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라이돈’의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78/100]
잡은 카델의 손바닥 위로 마구 입을 맞춘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기껏 자유롭게 해 줬더니 이번엔 구속이야?’
절로 헛웃음이 나는데도 기분은 썩 좋은 걸 보면, 자신도 어지간히 라이돈을 묶어 두고 싶은 듯했다.
‘……슬슬 호감도가 무서워지긴 하지만.’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았던 라이돈의 호감도도 위험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다가오는 현실이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감당, 가능하겠지?’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구도 해 주지 않았지만, 카델은 ‘어떻게든 되겠지’란 심정으로 라이돈의 얼굴을 장난스레 쓸어내렸다.
사랑이 폭발해 죽기라도 하겠는가. 그러니 호감도 걱정은 제쳐 두고, 당장 내일 만나야 할 가르엘 몬자시의 문제부터 고민해야 했다.
가르엘과의 약속은 장소만 정했을 뿐 시간은 불확실했기에, 카델은 이른 새벽부터 여관을 찾았다.
그때와 같은 방을 찾아가 미리 값을 치러 둘 심산이었으나, 이미 가르엘이 선수를 친 듯했다. 심지어는 외출로 자리를 비웠다고 하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카델은 가르엘의 객실과 최대한 가까이에 방을 잡았다. 고급스러운 여관이었기에 하루 묵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돈이 들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르엘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이깟 푼돈쯤이야. 오히려 싸게 먹히는 거지.’
게다가 이제는 의뢰 하나에 허덕이는 용병단이 아닌 황실 직속의 기사단이었다. 돈이 궁해 이것저것 까다롭게 셈하던 과거와는 안녕이다.
“……언제쯤 오려나.”
한참 동안 방 안을 서성이며 바깥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작은 발소리라도 들린다 싶으면 황급히 달려 나가 복도를 내다봤다.
그렇게 미친 사람 보는 듯한 눈초리를 받아 내기를 수차례. 카델은 이런 식으로 가르엘을 기다리다간 신경 쇠약에 걸리는 것이 빠르리라 직감했다. 차라리 가르엘의 객실 앞에서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오늘 안에는 오지 않겠는가.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성으로 돌아가 가르엘이 묵고 있을 귀빈실에 쳐들어가면 된다. 사흘간 그를 찾지 않고 참았던 것은 오로지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니.
비장하게 눈을 빛낸 카델이 가르엘의 객실 문 옆에 기대어 섰다. 귀걸이를 착용하고 왔으니 사람들 눈에 띄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카델은 슬쩍 눈치를 보며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최대한 멋있는 모습으로 가르엘을 맞이하고 싶었으나, 처참한 체력은 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인내하지 못했다.
세 시간이 지났을 무렵,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장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간식이라도 챙겨 올걸.’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가르엘이 올지도 모른다. 식당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직원에게 먹을 것을 부탁하기도 꺼려졌다. 허겁지겁 밥을 먹는 동안 가르엘이 돌아오면 면이 안 살지 않겠는가. 한 끼 거른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 참기로 했다.
다시 세 시간이 지났을 무렵엔,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앉는 것도 질려 복도를 서성이며 굳은 다리를 풀어 주다, 점점 심해지는 공복감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또다시 세 시간. 가르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카델은 수상한 사람이라는 신고를 받아 여관 주인장에게 제 신분을 밝혀야 했다. 덕분에 쿠키를 받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갖은 질문 공세를 받느라 조금 피곤해지기는 했지만.
저녁 6시. 피로가 극에 달한 카델은 숨소리 대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냥 자신의 객실로 돌아가 여유롭게 기다릴까. 유혹의 손길이 뻗쳐 왔으나, 어떻게든 참았다. 지금 들어가면 그대로 잠이 들 것 같았다.
9시. 정신이 몽롱해졌다. 카델은 멀거니 허공을 응시하거나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등 반쯤 의식을 놓고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검토해 볼까 생각도 해 봤으나, 그것도 기운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계속 안 오면 어쩌지. 언제까지 기다리는 게 맞는 거야?’
12시가 되자마자 떠나 버리기는 아쉬웠다. 가르엘이 변덕을 부려 12시 1분에 나타나면 어떡하나. 그렇다면 적어도 새벽 1시까지는 기다려 봐야 하는 건가? 힘없는 질문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하루가 끝나기까지 고작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그냥 밤에 올걸.”
이런 일에 일일이 후회하고 싶지 않았으나, 몸이 고되니 절로 약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메마른 얼굴을 벅벅 문지른 카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딱 두 시간만 더 기다린다.”
이래저래 생각해도 아쉬운 것은 본인이었지만, 카델은 인심 쓰는 척하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종일 딱딱한 바닥에서 뒹굴었더니 삭신이 쑤셨다. 고통을 참듯 지그시 눈을 감자, 뻑뻑했던 눈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눈을 감아도 잠은 잘 수 없다. 카델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매섭게 다잡았다. 억지로 머리를 짜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코앞으로 다가온 출정이나 호계 기사단과의 협력, 날마다 그리운 루멘의 소식,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퀘스트 따위를.
하나둘씩 꼼꼼히 떠올리던 중, 문득 가르엘의 서늘한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난 단 한 번도 이 더러운 힘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바란 적도 없고요. 그러니 그대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닌 마족의 힘이겠지.”
당시에는 어떻게든 가르엘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깊게 파고들지 못했으나,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건 가르엘의 치유 능력이고, 그러려면 마안을 개방해야 할 테니까.’
치유술을 위해 마족의 힘을 개방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곁으로 온다면, 가르엘은 자신이 혐오하는 그 힘을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한다. 가르엘에게 있어 그보다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그 어려운 걸 설득해야 한다니.’
새삼 얼마나 힘든 작업이 될 것인지 실감이 났다. 만약 자신이 이곳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고 생과 사를 넘나들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부하들이 곧 죽을 듯 헐떡이면서도 끝끝내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가르엘의 힘을 얻으려 하는 대신, 그의 선택을 존중하며 내버려 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카델에게는, 적린 기사단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가르엘이 필요했다.
“이렇게 불쌍하게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 순간 머리 위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눈을 뜬 카델의 시야 속으로 문 앞에 비스듬히 선 가르엘의 모습이 들어찼다. 술을 마시고 온 것인지, 그에게서는 진한 알코올 향이 풍겼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생색내는 거예요?”
카델은 최대한 여유롭게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그새 다리에 쥐가 난 탓에 볼썽사납게 비틀거렸다. 평소였다면 그런 카델을 부축하며 수작질을 부릴 가르엘이었으나, 그는 무심히 시선을 돌리며 객실의 문을 열었다.
“들어와요.”
가르엘은 카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카델은 저릿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유지해 보려 했다. 하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을 관통하는 저릿함에 절로 불쌍한 표정을 짓게 됐다.
겨우 들어와 문을 닫고, 다리에 피가 통할 때까지 문에 기대섰다. 그동안 가르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대화의 의지라고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행동이었다.
‘내가 기다리는 동안 술이나 진탕 마시고 있었단 말이지.’
절로 괘씸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쉬운 쪽은 여전히 자신인데.
겨우 고통을 가라앉힌 카델이 침대로 다가갔다. 가르엘은 무방비하게 드러누운 채 고른 숨소리를 뱉더니, 카델의 기척이 가까워지자 짜증스럽게 안대를 끌어 내렸다. 색이 다른 두 눈이 웃음기 없는 카델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제 뭘 할 건가요. 대화? 설득? 아니면, 사과?”
“특별히 원하는 주제라도 있습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군요.”
그리 중얼거리는 가르엘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가득했기에, 카델은 저도 모르게 ‘알겠어요’ 하고 입을 다물 뻔했다. 가르엘은 손에 들린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모로 눕혔던 몸을 바로 돌렸다.
“사흘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부족하더라고요. 여전히 경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 줬네요.”
“저도 경과 주사가 비슷한 모양입니다. 발길이 저절로 움직이니, 당해 낼 재간이 있나요.”
카델은 침대에 걸터앉을까, 하다 마음을 바꿔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왔다. 가르엘은 그 일련의 행동이 이루어질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시선의 끝에는 여전히 카델이 있었다.
“제가 경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게 불편하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이미 알고 있는 걸 하루아침에 잊을 수도 없고. 모르는 척 군다고 경의 마음이 편해지지도 않을 거고.”
“맞는 말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네요.”
“제가 경의 힘을 원한다는 대목이 탐탁지 않은 거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여전히 포기할 마음이 없으니까요.”
“그건 최악이군요. 올해 들었던 말 중 가장 최악이에요.”
가르엘이 헛웃음을 뱉으며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헝클인 그가 부쩍 피곤해진 낯으로 말했다.
“술 없나요?”
“없어요.”
“저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다면 좋은 술을 가져왔어야죠.”
“맨정신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미 그른 것 같지만.”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입고 있는 옷에까지 술 냄새가 밴 듯했다. 카델의 비난에 가르엘은 힘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맨정신이든 아니든,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하나뿐입니다. 싫다. 그대가 뭘 원하든, 싫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난 그걸 이루어 주고 싶지 않아요.”
“……전엔 제 부탁이면 뭐든 저항 없이 들어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아, 그땐 그랬죠. 멍청하게도.”
가르엘은 침대에서 일어나 남은 술을 찾아 나섰다. 한참 정신 사납게 방 안을 뒤적이던 그가 반쯤 남은 술병을 발견하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쓸데없는 짓은 관두고 이만 돌아가시죠. 되도록 밖에서도 아는 척 마시고.”
빈정거리는 말투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카델이 보고 싶지 않다던 그의 말은 진심이었는지, 과거에 보여 주었던 살가운 태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이었나. 카델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카델은 오늘 밤, 이곳에서. 무조건 가르엘을 끌어들여야 했다.
“저도 마찬가지네요. 가르엘 경이 뭘 말하든, 싫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관두지도 않을 거고, 돌아가지도 않을 거고, 아는 척도 할 거예요.”
“이 의미 없는 짓을 언제까지 할 작정인데요? 미리 알아 둡시다. 그동안 잠적이나—”
“경이 내 사람이 될 때까지.”
의자를 박찬 카델이 가르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그의 손아귀에서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제가 생긴 것관 다르게 집착이 심합니다. 그러니 평생 시달리고 싶지 않다면, 협조 좀 해요.”
일말의 타협도 보이지 않는 단호한 눈빛. 잠시간 카델의 끈질긴 시선을 받아 내던 가르엘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경은 그렇게 낳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