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80/521)

그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만한 말들을 꽤 많이 생각해 두었다. 그럴싸한 말로 꼬드겨야지. 헛소리를 잘 포장해 봐야지.

가르엘이란 존재가 너무도 탐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데려오고 싶어서. 우스울 정도로 많은 상상을 했다.

하지만 막상 그의 어두운 역안을 마주하자, 그 모든 상상은 부질없어졌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증을 떨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건들면 금방이라도 깨질 듯 공허하고도 위태로운 감정을 맞닥뜨린 그 순간. 카델은 ‘가르엘의 상처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에 잠식당했다.

적어도 모든 걸 드러낸 그를 앞에 두고 뻔뻔스러운 거짓말로 잇속을 챙기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약점이라도 잡으려고 했습니까?”

가르엘은 아리도록 쥐고 있던 카델의 손목을 놓아 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델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에 없이 싸늘했다.

“쥐고 있으면 언젠간 쓸모가 있겠다 싶었어요? 아니, 처음부터 약점을 들먹이려 했는데, 제 쪽에서 그럴 필요도 없이 일을 처리해 주니 아껴 둔 겁니까? 이봐요.”

비틀려 올라간 입꼬리는 그의 표정을 더욱 사납게 만들었다. 온전하게 드러난 그의 얼굴은 전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고작 한쪽 눈의 흰자위가 검다는 것만으로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가르엘은 그 살벌한 기운을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와락 인상을 구겼다.

“소용없을 겁니다. 난 아주 오래전부터 모든 걸 내려놓는 연습을 해 왔거든. 경이 뭘 들먹이든, 내게서 얻어 낼 수 있는 건 없어.”

“오해하지 마시죠. 경의 비밀은 제게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 그랬을 뿐이니까.”

“……상관이 없다?”

카델은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두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가르엘을 마주 보았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선명한 역안에서 눈을 떼지 않고, 되려 한 발짝씩 발을 뻗어 다가갔다.

“경이 가리고자 했던 게 이 눈이든, 출생이든, 과거든. 그런 것들로 경을 판단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경이 보아도 좋다, 허락한 부분만 봤고, 그 모습이 이상하긴 해도 꽤 마음에 들었으니. 상관없었습니다.”

“…….”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요. 그 눈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가르엘의 왼쪽 눈가를 건드렸다. 움찔하면서도 피하지 않기에, 상처를 어루만지듯 쓸어내렸다.

그런 카델을 보는 가르엘의 눈빛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그 익숙한 농담 하나 던지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약점 잡을 생각도, 그걸 휘두를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왜 다 알면서도 옆에 있었냐고 물었죠?”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튀어나오는 말을 좀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급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바싹 날을 세운 채 물러서는 그를 당장 잡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 버릴 것 같아서.

“솔직히 말하죠. 경을 원해서 그랬습니다.”

“그게 무슨…….”

“탐났다고요. 성기사이면서 마족의 힘을 다루고, 그 힘으로 인간을 보호하길 택한 경이. 멀쩡히 기사단을 이끌던 단장이 갑자기 망나니처럼 굴고 있으니, 자기 힘을 비관해 떠날 준비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습니다. 그럼 내게도 기회가 있는 게 아닌가. 저 화려한 새가, 내 손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가르엘의 미간에 그림자가 졌다. 그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카델은 그의 이해를 돕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옆에 있었던 겁니다. 가지고 싶어서.”

그것이 카델이 꺼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이었다. 그의 신뢰를 얻을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의 앞에서 거짓을 지껄이고 싶진 않았다.

가르엘은 자신의 눈가를 매만지는 카델의 손등을 덮듯이 움켜쥐고는, 천천히 끌어 내렸다. 하얀 손가락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혼탁했다.

“……믿기지가 않는군요.”

“경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진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이 힘을 원한다니. 대체 얼마나 괴상한 취향을 가진 겁니까?”

“그 힘을 가진 당신을 원하는 겁니다.”

가르엘은 카델의 손을 힘없이 놓아 주고는 허리를 숙여 떨어진 안대를 주웠다. 짙은 조소가 떠오른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난 단 한 번도 이 더러운 힘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바란 적도 없고요. 그러니 그대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닌 마족의 힘이겠지.”

“가르엘 경.”

깊게 숨을 고른 가르엘이 안대를 다시금 동여맸다. 고작 눈 한쪽이 가려졌을 뿐인데. 그는 출생의 비밀을 가진 마족 혼혈이 아닌, 모두가 아는 유능하고 훤칠한 기사단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돌아가 주십쇼. 대가는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싫습니다.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아요.”

“아뇨, 가세요. 지금은…… 경이 없는 게 더 나을 것 같으니.”

더 버텨 보고자 했으나, 가르엘은 단호하게 그의 등을 떠밀어 문 앞까지 내쫓았다. 힘에 밀린 카델이 열린 문 너머로 빠져나가자, 가르엘은 망설임 없이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문틈으로 들이 밀어진 카델의 발에 가로막혀 그럴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약한 몸을 아주 막 다루는군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데요.”

“다시 만날 날을 정하기 전까지 떠나지 않을 겁니다.”

“덮칠 때나 이렇게 적극적으로 구시지.”

카델은 절로 악 소리가 나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가르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한쪽 발이 두 동강 난 채로 쓰러지게 되는 것일까, 암담한 상상을 할 때 즈음. 낮은 한숨과 함께 가르엘의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흘 뒤. 이곳으로 찾아오십쇼.”

“시간은요?”

“그날 내가 내키는 때에.”

그 정도면 됐다. 더 이상 문틈에 낀 발의 고통을 버틸 수 없었던 카델이 급히 몸을 물리자,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카델은 반대쪽 발로 간신히 균형을 잡은 채 이를 악물었다. 아픔에 일그러진 시선은 굳게 닫힌 방문을 향하고 있었다.

“……제대로 망쳐 버렸네.”

시작부터 제대로 꼬여 버렸다. 과연 자신이 이 엉켜 버린 관계를 제대로 풀어낼 수 있을지. 깊어 가는 밤을 따라 근심도 짙어져 갔다.

*

약속한 사흘이 다가오는 동안, 제국에 머물던 대사들은 ‘봉호 협약’에 따른 수호의 의무를 지키겠다는 각국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진 마계 봉인을 공동 관리하고, 봉인에 이상이 생겼을 시 제국의 ‘12봉인’을 우선시한다」는 조약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지원했다.

그렇게 마이뉴 왕국의 ‘청혈靑血 기사단’, 화이트 왕국의 ‘황혼 기사단’, 미스틱 공국의 ‘광야 기사단’, 둥켈하이 왕국의 ‘그림자 기사단’, 데번 왕국의 ‘암철巖鐵 기사단’, 스니벡 공국의 ‘호스 기사단’이 파견되었으며.

오스마 제국은 ‘호계 기사단’, ‘천시千矢 기사단’, 그리고 ‘적린 기사단’을 투입했다.

“호계 기사단은 3대대로 나뉘어 제8, 제9, 제10구역의 봉인을 확인하고, 천시 기사단은 2대대로 나뉘어 제11, 제12구역의 봉인을 확인하라는 황제 폐하의 엄명이다. 적린 기사단은 가장 규모가 큰 10구역에 합류하도록.”

제국의 근위대장 인셀의 호명에 도열해 있던 각 기사단의 단장과 대대장들이 절도 있는 경례로 답을 대신했다. 카델은 옆 사람의 동작을 눈치껏 따라 하며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이쪽은 추가 인력인 셈인가. 독자적으로 움직이게 두진 않는군. 아직 믿음이 없으니 감시할 눈을 붙이겠다는 걸지도.’

어차피 제국을 배신할 마음은 코빼기도 없다. 처음부터 어려운 단독 임무를 받는 것보단 아군을 보조하며 분위기를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니. 카델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출발 날짜는 이틀 뒤다. 타국의 병력 또한 같은 시기에 움직일 테니, 모쪼록 제국 기사단의 저력을 보여 주길 바라지.”

외국 놈들보다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고 복귀하라는 소리였다. 기합에 가까운 대답을 끝으로, 전달 사항을 빠짐없이 알린 근위대장이 자리를 떠났다.

규모가 큰 호계 기사단이나 천시 기사단은 대대를 나누기 위해 각 단장과 대대장들이 모여 곧장 의논을 시작했다. 하지만 카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제10구역에 함께할 아군을 선별할 권한 따위는 없었으니까. 때문에 카델은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어이.”

반갑다고도, 께름칙하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인물이 카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 드레프 경. 오랜만입니다.”

호계 기사단 제5대대의 대대장, 드레프 엔티. 여전히 성격 나빠 보이는 표정을 동반한 그가 카델을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볼 때마다 기가 차는군.”

“반가워서요?”

“어이가 없어서!”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럽니까.”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똑바로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널 벼르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겁을 먹으라고 한 소리였는지, 드레프는 심드렁한 카델의 반응이 못마땅한 듯 연신 헛웃음을 뱉어 댔다.

“제 정체를 알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갑자기 끼어든 용병 출신 기사가 아니꼬운 거라면, 실력으로 누르면 됩니다.”

“흥, 그런 식으로 나가면 미움만 더 사게 될걸.”

“미워할 마음도 안 들게 열심히 눌러 보죠.”

카델의 태평한 태도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참 그를 노려보던 드레프가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10구역에 배치될 것 같으니, 사고나 치지 말라고. 네 정체를 아는 입장에서 아주 심장 쫄리니까.”

“흠, 제 감시 역할은 드레프 경이 맡게 됐나 보네요?”

“감시는 무슨! 너한테 신경 쓸 여유 없어. 알아서 잘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드레프는 툴툴거리던 것을 멈추고 카델을 지나쳐 갔다. 카델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저렇게까지 겉과 속이 다르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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