 카델은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을 아래에 둔 가르엘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의 눈빛은 점점 깊어져 갔다. 덩달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때리고 도망가면…….’
상상으로는 몇 번이고 가르엘을 힘껏 밀쳐 냈다. 공격하기도 했고, 마법으로 위협도 해 봤다. 하지만 끝끝내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가 영입해야 할 기사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한 번을 참지 못하고 가르엘을 거부한다면, 그와의 사이가 터무니없이 멀어질 수도 있었다. 그게 두려웠다.
다시는 부하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목숨이 위태로운 전투를 이어 가고 싶지도 않았다. 카델에게는 치유 능력을 갖춘 가르엘이 필요했다. 가르엘을 놓친다면, 그들은 또다시 보험 하나 없는 전장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야 했다.
그랬기에 가르엘을 밀어 내는 것이 이기적인 자존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은 짓 하나 못 참아서 모두를 힘들게 만들까 봐. 가르엘의 어깨를 쥔 손에서 자꾸만 힘이 빠지려 했다.
“……울 것 같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가르엘은 카델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매만지며, 그와 눈을 맞췄다.
제대로 밀쳐 내지도 못하면서 이런 표정을 짓고 있다니. 자신을 애끓게 만들기 위한 수작이라고 믿고 싶어지지 않는가.
“제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나요?”
“…….”
“아니면, 처음인가.”
위태롭게 떨리는 눈동자가 대답을 회피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가르엘은 카델의 머리를 헤집던 손을 내려, 그의 귓가를 매만졌다. 매끈한 귓바퀴를 힘주어 쓸고, 부드러운 귓불을 간질이듯 건드렸다.
그 노골적인 손길을 피해 목을 움츠린 카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이라고 하면, 멈출 겁니까…?”
“아뇨, 그건 힘들 것 같은데요. 그 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단숨에 선두를 달릴 기회인데. 전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는 편이라서요.”
가르엘의 뻔뻔한 태도에 카델은 말문을 잃었다. 황당함이 역력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가르엘은 튀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았다. 즐겁게 웃으며 제 아래에 깔린 무방비한 카델의 모습을 느긋이 감상했다.
“밤 기술엔 제법 자신이 있습니다. 기분 좋게 해 드릴 수 있는데.”
“궁금하지 않아요.”
“기분 좋게 해 드리고 싶고요.”
질 낮은 농담에 귀와 목덜미가 점점 붉게 물드는 것이 보기 좋았다. 순결한 성직자를 겁탈하려는 악마라도 된 기분이었다. 정작 성직자는 자신인데.
카델과의 관계를 길게 본다면 여기서 끊는 것이 옳았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범하는 건 자신도 싫었고, 혹시 카델이 저와의 밤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해도, 결국 그는 자신을 피할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충분히 위험하지만.’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짓궂게 몰아붙이고 있으니. 어쩌면 다신 상종하지 않겠다며 휙 돌아설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도 카델의 위에서 비키지 못했다. 들려오는 숨소리가, 무언가를 망설이듯 우물쭈물하는 표정과 따끈하게 달아오른 체온이. 전부 달콤한 덫이 되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덫을 직접 벌려, 엉망이 된 발목을 비틀어 빼내야 하리라. 정말이지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런 가르엘의 심보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덫이 된 카델은 본인이 직접 움직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뭐 하는…….”
가련하게 가르엘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이 그의 얼굴을 향했다. 정확히는 그의 왼쪽 눈을 가린 안대를.
반사적으로 몸을 물린 가르엘이 안대를 노리는 손을 낚아챘다. 그러자 어느샌가 두려움이 걷힌 결연한 눈빛이 드러났다.
“벗어요, 그거.”
“그래야 하는 이유라도?”
“하는 내내 경의 한쪽 눈만 보라는 겁니까? 싫어요. 그러니까 벗으십쇼.”
“……벗으면 저랑 잘 생각이 들겠어요?”
기대 없이 뱉은 질문에 카델은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죠. 안 그래도 요즘 우울한 일 천지였는데. 한 번 기분 좋게 해 봐요.”
내내 카델의 마음을 뒤흔들며 여유를 만끽하던 가르엘이었으나, 지금 만큼은 제대로 표정을 꾸며 낼 수가 없었다. 미세하게 굳은 시선이 잡아챈 카델의 손에 닿고, 다시 흐트러진 카델의 얼굴을 담았다.
“……흉합니다. 보면 흥이 식을 텐데요.”
“경 정도의 인물이면 흉터쯤이야 개성이죠. 오히려 인간미가 느껴져서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신경 쓰입니다.”
“그럼 어쩔까요?”
좀 전까지의 수줍음은 어디로 갔는지, 가르엘을 올려다보는 얼굴은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카델은 침대 위에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여우처럼 눈을 휘었다.
“하고 싶으면 벗고, 벗기 싫으면 일어나요.”
*
“놔주면 바로 도망갈 줄 알았는데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가르엘이 테이블 앞에 선 카델의 등을 보았다. 테이블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기던 카델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 하룻밤을 가지겠다면서요. 아직 밤이 지나지 않았으니, 허락이 떨어질 때까진 같이 있을 생각입니다.”
몸을 돌린 카델의 손안엔 아직 개봉하지 않은 술병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술병 하나를 침대로 가볍게 던지자, 가르엘이 단숨에 낚아챘다.
카델은 흥미롭다는 듯 저와 술병을 번갈아 보는 가르엘의 시선을 무시하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아까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라 믿을게요.”
“안대만 벗으면 같이 자 주겠다면서요.”
“안 벗을 거잖아요.”
확신에 찬 대꾸에 가르엘이 눈썹을 까딱였다.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술병의 마개를 뽑고 꼭 저처럼 병째로 술을 들이켜는 카델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위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 그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시선을 느낀 카델이 고개를 돌리자, 가르엘은 들고 있던 술병을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두었다.
“참 이상하단 말이죠.”
“뭐가요?”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했어요.”
“그러니까 뭐가—”
가르엘이 자신의 안대를 툭툭 건드렸다. 카델을 향한 눈빛은 처음보다 훨씬 건조했고, 훨씬 날카로워져 있었다.
“꼭 아는 것처럼 굴잖아.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알죠.”
“알아요?”
“보통 인간은 그 위치에 눈이 달려 있으니까. 경도 눈이 있지 않겠어요?”
카델은 담담하게 대꾸하며 시선을 돌렸다. 태연한 척 표정을 꾸며 내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이거 위기야, 기회야?’
가르엘과의 잠자리를 원만하게 빠져나가기 위해 그의 약점을 건드렸다. 그 덕에 큰일은 피할 수 있었으나, 예민한 곳을 자극당한 가르엘의 심기는 상당히 불편해진 듯했다.
‘어차피 가르엘을 영입하려면 필수적으로 마안을 언급해야 해. 그 힘을 받아들여야 가르엘이 기사단에서 치유사 역할을 해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운을 뗀다면 그건 기사단 영입 직전의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을 최대한 우호적으로 돌린 뒤, 조심스럽게 꺼내야 했으니.
적어도 이런 타이밍에, 이런 식으로 가르엘이 먼저 의심하며 미끼를 던질 줄은 몰랐다.
‘……감이 안 잡히네.’
가르엘이 먼저 물꼬를 터 준 지금 기회를 잡아야 하는 건지, 모르는 척 굴다가 분위기가 진정된 타이밍을 노려 조심스럽게 공략해야 하는 건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가르엘은, 카델이 생각에 잠기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거 섭섭하네요. 전 우리 사이가 꽤 가까워진 줄 알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왜 거짓말을 하지. 가까운 사이라면 적어도, 상대 앞에서 거짓말은 말아야지.”
가르엘은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움직여 카델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그를 지그시 압박하며, 안대의 끈 위로 손을 올렸다.
“보여 줄 테니 한 번 제대로 놀라 봐요. 그대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면, 상상도 못 한 걸 보게 될 테니. 연기에 재능이 있댔죠?”
“……가르엘 경.”
“달아나는 것도 허락해 줄게요.”
가르엘의 목소리는 묘하게 격양되어 있었다. 그가 거침없이 안대의 끈을 풀어내자,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스르륵 내려갔다.
그러나 천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 카델이 서둘러 그것을 잡아챘다. 헐렁해진 천을 본래 위치에 가져다 댄 카델이 손바닥에 힘을 주어 가르엘의 눈을 덮어 버렸다.
차게 굳은 자색의 눈동자가 당황한 카델의 얼굴을 담아냈다.
“……언제부텁니까? 언제부터 알았어요?”
“…….”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그 전에…….”
가르엘은 자신의 왼쪽 눈을 덮은 카델의 손목을 움켜쥐고, 힘주어 떼어 냈다.
“왜 전부 알고도 옆에 있었습니까?”
힘을 잃은 안대가 가르엘의 코와 뺨을 쓸며 추락했다. 카델은 막아 볼 새도 없이 드러난 그의 새까만 눈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흉보다 깊게 자리한, 가르엘의 치부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