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새벽.
호계 기사단과 적린 기사단은 일출과 함께 봉인진 방면으로 진군했다. 목표 지점은 봉인진으로부터 약 5킬로미터 떨어진 언덕이었다.
대기 장소에 도착한 호계 기사단은 무기와 마도구를 점검하고, 새벽 진군으로 인한 피로를 풀었다. 그들의 옆에서 적린 기사단은 곧바로 이어질 정찰 채비를 했다.
“괜히 오기 부리지 말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신호 보내라고. 들킨 후에 보내 봤자 피 보는 일만 생기니까.”
드레프는 카델의 근처를 서성이며 괜한 핀잔을 두었다. 반의 서슬 퍼런 시선도 눈치채지 못한 채 카델을 살피던 그였으나, 정작 카델은 귀찮은 친척 동생을 대하듯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예. 마물 꼬리만 보여도 바로 신호 보낼게요.”
“농담 아니야! 암살자가 아닌 이상 기척을 완벽하게 숨기는 건 불가능하니까, 살고 싶으면 놈들보다 빨리 행동해야 한다고.”
“그럼요. 누구보다 재빠르게 행동할게요.”
“재빠르기는! 저번에 달리는 거 보니까 갓 걸음마 뗀 아기가 너보다 빠르겠던데.”
홀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카델의 태도를 지적하던 그를 저지한 이는 소린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드레프를 뒤로 끌어내며 카델에게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모여 있는 마물이 감당 가능한 수준이라면 어제 주었던 신호탄을 쏘고, 아니라면 화염구를 쏘게. 30분 이내로 합류할 수 있을 테니 되도록 방어에 주력하도록 하고.”
“네.”
“봉인은 무리해서 활성화하지 않아도 되네. 이쪽 마법사들이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더 안전할 테니, 되도록 힘을 아껴 둬.”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소린의 지긋한 시선이 느껴졌다. 카델이 그와 눈을 맞추자 소린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다, 결국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카델은 그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랬기에 굳이 그를 붙들어 캐묻는 대신 얌전히 떠나는 쪽을 택했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들러붙는 드레프의 지겨운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부하들을 끌고 봉인진으로 향했다.
*
구릉 지대의 언덕을 부지런히 타고 오르며, 카델은 신중하게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들은 바로는 알리티스 같은 봉인 구역의 마물은 보통 마물보다 힘이 세고 사납다고 한다. 기습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물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해 두어야 했다.
그렇게 카델이 침착한 마음과 상반되는 가쁜 호흡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무렵. 라이돈은 선두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편안한 비행을 즐기고 있었다.
“난 봉인 앞에 마물 500마리가 있대도 감당할 수 있어. 어때, 자기? 나 멋있지?”
“어. 멋있네.”
라이돈은 이동 내내 시답잖은 농담을 꺼내거나 으스대며 카델의 반응을 살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델의 대답은 시원찮아졌으나, 그럼에도 라이돈은 꽤나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불만족스러운 것은 반뿐이었다.
“웃기는군. 고작 500마리로 폼 잡는 거냐? 단장은 그 정도로 만족할 남자가 아니야.”
“흐응, 그럼 반은 얼마나 잡을 수 있는데?”
“5000마리도 가능하지.”
“아하하! 허세 봐!”
“……죽고 싶냐?”
“그럼 난 50000마리!”
놀리듯 손가락 열 개를 펼쳐 까딱이는 라이돈의 모습에 반이 사납게 대검을 빼 들었다. 매번 까부는 라이돈도 라이돈이지만, 매번 도발에 넘어가는 반도 반이었다. 카델은 팔팔한 두 부하를 일별하며 설설 고개를 저었다.
‘쟤네는 대체 뭘 먹길래 체력이 저렇게 좋은 거지.’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자신도 라이돈 같은 날개나 반 같은 체력이 있다면 이깟 정찰 따위 산책처럼 가볍게 다녀올 수 있었을 텐데.
‘그냥 지금 바람 속성을 찍어 버릴까.’
현재 그의 인벤토리에는 가르엘에게 선물 받은 [순환의 물약]이 있었다. 훗날 치를 전투에서 유용하게 쓰일 다른 속성이 있을지 몰라 아껴 두었던 것이다.
그날이 오기 전까진 퀘스트로 얻었던 속성 포인트 10을 보험 삼아 불 마법을 운용해야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바람의 길]을 시전하고 싶었지만, 후회할 일이 생길 듯한 우려감에 선뜻 손이 가진 않았다.
“그런데 단장. 봉인을 관리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일인가요? 활성화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인 것 같던데.”
대검을 휘둘러 라이돈을 멀리 날려 보낸 반이 카델의 옆에 붙어 섰다. 카델은 그런 반의 팔을 지팡이처럼 붙들어 몸의 무게를 분산시킨 뒤,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활성화는 봉인진에 담긴 봉인의 기운을 실체화시키는 거야. 그래야 봉인 상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 관리는 봉인에 균열이 생겼는지, 기운이 느슨해졌는지, 상태를 보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하는 거고. 이번 봉인에 별 이상이 없다면, 봉인진을 더 두텁게 보강하는 정도로 끝나게 될 거야.”
반은 자신의 팔을 쥔 카델을 흡족하게 내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균열이 생겼다면 큰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겠네요. 봉인을 복구하는 동안 그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으니.”
“그렇겠지. 그래도 뭐, 이만한 인원이 모였는데. 고작 균열 가지고 애먹진 않을 거야.”
이번 파견은 관문 전투 때와는 달리 마법사의 수가 상당했고, 전투 준비도 만반이었다. 게다가 이 임무는 메인 퀘스트도 아니었다. 봉인의 상태를 보여 주기 위한 짧은 컷신에 불과했고, 카델에겐 당장 스킵해도 아쉬울 것이 없는 이벤트였다.
본격적인 퀘스트는 제국 바깥을 돌면서 발생하니. 이곳에서 셀레브 같은 고위 마족을 맞닥뜨릴 위험은 없는 것이다.
‘일종의 준비 운동이지. 중요한 전쟁도 마계 해방 이후에나 발생할 테니까. 오랜만에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겠어.’
마계가 해방되는 자세한 과정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 찜찜하긴 했으나, 대충 봉인이 깨졌으니 해방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대규모 인원이 돌아가며 꼼꼼히 점검해 봤자 전부 깨질 봉인이라는 거다.
그리 생각하면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 또한 과정이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봉인이 지금 당장 깨지는 건 아니니까. 그 전에 맡은 일을 빨리 해치우고, 나도 준비를 해 둬야겠어.’
본격적인 마계 전쟁을 대비한 준비. 마지막 기사 영입.
‘루멘과 가르엘을 무사히 영입하면, 남는 기사 자리는 딱 한 자리다. 거기 누굴 들일지는…….’
전부터 생각해 둔 인물은 있었다. 그를 찾아가는 것부터가 문제이긴 하지만.
‘황제에게 기사단 인원 추가는 내 관할이라는 허락을 받았으니 사람을 가릴 필요는 없어. 만약 그놈을 찾지 못한다면, 다른 쓸 만한 기사라도 데려와서 자리를 채워야지.’
마계 전쟁을 치르기 전에 기사단을 완성하고, 그들의 육성에 힘을 쏟아야 했다. 그래야만 대미를 완벽하게 장식할 수 있을 테니.
‘……마지막이라.’
스토리의 끝을 생각하니 묘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것이 표정에서도 드러난 듯, 반의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 다리 아파요? 걷기 힘들면 말씀하세요. 언제든 업어 드릴 테니까요.”
“응? ……아냐, 괜찮아. 아직 팔팔해.”
서둘러 잡념을 털어 낸 카델이 입가에 힘을 주었다. 기사단으로 승격한 이후, 종종 이런 식의 갑갑함을 느끼곤 했다. 이유가 뭔지 알 것도 같았으나, 카델은 그 부분을 깊게 파고드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카델이 억지웃음으로 반의 걱정을 떨쳐 내던 때. 맞은편에서 앞서가던 라이돈이 크게 외쳤다.
“자기, 여기로 가면 봉인진이 나오는 거 아니야?”
“나오는 거 맞고, 목소리 낮춰. 난 시작부터 마물한테 포위당하기 싫거든.”
“고작 10마리한테 포위당해 봤자 재미도 없어!”
10마리? 카델이 반문하자 라이돈이 실망감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불시에 카델의 허리를 끌어안아 하늘로 날아올랐다.
“가, 갑자기 뭐야?”
“저것 봐, 자기. 저 듬성듬성한 마물들. 이렇게 조금밖에 없을 줄 알았으면 앉아서 간식이나 먹고 있었을 거야.”
하늘에서 내려다본 지면에는 널따란 언덕 하나를 통째로 뒤덮은 흰색 봉인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의 주변으로 작은 점 같은 마물들이 보였다. 정찰의 의미가 퇴색될 만큼 적은 수의 마물이.
“……진짜 10마리네?”
“재미없어. 시시해.”
포위의 걱정조차 무용해질 숫자였다. 게다가 종류도 고블린같이 흔해 빠진 놈들이라, 토벌에는 10분도 소요되지 않을 듯했다.
‘아주 바람직하네.’
라이돈은 티끌만 한 숫자에 투덜거리기 바빴으나, 카델의 입장에선 아주 좋은 현상이었다. 지금껏 뼈 빠지게 전투해 온 그들에게 이런 간단한 토벌은 포상이나 다름없었으니.
카델은 라이돈의 품에 안긴 채 신호탄을 발사했다. 저 정도 마물이야 더 볼 것도 없이 감당 가능했다.
“조금밖에 없으니까 양보할게, 라이돈. 다 네가 잡아.”
“나한테 떠넘기는 거야?”
“무슨 소리야. 이런 건 마물 500마리도 감당할 수 있는 네가 맡아야지. 난 봉인진이나 건드리러 가 볼게.”
뻔뻔스럽게 미소 지은 카델이 라이돈에게 하강을 명령하자, 라이돈은 실망 가득한 한숨과 함께 비행의 고도를 낮췄다.